<멋진 신세계>와 <해피 버스데이>는 임필성 감독의 본래 취향과 새로운 변화 모두를 보여준다. 유혈이 낭자한 호러영화와 <멋지다 마사루>식의 4차원 개그 사이에서의 줄타기라고나 할까. 얼핏 어울려 보이지 않는 그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어느덧 6년이 흘렀다. 두 장편 <남극일기>와 <헨젤과 그레텔>은 국내 평단으로부터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충무로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듯 장르적으로 펼쳐놓은 임필성만의 다부진 고집과 유혹적 취향을 읽을 수 있는 영화들이었다. 판타스포르투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헨젤과 그레텔>의 경우 데이비드 보드웰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특별히 ‘컬트’라며 언급하기도 했고, 실제로 국내에도 없는 블루레이 버전이 북미지역에서 출시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해피 버스데이>와 그사이 만든 아이폰 단편 <슈퍼덕후>, 그리고 곧 크랭크인하게 될 <주말의 왕자>는 ‘땅에 발이 닿은 영화’다. 이제는 웃고 싶다고 말하는 그다.
-<해피 버스데이>를 세 번째로 완성하면서 정식 개봉에 이를 수 있게 됐다. 정말 속이 시원할 것 같다. (웃음) =6년 동안 틈만 나면 항상 ‘마무리해야 하는데’라고 계속 되뇌였다. 사운드나 편집 등 뭔가를 계속 손봐야 할 것 같은 강박도 있었고.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할 일이 없으니 꽉 막힌 체증이 사라진 기분이다. 희한한 영화라며 흥미를 가져준 송새벽, 배두나 등 캐스팅도 잘 풀렸다. 배두나양에게는 출연료를 못 준다는 말과 함께 진지희의 성인으로 나오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는데 흔쾌히 오케이해줬다. (웃음)
-아무래도 <멋진 신세계>에 호러영화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이 많이 담겨 있는 데다, 오래전에 힘들게 완성한 영화여서 좀더 ‘내 영화’ 같은 애착이 있지 않나. =두 영화 모두 애착이 간다. 물론 <멋진 신세계>에는 당시 <남극일기>의 흥행 실패로 인한 나의 히스테리나 광기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 세상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갈기는 기분으로 만든 영화니까. (웃음) 애초에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 같은 좀비영화를 한국적 상황하고 엮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장편 아이템으로 생각한 영화였는데 <남극일기>의 실패로 음… 아무튼 애초에는 시의적으로 사회풍자도 하면서 좀비로 조갑제도 출연시키고 그럴 생각이었지. (웃음)
-좀비로 가득 찬 서울이라는 엔딩이 당시로선 매우 야심있는 시도였다. =배우, 스탭 다 열정에 불타서 야심있게 서울시청을 배경으로 해보자고 했다. 그러면 파괴력이 엄청날 테니까. 그러면서 결국 엔딩을 못 찍다가 주말 휴일에 역삼동을 갔는데 완전히 유령도시더라. 출근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가게도 다 문을 닫고. 누군가가 여의도가 훨씬 더 넓고 더 유령도시 같다고 하기에 12월30일, 31일 이틀간 촬영했다.
-6년 전 <멋진 신세계>에 참여했던 배우나 스탭들이 지금 하나같이 다 잘나가고 있다. =고준희의 첫 작품이 <멋진 신세계>다. 늘 마음의 짐이었는데 시사회 뒤풀이 때 끝까지 있어주고 그러니까 너무 고마웠다. 스탭들을 봐도, 지금 <건축학개론> <시체가 돌아왔다> 두편이나 걸려 있는 조상윤 촬영감독의 첫 작품이었고 강대희 조명감독도 이후 <모던보이> <이끼> <하울링> 등을 했다. 영화에서 “저 새끼가 고기를 처먹더니 기운이 남아도네” 하는 김무열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마동석 형도 그땐 일 없이 피트니스센터만 다닐 때였고 윤제문 형도 그 뒤로 잘 풀렸다. 말하자면 지금 나 빼고 다 잘나간다. 나만 잘하면 되는데. (웃음)
-<멋진 신세계>에서 영화 속 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시민단체 논객 봉준호 감독의 우정출연이 배꼽 빠지게 만든다. =<괴물>에 나를 속여서 출연시킨 것에 대한 복수다. (웃음) 당시 그냥 사무실 와서 리딩 한번 해보자고 해서 갔더니 상대배우인 박해일도 와 있고 연출부가 카메라 세팅을 하고 있더라. 준호 형한테 뭐냐고 했더니 그냥 형식적으로 찍어보는 거라고 했다. 아무튼 급하게 해일이와 대사 외우고 리딩을 했는데 갑자기 “NG!”라고 그러더라. 리딩에 NG가 어딨나. 불안해서 미리 찍어보는 거라며 5, 6번 정도 테이크를 갔다. 그러면서 그 뒤에도 꾸준히 나가서 촬영을 했다. 내가 살 빼야 한다고 그만하자고 했는데 웃기지 말라면서 고기를 사주며 6개월에 걸쳐 그 체형을 유지한 채 서너번 나가서 찍었다. 그 복수를 하고 싶어서 스트레이트로 머리 펴게 하고 개량한복 입혀서 출연시켰다. (웃음) <남극일기>를 같이 했던 제문이 형도 그땐 딱히 할 일 없을 때라 노느니 하루 나와달라고 해서 함께 촬영했다. 자기는 시인 김지하를 닮았다고 우기는데 내가 볼 때는 주병진을 닮은 거 같아서 ‘주제문’으로 나온다. <그렘린2> 같은 데서 키치적으로 미디어를 이용하는 장면이 있는데 ‘90분토론’이니 ‘AD수첩’이니 하는 그 토론 프로그램 장면을 통해 그런 걸 해보고 싶었다. 더 세게 만화 <멋지다 마사루>처럼 하고 싶어서 준호 형에게 기타 가져오라고 하고 제문 형에게도 퉁소를 불게 했다. (웃음)
-배우 얘기를 더 하자면 <해피 버스데이>의 진지희를 <헨젤과 그레텔>로 발굴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진짜 대단한 애다. 내가 피곤해하는 거 같으면 어깨를 두드려주고 간다. 그날 촬영이 끝나면 같이 한잔하고 헤어져야 할 거 같은 분위기다. (웃음) 뒤풀이 자리에서도 다른 배우들이 “지희는 안 와요?” 그러니까. 다들 동료 배우로 생각하는 거다. 연기에 대한 철학이나 테크닉에 대한 고민이 성인들하고 비슷한 수준이니까.
-다소 황당한 설정의 <해피 버스데이>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됐나. =1편은 너무 난장을 쳐서 3편은 뭔가 정제된 느낌을 주고 싶었다. 동시에 전체 옴니버스영화의 에필로그 같은 성격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승욱 감독의 추천으로, 이제는 엎어진 장편 <악의 꽃>을 함께하려고 했던 <간증>의 박수민 감독을 작가로 섭외했는데, 그가 방공호 아이디어를 냈고 영화처럼 거대한 8번 공은 물론이고 목성과 토성을 당구공처럼 다루는 초키치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웃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느낌으로 미친 척하고 당구공이 지구로 여행을 오게 하는 거였다. 거기서 의견 조율을 하다가 결국 그가 ‘원안’으로 갔고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쉬운 것도 있다. 영화 속 게임 캐릭터는 굉장히 야심적으로 넣은 건데 시사회 때 아무도 안 웃더라. 전체적으로 ZAZ 사단을 연상시키는 80, 90년대 미국식 난센스 코미디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방공호의 프로덕션 디자인 컨셉은 무엇이었나. =방공호에서 네 식구가 하루에 캔 하나씩 먹으며 10년 이상 지낸다고 가정하고 꼼꼼히 계산해서 박스로 2층을 다 채웠다. 그리고 먹고 남은 캔들이 몇 백개가 쌓일 테니 그걸로 ‘트래시 아트’를 하는 걸로 했다.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아이디어를 모으다 보니 한국적 저예산 SF를 이렇게 찍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피 버스데이>에도 <멋진 신세계>처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미디어 풍자 장면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그 첫 번째 에피소드와 묘한 대구를 이룬다. =홈쇼핑 장면은 내가 연출했지만 아나운서 류승수와 이영은이 등장하는 스튜디오 장면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거다. 두 배우의 캐스팅도 직접 했다. <씬시티>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1달러를 받고 특별객원감독으로 참여한 것과 같은 건데 나는 <천상의 피조물>에서 박해일의 목소리 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런 미디어 풍자 장면들을 보면, 요즘처럼 1인 미디어 시대에 거의 유명무실할 정도로 제 기능을 못할 때가 있지 않나. 그런 말도 안되는 엇박자를 그리고 싶었다. 지난 일본 원전사고 때 일본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말이 많았는데, 가령 우리나라에서 <멋진 신세계>의 좀비나 <해피 버스데이>의 행성 충돌처럼 지구 종말이 닥치는 상황이 와서 정부가 그렇게 늑장을 부린다면 한국인의 극단적인 행동력으로 청와대가 불타지 않았을까.
-현재 준비하고 있는 <주말의 왕자>에 대해 소개해준다면. =찌질한 30대 세 남자가 친구 결혼식 때문에 부산 해운대에 가서 겪게 되는 대소동극이다. 얼핏 <행오버> 같은 인상을 줄 텐데 <사이드웨이>나 <미스 리틀 선샤인> 같은 이상한 유머를 가미하고 싶다. 현재 박해일과 송새벽이 캐스팅됐고 나머지 한 남자를 찾고 있다. 박해일은 <연애의 목적>에서 봤던 유머러스한 똘끼가 더 나올 것 같고 송새벽은 의외의 섹시 가이 컨셉이다. 매일 해운대에 MT 가는 기분으로 즐겁게 찍고 싶다. 사실 그런 코미디가 나에게 더 맞는 것 같고 나라는 인간도 많이 변했다. (웃음) 그동안 내가 충무로에서 돈 많이 쓰면서 흥행 안되는 감독으로 낙인찍힌 것 같은데, 이번 영화로 리부팅하는 게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