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실연의 아픔으로 고통이 크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언제까지고 방바닥에 누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이제 배도 고프고 나중에 장우동에 가서 김밥이나 먹으려고요. 김밥이 굉장히 커요. 그리고 밤에는 친구 납뜩이랑 머리에 무스 바르고 콜라텍에 가려고요. 요즘 마카레나 춤이 유행이래요. 한번 배워보려고요. 이제 람바다의 시대는 갔어요.
-네, 그렇게 취미생활이라도 하면서 실연의 고통을 이겨보세요. 영화도 보러가시고요. =요즘 <레옹>이 그렇게 재밌대요. 그것도 납뜩이랑 보려고요. 그리고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스트리트 파이터> 들어왔다고 빌려보래요. 역시 요즘엔 장 클로드 반담이 대세죠.
-<무언의 목격자>도 추천합니다. 정말 무서워요. <게임의 법칙>도 보시면 스트레스 확 풀립니다. 아무튼 두분이서 만나기로 한 날, 약속장소에 왜 그렇게 늦게 나가셨어요. 그날 만나기만 했어도 다시 잘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는데, 서연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그만 숨어버렸어요.
-아니,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멀리서 보니 화장을 했더라고요. 여자가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뭔가 외모에 변화가 생기면 큰 변화가 있는 거라는데, 혹시나 방송반 재욱 선배랑 잘돼서 깔끔하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왔을 수도 있잖아요. 재욱 선배가 화장 어쩌고저쩌고 한 얘기가 생각나서요.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참 찌질하시네요. 시간도 한참 지나서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얼마나 잘 보이고 싶었으면 그렇게 어색하게 화장을 하고 나왔겠어요. 그 마음도 몰라주고 참으로 딱합니다. =네, 엄청나게 후회돼요. 저도 잘 보이려고 새로 산 제우스 티셔츠에 DJNY 모자에 아다다스 신발 신고 나갔거든요. 그런데 그땐 정말 용기가 안 났어요. 참 바보 같죠. 그래서 그 길로 혼자 노래방에 가서 <취중진담>과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 그리고 박상민의 <멀어져간 사람아>만 불러댔어요.
-이거 참 노래방에서 <취중진담> 부르는 예비역 선배들을 제일 증오하는데 당신이 그러고 있군요. 그러다 나중에 나이 들면 당신의 곱상한 외모가 확 바뀔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설마요. 아무리 건축학과 수업이 고생스럽고 밤도 많이 샌다지만 이 얼굴이 얼마나 변하겠어요.
-아니에요. 성격도 남자답고 까칠해질 수 있어요. 이건 사실 제가 당신의 미래 모습을 미리 보고 하는 얘기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서연씨를 다시 만나 지금 갖고 계신 선물을 택배로 보내실 거면, 꼭 망가지지 않게 뽁뽁이로 싸서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랑을 쓸 때는 연필로, 보낼 때는 꼭 뽁뽁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