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국제영화제 가운데 연중 가장 일찍 개최되는 베를린영화제는 그 위상에 걸맞게 한해의 세계영화의 동향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마땅하겠지만, 실제로 베를린이 그러리라 기대하는 이는 이제 거의 (혹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물론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울리히 쾰러의 <수면병>처럼 걸출한 작품들이 지난해 베를린을 빛나게 한 건 사실이지만 1년이 지나고 난 지금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을 영화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올해 경쟁부문 역시 극소수의 수작들- 그 가운데 한편은 올해의 영화로 미리 꼽을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이 초청되기는 했지만 브리얀테 멘도자의 <포로>와 스피로스 스타툴로풀로스의 <메테오라> 등 터무니없는 영화들 틈에 섞여 있었고, 게다가 최고의 상들은 삶과 연기의 병행구조를 취한 타비아니 형제의 구식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와 사회적 이슈를 짐짓 예술적으로 담아내려다 지루한 허세로 빠져들고 만 베네덱 플리고프의 <그저 바람>에 돌아갔다. 한편 베를린 경쟁부문의 결핍을 달래는 프로그래밍으로 사랑받았던 포럼부문에도 점점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영화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최근에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저널리스트, 평론가, 프로그래머들이 포럼에서 반드시 피해야 할 영화의 목록을 매일같이 교환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어떤 영화제나 수준이 다른 여러 영화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지만 극도로 비인칭적인 시선과 엄격한 거리두기로 기존 동물다큐멘터리의 의인화의 관습을 완벽히 해체해버린 드니 코테의 <우화>나 아방가르드적 추상성을 정치적 텍스트와 결합하는 데 성공한 켄 제이콥스의 <원숭이의 왕을 찾아서>처럼 빼어난 작품들이, 무가치한 영화라고밖엔 할 수 없는 마리아노 루케의 <살시푸에데스> 같은 영화들과 나란히 놓여 있는 정도가 되면 관객으로선 좀 헷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베를린영화제가 처한 곤경을 프로그래머의 능력 부족이나 안목의 결여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거대 국제영화들간의 역학관계, 오늘날 영화제 서킷을 움직이는 국제 배급사의 영향력과 서구-비서구 영화계간의 네트워크 등이 한데 뒤얽힌 영화제 정치의 기이한 광경이 베를린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브리얀테 멘도자의 <포로>가 칸과 베니스에서 차례로 거절당한 뒤에야 비로소 베를린에 눈을 돌렸으며 감독과 배우(이자벨 위페르)의 스타파워가 필요했던 베를린으로서는 그걸 받아들여야 했다는 사실, 올해 베를린 경쟁작품 가운데 무려 다섯편이 독일 배급사인 매치 팩토리가 배급을 맡은 영화였다는 점(그 가운데 세편이 수상), 어떤 국가의 영화계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건 영화제 기간에 동시에 열리는 필름마켓에 인더스트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건 간에 무리하게 슬롯을 배정해서라도 예술적으로 함량 미달의 영화들을 굳이 초청하는 것- 가령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한국영화 초청작 리스트를 볼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 등은 얼른 떠오르는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상의 언급을 실용적으로 바꿔 말하면 이렇다. 영화제(특히 인더스트리가 대거 참여하는 거대 영화제)를 방문해 볼 영화를 고를 때 실패의 위험을 줄이고 싶다면 가능한 한 영화제의 정치학을 고려하면서 특정 영화가 어떤 경로로 그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었을까를 상상해봐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영화를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지만 그 영화들이 항상 동일한 기준에 따라 심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베를린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