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인 ‘토끼 굴’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현실과 환상의 통로에서 빌려왔다. 존 카메론 미첼의 신작 <래빗 홀>은 익숙한 것에서 오는 기괴한 느낌,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들과 연결된 ‘기이한 낯섦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교외의 한적한 저택에 사는 40대의 부르주아 부부. 이들 부부는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있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보통 사람들>(1980),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2001) 그리고 이창동의 <밀양>(2007)까지, 그들이 간직한 슬픔은 이미 다수의 영화나 소설에서 보아왔던 소재와 동일하다. 아이를 잃었고, 그들은 비견할 곳 없이 슬프다. 하지만 카메론 미첼의 이번 이야기는 단숨에 아이를 잃은 부부에게 카메라를 갖다대면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좀 특별해 보인다.
집 앞의 도로에서 외아들을 끔찍한 교통사고로 잃은 지 8개월이 지난 어느 시점이다. 카메라는 바로 그 집의 일상을 비춘다. 과거를 회상하는 법에 있어 아내 베카(니콜 키드먼)와 남편 하위(아론 에크하트)는 각자 다른 방식을 택한다. 베카가 자꾸 과거의 기억에서 도피하려는 반면, 하위는 과거를 현실 속에 끌어들여 함께 머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현실을 대처하는 방식에서 둘은 꽤 비슷하다. 눈앞의 창틀을 굳게 내린 채 친구들의 조언은 날카로운 칼날로 되받아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의식적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서로만을 바라보며, 둘은 서로가 서로를 점점 옥죄어간다. 그러던 중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난 미래로 이끌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우연한 기회에 재회하게 된 한 청년이 ‘래빗 홀’이란 제목의 만화책을 소개해준 것. 이를 통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를 거치며 경험하였던 것처럼 베카 부부는 단지 현실에의 직시, 낯섦의 극복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란 걸 깨닫게 된다. 결국 그 굴의 끝자락에 찬란한 빛이 기다리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단 사실을 알기 위해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데이비드 린제이 에브에어리의 동명 원작 희곡은 2007년 퓰리처상의 드라마 부문 수상작이면서 동시에 토니상의 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등 브로드웨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작품이었다. 영화의 각색은 동일한 원작자의 손을 거친다. 다만 희곡과 다르게 영화에서 베카의 동생 이지(타미 브랜차드) 역이 축소되고, 사건의 열쇠를 쥔 제이슨(마일스 텔러)의 가정사도 생략한 채 표현된다. 그래서 영화 <래빗 홀>은 주인공 부부에게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진 채 진행된다. 전통 드라마물이라기보다 자연주의적 심리극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화는 두 주연배우의 성격이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을 통해 숨겨진 목적을 달성하는 데 공을 들인다. 남편은 래빗 홀로 빨려 들어가는 부인을 다만 지켜보는 것을 택하고, 부인은 결코 소리내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베카가 사고를 일으킨 젊은이의 곁으로 다가가는 이상한 행보를 보일 때마다, 내면적으로 남편과의 골은 더 깊어지지만 실질적 부딪힘이 오히려 줄어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이 서로 침묵으로 부딪힐 때의 고통이, 관객에게는 오히려 더 가중되어 느껴지리라 감독은 믿었던 것 같다.
작품의 공동제작자이기도 한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등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으로 거론되었다. 동일한 상처를 지닌 다른 이들에게는 연민을 보이지 못하면서 정작 적으로 보이는 이에게는 허용하는 관용, 이렇듯 모순되는 여인의 심리가 이 할리우드의 대형 여배우를 통해 그려진다. 한편 전작 <헤드윅>(2001)이나 <숏버스>(2006)에서처럼 존 카메론 미첼은 여전히 상처 입은 영혼들을 관조하는 데서 멈추기를 택한다. 그는 사건에 끼어드는 대신 성실하고 일관되게 침묵한다. 그렇지만 이 고요가 현실을 비춘 화면 속으로 강하게 배어들며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베카의 시선이 바라보는 하늘은 여전히 흐리지만 그녀가 내미는 손끝의 감촉은 따스하다. 이보다 더 큰 비극 속에서도 우리가 웃던 찰나는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끝까지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