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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2)
2002-01-16

도발적인 표현으로 성과 권력 관계 탐사한 프랑스 감독

쥐가 가져온 부르주아의 파멸

그럼 이제 오종의 영화들에 좀더 구체적이고 면밀하게 다가가 보기로 하자. 오종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시트콤>은 이미 몇몇 단편영화들에서 조금씩 선보였던 오종의 무정부주의적인 감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영화다. 비유해서 이야기하자면 <시트콤>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테오레마>(1968)를 개작한 영화라고 보면 된다. 두 영화 모두 어느 부르주아 가정에 닥친 위기를 그리는데, 그 둘 사이의 차이라면 파졸리니의 영화에서 부르주아 질서의 와해가 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듯한 한 청년의 방문으로 야기되었다면 오종의 영화에서는 얄궂게도 애완용 쥐 한 마리가 <테오레마>에서의 미지의 청년이 맡았던 역할을 대신한다는 점이다.

어느날 가장인 장이 집안에 쥐 한 마리를 가지고 오는데 바로 그때부터 집안 사람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아들인 니콜라가 벌떡 일어나 자기는 게이라고 갑작스런 커밍아웃을 하는가 하면 딸인 소피는 한밤중에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한다. 이후로 이 가정은 그룹섹스, 근친상간, 사도 마조히즘적인 별난 소동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난장판으로 변해버린다. 도대체 이 요란스런 소동을 통해 오종이 겨냥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변화에 끔찍이도 무심한, 너무도 덤덤한 부르주아적 심성이 아닐까 싶다. 집안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괴이한 일에 주부인 엘렌느가 너무나 민감하게 대응하는 데 반해 그녀의 남편인 장은 심적인 동요를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영화는 정체(停滯)된 부르주아적 심성 그 자체의 화신인 장이야말로 주적(主敵)이라고 공표한다. 그는 집안의 골칫거리인 쥐를 전자 레인지에 집어넣어 요리해먹고는 그 자신이 그만 커다란 쥐로 변하고 마는데, 집안 사람들이 합심해 그 무시무시한 쥐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기발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트콤>은 볼 만한 무정부주의적 블랙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지만 중반 이후로 전개도 지지부진해지고 요점도 모호해지면서 스스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프레데릭 보노가 말한 것처럼 이걸 두고 성적 도발에만 집중한 ‘기회주의적인’ 영화라고 규정짓는 건 다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여하튼 <시트콤>이 보여준 실패는 오종의 다음 작품인 <범죄자 연인들>의 그것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추럴 본 킬러>로 시작해서 현대판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로 이월하는 <범죄자 연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를 감행한 10대 연인 뤽과 알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살인, 강간, 공포 같은 고강도의 모티브들을 통과해 성적인 역학관계를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덧댄 내러티브도 서툴게 구축되었고 또 그만큼 관객으로부터 설득력도 얻기 힘들어 결국에는 다소 공허해보이기까지 한다.

<불타는 바다 위의 물방울>과 함께 재부상

<범죄자 연인들>은 그해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영화이지만 현재까지 오종이 만든 영화들 가운데 질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영화를 가지고 깊이 곤두박질쳤던 오종은 그러나 다음 작품인 <…물방울>을 들고 화려하게 재부상한다. 50살 먹은 매력적인 중년 남자 레오폴드와 20살의 핸섬한 청년 프란츠 사이에 애정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에 점차 금이 가다가 결국 프란츠의 자살에 의해 그 관계가 비극적으로 괴멸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는 <…물방울>은 철저히 파스빈더에 기대어서 만들어진 영화다. 오종은 파스빈더가 19살 때 쓴(그러나 한번도 무대에 올려진 적은 없는) 희곡을 스크린에 옮기면서 철저히 파스빈더적이기를 고수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덜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있다’는 식의 명제를 은근슬쩍 내비치면서 사랑의 불가능성, 함께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파스빈더적이지만 오종이 영화를 꾸며내는 방식도 지극히 파스빈더적이다. 레오폴드의 아파트라는 한정된 공간만을 고수하고 또 영화에 70년대적인 분위기를 은근히 불어넣으면서 영화는 파스빈더의 희곡에 충실함을 강조한다. 게다가 오종은 <폭스와 그의 친구들>(1974), <열 세 달인 어느 해>(1978)와 같은 파스빈더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끌고 들어오는가 하면 파스빈더가 즐겨 만들었던 것과 같은, 감금과 도주 불가능의 인상을 주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물방울>은 파스빈더를 완전히 ‘도용’한 영화가 아닌가? 꼭 그렇게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세계가 파스빈더적이기만 하다면 절망의 공기로 가득 찬 것이었을 텐데, 오종은 여기에 자기 특유의 재치있는 (블랙)유머를 가미해 그 세계를 순화해놓는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 가운데 하나인, 서로 사랑의 관계로 얽혀버린 네 남녀가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사랑을 신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영화 속 세상에 짧지만 흥미로운 쉼표를 찍어준다.

오종의 네 번째 장편영화 <모래 아래에서>는 혹 그가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래 아래에서>에는 이전까지 오종의 영화들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었던 자유분방함, 혹은 무정부주의적인 감수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도발적 표현 등이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상실을 안고 사는 한 중년 여인의 내면을 느리게 그리고 꼼꼼하게 파고든다.

영화는 중년의 부부인 장과 마리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해변의 별장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 장이 수영을 하겠다고 바다로 간 사이 마리는 모래밭에 누워 평화롭게 낮잠을 청한다. 잠에서 깬 마리는 주위에 남편이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든다. 그녀는 경찰에 남편을 찾아달라고 한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장면이 바뀌면 파리에서 마리가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 보인다. 마리가 남편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현재형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장이 돌아왔다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영화는 장이 실종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간 것이란 말인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 두 가지 가능성은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단지 자기 곁에는 항상 남편이 함께하고 있다고 마리가 여기고 있을 뿐인 것이다.

<모래 아래에서>는 이런 유의 스토리를 가진 영화가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슬기롭게 빠져나가는 현명한 심리영화다. 우선 한 여인의 내적인 고통을 탐사하고 있음에도 영화는 그녀에 대해 결코 감상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또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주인공인 마리가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을 추적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영화는 끝까지 왜 남편이 실종되었는지, 마리는 앞으로 또 어떻게 될 것인지, 하는 삶의 미스터리들을 해결하기는커녕 그냥 살려놓는 열린 태도를 견지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우리더러 마리와 함께 그녀의 내적 세계를 동행해보라고 권유한다.

심리적 뉘앙스가 풍부하고 그래서 감동적인 <모래 아래에서>는 지금까지 오종이 만든 영화들 가운데 단연코 최고작이라고 불릴 만한 영화다. <바다를 보라>에 실망해 오종의 다른 영화들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던 조너선 로젠봄은 <모래 아래에서>를 보고는 다소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이후로는 오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봤을 때 어쩌면 오종은 다음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아직 미결의 영화세계를 가진 시네아스트일지도 모른다.

홍성남 I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프랑수아 오종 (Francois Ozon) 필모그래피

1997년 <바다를 보라>(Regarde la mer, 중편)

1998년 <시트콤>(Sitcom)

1998년 <범죄자 연인들>(Lea Amants criminels)

1999년 <불타는 바위 위의 물방울>(Gouttes d'eau sur pierres br lantes)

2000년 <모래 아래에서>(Sous le sables)▶ 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1)

▶ 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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