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우리의 방식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려 하지마
김혜리 2011-12-16

신세계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에두아르도 칠리다(1924∼2002)의 <손>(1994. 종이·실·잉크). 주로 조각가로 활동했던 칠리다는 사물과 인체도 하나의 공간으로 여겼다. “손은 공간의 가장 풍요로운 표명(articulation)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몽글몽글한 선으로 그려진 손가락은 육체이자 무한을 품은 공간으로 보인다.

11월15일

브래드 피트의 ‘위엄’에 관한 어제의 수다에 이어 상업영화로서 <머니볼>의 괴이한 점을 적어두기로 한다. 부자 구단과 힘겹게 경쟁하는 가난한 구단이 중심에 서 있는 할리우드 스포츠영화라는 전제를 들으면, 누구나 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은 외인구단 선수들의 인간 승리와 의리, 그리고 이어지는 한스 짐머풍의 음악이 곁들여진 인생 대역전의 피날레를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머니볼>의 실상은 거리가 멀다. 이 영화의 갈등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야구라는 게임을 운영하는 방법론과 방법론 사이에서 빚어진다. 더구나 주인공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이 대변하는 입장은 전통적으로 비호감을 사는 관점이다. 빌리 빈은 통계를 신뢰하고, 반대자들은 다이아몬드에서 뼈가 굵은 야구인들의 직관과 경험을 옹호한다. 숫자 대 휴머니즘. 통상 대중영화는 이런 구도에서 영웅을 후자의 자리에 세우고 결론에 이르러 손까지 들어준다. 빌리 빈은 게다가 토론을 별로 믿지 않는,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감독이 자신의 구상과 엇나가는 용병술을 고집하자, 빌리 빈은 아예 감독이 선호하는 선수들을 트레이드해버린다. 다시 말해 <머니볼>은 인물끼리의 싸움이라기보다 얼굴 따위 없는 방침의 대결이며, 나아가서는 충돌하는 신념과 방침의 내용도 영화의 핵심과는 관계가 없다. 엄밀히 말해 작가 아론 소킨과 스티브 자일리언, 베넷 밀러 감독에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됐건) 하나의 방침을 사수하는 개인의 내면이다. 그러므로 ‘머니볼’ 이론의 실제적 허점이라든가 영화 이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올린 저조한 성적은 영화의 힘을 깎아먹지 못한다.

그래서 본인이 선택한 방침에 대한 주인공 빌리 빈의 자세는 무엇인가? 극중에서 그의 딸이 부른 <The Show>의 가사를 빌리자면 “난 몹시 두려워. 그러나 아무에게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아”(I’m so scared but I don’t show it)로 요약할 수 있겠다. “우리 방식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려고 하지마” 라고 빌리 빈이 오른팔 피터 브랜드(조나 힐)에게 건네는 한마디는, 주옥같은 대사가 자갈처럼 발에 차이는 이 영화에서도 유독 귀를 파고든다. 급기야 자신이 선택한 방법의 정당성을 남에게 인정받는 일에도 관심이 없음을 표명하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라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판을 무대로 삼지만, <머니볼>이 다루는 승부는 그처럼 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다. 작가들은 “돈의 좋은 점은 편견을 꺾고 패러다임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라는 요지의 대사를 끼워넣음으로써 <머니볼>에 보편적 교훈의 기운을 슬쩍 끼얹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은품에 불과하다. 재미있게도 공동각본가 아론 소킨의 전작 <소셜 네트워크>와 페이스북의 상관관계는 거의 정확하게 <머니볼>과 프로야구의 그것에 포개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셜 네트워크> : 페이스북=<머니볼> : 메이저리그”다. 뭐, 내항의 곱이 외항의 곱과 같을지까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두 영화 모두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감흥이다.

11월17일

사용해온 전화가 수명이 다해 몇달 전 스마트폰을 처음 갖게 됐다. 주말에 만난 아버지는 나의 새 전화를 보고 말했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게 이거로구나.” 별뜻 없이 하신 말씀이었을 텐데 왠지 쓸쓸하게 들렸다. 그 다음부터는 지하철에서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려다가도 멈칫하게 된다. 내가 탄 칸 어느 자리에선가 아버지와 같은 아저씨가, 아무리 둘러봐도 시선 하나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딱히 대상도 없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아서.

11월28일

고교 시절 동아리 활동이 활발했던 이웃 학교에 ‘사회문제연구반’이 있었는데 꽤나 떠들썩했는지 ‘사회문제조장반’으로 불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사회문제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연구하는 셈인데 사건 기자 틴틴은 말하자면 그런 부류의 히어로다. 에르제의 원작 만화 <땡땡의 모험>에 관한 내 추억은 유년기에 구독한 만화잡지에 번역 연재된 분량에 한정돼 있으므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맞이하는 나의 포즈에는 원작의 팬이 갖기 마련인 엄격함이나 애틋한 편애가 섞여 있지 않았다. 시사회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내 머리에 떠오른 최초의 생각은 한심하게도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피터 잭슨은 <틴틴>을 영화화하는 최선의 양식이 퍼포먼스 캡처라고 생각했고 스필버그는 스스로 연출해야 한다고 믿었을까? 이 양식이 에르제의 화풍이 가진 시원스런 색감과 간결한 선을 따를 수 없을뿐더러 실사영화를 넘어서는 박진감을 낼 수 없음은 처음부터 뻔했을 텐데. <틴틴> 전체를 통틀어 애니메이션적 아름다움으로 으뜸인 대목은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서두처럼 솔 바스풍으로 연출된 고전적 오프닝 크레딧이다(쓰고 보니 험담이다). 아니, 더 근본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연령 미상의 틴틴은 영화 히어로로서 위험할 만큼 무색무취한- 그래서 누구나 동일시하기 쉽지만- 캐릭터다. 그에게 스노위(<월레스와 그로밋>의 그로밋과 쌍벽을 이루는 명견)가 없어선 안되는 까닭이다. 영화 <틴틴>에서 틴틴이 직접 히트를 치는 대목은 그의 앞머리가 <죠스>의 패러디 개그에 이용되는 장면 정도다.

오해 없길. 물론 누가 뭐래도 이건 스필버그와 잭슨의 손을 거친 물건이다. 영화적 즐거움은 도처에 널려 있다. 많은 거울을 이용한 고난도의 교묘한 미장센과 소매치기의 날쌘 움직임을 결합한 눈이 휘둥그레지는 첫 시퀀스를 비롯해, 원경을 깨알같이 활용하는 코미디 연출과 투명한 오브제와 반사면의 황홀한 묘사, 유려한 매치컷들은 명불허전이다. 문제는 이 모든 영화 속 모험과 기술적 모험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하는 기분으로 지켜보게 된다는 점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를 보는 동안에도 실감했지만 <틴틴>은 반짝거리는 루브 골드버그 장치(단순한 작업을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 하도록 설계된 기계)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레이더스>를 <틴틴> 시리즈에 비유한 평을 보고 처음 에르제의 원작을 접하게 됐다고 알려졌는데, 관객으로서 연전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 이어 <틴틴>을 보고 난 소감은 이제 어드벤처 장르에서 스필버그가 더이상 보물을 발굴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가깝다. 오스카 수상 이후 <A.I.> <마이너리티 리포트> <터미널> <캐치 미 이프 유 캔> <우주전쟁> 등을 거치며 새 경지로 비약했던 스필버그는 고원기에 접어든 것일까? 곧 <워 호스>가 개봉하니 오래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

11월29일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을 보았다. <아리랑>의 약점은 대단히 나르시시스틱하다는 점이고, 장점은 그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촬영 중 배우에게 발생한 아찔한 사고의 경험, 영화적 동지라 믿었던 후배들의 ‘배신’, 더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창작의 벽에 부딪힌 감독의 독백과 자문자답이 <아리랑>의 본론이다. 김기덕 감독은 첫 번째 사고의 기억을 3년의 공백기를 초래한 제1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지켜볼수록 관객은 나머지 두 가지 이유가 감독을 더욱 결박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대개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인물이 말하는 경우보다 생략돼 있을 때가 더 아름다운데 <아리랑>은 자학과 원망의 언어가 폭포를 이룬다. 필모그래피에서 예외적인 동기와 방법론으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노릇일 수도 있지만, 그 말들이 감독의 전작이 쌓아올린 시적인 침묵의 아름다운 성채를 얼마간 훼손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인의 영화 속 인물들이 표출한 순수한 본능에도, 혹은 해탈에도 자신은 왜 도달하지 못하는지 한탄하는 김기덕 감독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나를 혼란에 빠뜨린 순간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상상의 복수를 극화한 시퀀스에 이어진 이 자폭의 장면에는 그 지점까지 영화가 쏟아낸 속내를 무마하려는, 혹은 스스로 수위를 조절하려는 듯한 계산의 기척을 별안간 영화 속에 불러들여 개운치 않은 이물감을 남겼기 때문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