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마르세유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된 필립 그랑드리외의 신작이 이후 몇몇 영화제와 특별상영회에서 소개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랑드리외는 영화 이외에 설치미술 및 비디오아트 영역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작가로, 한국에 그의 작업이 폭넓게 소개된 적은 없지만, 장편 데뷔작 <음지>(1999)를 비롯해 <새로운 삶>(2002), <호수>(2008) 등의 실험적 픽션이 전주영화제, 부산영화제 및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어 시네필들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다. 올해 발표한 작품은 그가 프랑스 영화비평가 니콜 브르네와 공동기획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20세기에 저항과 해방의 투쟁에 참여했던 저명한 혹은 미지의 시네아스트들에 관한-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의 첫 결과물로서, 1960~70년대 일본의 전투적 시네아스트 아다치 마사오에 대한 것이다.
일본영화 사상 가장 특이한 이력의 영화감독 가운데 하나인 아다치 마사오는, 니혼대학 재학 시절에 연출한 (다소 혼란스럽지만 대담무쌍한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중·단편 <밥그릇>(1961)과 <쇄음>(1963)으로 주목을 끌었고 이후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영화의 각본작업에 참여하는 한편, <섹스 게임>(1968)과 <여고생 게릴라>(1969)처럼 정치적 담론으로 무장한 핑크영화, 초현실주의적 감수성을 한껏 분출시킨 걸작 <은하계>(1967), 정치적 풍경영화 <약칭: 연쇄살인마>(1969) 등을 직접 연출해 언더그라운드의 총아로 떠올랐다. 하지만 와카마쓰와 공동연출한 팔레스타인의 게릴라 투사들에 대한 기록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1971)을 발표하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적군파 병사로 중동지역의 투쟁에 직접 뛰어들면서 일본영화계에서 사라지고 만다. 1997년 레바논에서 체포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 일본으로 강제송환당한 그는 2007년에 36년 만의 신작 <테러리스트>를 발표했고 최근엔 와카마쓰의 <캐터필러>(2010) 각본작업에도 참여했다.
1920년대 후반 쇠퇴해가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앙드레 브르통은 운동의 미래는 앞으로 도래할 이들의 순수성과 분노에 달려 있다고 외쳤다. 자신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항상 초현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아다치는 그러한 순수성과 분노를 줄곧 자신의 현재 속에 간직해온 인물이다. (그랑드리외-브르네가 기획한 시리즈의 전체 타이틀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는 <테러리스트>의 대사 가운데서 따온 것으로, 브르네에 따르면 이는 “영화의 전투적 기능과 시적 기능 사이의 분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공식”과도 같은 문장이다.) 그랑드리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아다치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대사관 주관으로 도쿄에서 그의 특별전이 열렸던 2008년이다. 이때 아다치는 <새로운 삶>을 보러 영화관에 왔었고 상영 뒤 이 영화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그랑드리외 편에 서서 영화를 옹호했다. 아다치가 자신과 같은 입장과 취향을 공유하는 영화적 동지라는 것을 알게 된 그랑드리외는 언젠가 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 아다치 마사오의 초상>이라는 시네마틱한 시정(詩情)과 우정으로 넘쳐나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화 이미지를 그 아래 강렬히 박동하는 생명이 깃든 얇은 피부처럼 동적인 동시에 촉각적인 것으로 만드는 그랑드리외의 솜씨는 예전 그대로다. 여기서 그 영화적 피부가 감싸고 있는 건, 추억이나 회한에 잠겨 과거를 돌이켜보는 왕년의 투사가 아니라 삶과 예술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 아래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인, 노쇠한 육체 안에 여전히 청년의 영혼을 간직한 한 예술가/테러리스트의 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