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영웅인가, 무엇이 선인가: <홈랜드> Homeland
출연 클레어 데인즈, 데미안 루이스, 모레나 배커린, 맨디 파틴킨 / 채널 <쇼타임> 줄거리를 단 몇 문장으로 압축해도 매력적일 것. 좋은 시나리오의 요건 중 하나다. <홈랜드>의 시나리오가 정확히 이 예에 해당한다. 미 해군 병장 브로디(데미안 루이스)가 이라크에 8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 극적으로 구출돼 금의환향한다. 그런데 그의 귀환과 동시에 “이라크에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국인 중 한명이 변절했다”는 첩보가 CIA에 입수된다. 이 남자는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10년 전 미국을 강타한 테러(9·11을 암시하는)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CIA 요원 캐리(클레어 데인즈)는 병적으로 이 미스터리에 집착한다.
지극히 미국적인, 그러나 매력적인 줄거리를 지닌 <홈랜드>는 이번 시즌 최고의 수확이다. 10월2일 첫 방영된 파일럿 에피소드는 지난 8년간 방송된 <쇼타임>의 모든 드라마를 제치고 가장 높은 시청률(108만명 시청)을 기록했다. 미국 언론은 “이번 시즌 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다”(<워싱턴 포스트>), “가을 시즌의 가장 흥미롭고, 긴장감 넘치는 수수께끼”(<엔터테인먼트 위클리>)라며 상찬을 쏟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홈랜드>의 매력은 간단 명료한 최초의 의문(그 남자는 아군인가 적인가)과는 반대로 복잡 다단하게 해석 가능한 상황들에 있다. 이 드라마는 혐의를 받고 있는 미군을 악으로, 배신자를 가려내려는 CIA 요원을 선으로 재단할 수 없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품고 있다. 일례로 <홈랜드>는 미심쩍은 브로디의 행동을 보여주는 동시에 알 카에다에 당한 고문의 트라우마와 가장으로서의 8년 공백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도 함께 비춘다. 캐리는 예리한 감각을 지닌 수사관이지만 브로디의 집에 불법으로 감시카메라를 설치한 뒤 은밀한 부부 관계까지 빼놓지 않고 감시하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 누가 진짜 반역자인지 밝혀진다 해도, 시청자는 그를 쉽게 적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간단치 않은 게 현재 미국의 정치 상황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휘말려든 개인의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스트 9·11의 미국을 다양한 관점으로 심도있게 조명하는 <홈랜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년 에미상 시상식의 강력한 우승 후보다.
응징에서 치유로
<24>에서 <홈랜드>까지, 9·11 이후 미국 드라마가 그린 자화상
2001년 9월11일로부터 벌써 10년이 흘렀다. 9·11 테러는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흐름마저 크게 바꿔놓았다. 9·11과 테러리즘을 직접적으로 방송의 모토로 삼거나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져나왔고 밀리터리, 첩보 드라마가 크게 인기를 끌며 보안에 대해 높아진 미국인들의 관심을 입증했다.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가 바로 9·11 테러 두달 뒤에 첫 방영을 시작한 폭스의 <24>다. 대테러기관 요원 잭 바우어가 24시간 안에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를 막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테러 용의자가 대부분 중동 사람인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의자를 취조하는 폭력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던 작품이다. <24>가 테러 방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제리코>는 테러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에 주목한다. 미국 전역이 핵테러를 당하고, 작은 마을 제리코만이 가까스로 이 테러에서 살아남는다. 낙진의 여파와 자원의 고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으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소한 감동을 줬다. 한편 <루비콘>은 책상머리에서 테러를 논하는 전략가들의 이야기다. 한 나라의 외교적, 군사적 행보를 좌지우지하는 암호 해독가들의 삶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배틀스타 갤럭티카> <로스트> <플래시 포워드> 등의 인기 SF물도 9·11 이후의 정서를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인간 세계에 잠입한 인조로봇 사일런을 통해 일상 속 테러의 위협을, <로스트>와 <플래시 포워드>는 참사를 겪은 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올해의 <홈랜드>가 있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24>의 작가였던 하워드 고든과 알렉스 간자다. 9·11 이후 10년, 한때는 테러리즘을 응징하기에 바빴던 미국 드라마는 어느덧 국민들의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보듬을 정도로 성숙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Person of Interest
출연 짐 카비젤, 마이클 에머슨, 타라지 P. 헨슨 / 채널 <CBS> 제작진의 이름값만으로도 챙겨보게 되는 드라마가 있다. 올가을 시즌에는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와 뒤에 소개할 <테라 노바>가 그런 작품이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이자 <다크 나이트>의 각본가인 조너선 놀란이 스토리를 맡고 J. J. 에이브럼스가 제작자로 나선 드라마다. 미래의 잠재적인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요 미션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비밀리에 테러 방지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전국의 모든 CCTV와 전화, 인터넷망 등을 감시해 국민들의 삶을 관찰하고 그중에서 테러범을 가려내는 것이 프로그램의 주요 기능이다. 개발자인 핀치(마이클 에머슨)는 프로그램이 평범한 사람들의 잠재적인 범죄 또한 포착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만 기계가 지목한 사람이 가해자인지 희생자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핀치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범죄 여부를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을 지목한다. 전직 CIA 요원인 리즈(짐 카비젤)가 그다.
미래의 범죄를 미리 막는다는 점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첨단 감시 장비가 등장한다는 점에선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떠오른다. 하지만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고급 문명의 폐해를 지적하며 결말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두 영화와 달리 해결사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임무를 다했음에도 범죄에 휘말려든 사람이 신경쓰여 남몰래 그들의 삶까지 돌보는 리즈와, 그가 위험해질 때마다 현장에 직접 투입해 도움을 주는 핀치 캐릭터의 매력이 상당하다. 각본가인 놀란의 경력에 빗대어 말하자면,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다크 나이트>의 귀엽고 친근한 버전이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