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랜턴: 반지의 선택>이 그렇게 잘 풀릴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원작의 구식 펄프 SF스러운 매력을 만화책 팬이 아닌 요새 관객이 제대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처절하게 망해버린 것일까. 이보다 나를 더 우울하게 한 소식은 데이비드 E. 켈리가 제작한 <원더우먼> 시리즈가 물 건너 간 것이다. 이 역시 시작부터 불안했다. 팬들은 유출된 파일럿 각본을 싫어했고 캐스팅과 의상에 수상쩍어했다. 왜 원더우먼이 대기업 회장이어야 하고 바지를 입어야 하는 거지? DC를 옹호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다니 슬픈 일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DC 코믹스 슈퍼히어로 중 할리우드에서 온전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게 배트맨밖에 없는 건 사실이 아닌가.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자. DC의 슈퍼히어로들이 할리우드의 최근 ‘현대화’ 작업에서 계속 실패하고 있는 건 오히려 그들의 클래식한 개성이 지금 할리우드에서 당연시하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다룬다면 신선한 광맥이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멀리 갈 것도 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배트맨> 시리즈를 보라. 이 시리즈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니냔 말이다. 놀란의 배트맨처럼 할리우드에서 이질적인 슈퍼히어로가 있을까. 그렇다면 한번 켈리식으로 장난친 현대판 <원더우먼> 대신 원작 세계관에 충실하며 그에 심각한 버전의 <원더우먼>을 생각해보라. 어이없게도 나는 이 버전의 모델을 정직하기 짝이 없는 슈퍼히어로영화였던 마블 원작 영화 <퍼스트 어벤져>에서 찾는다. 성조기 옷을 입은 캡틴 아메리카가 할 수 있다면 역시 성조기 옷을 입은 원더우먼이라고 못할 건 어디 있는가. DC 옹호를 위해 글을 쓰면서 마블 영화로 끝맺어야 하다니 타이밍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