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비스> Rabies
나봇 파푸샤도, 아하론 케샬레스 | 이스라엘 | 2010년 | 90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사냥꾼으로부터 여동생을 구해내려는 오빠의 노력은 좀더 복잡한 우연의 연쇄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문제는 누가 이 숲속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인물들은 단순히 상대의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뿐이지만 그 결과는 매번 죽음이다. 그중 쉬르라는 인물은 특정한 싸움상대가 아닌 살인의 풍경에 반응한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숲을 빠져나왔으면서도 그녀는 넋을 잃고 자살하듯 달려오는 차에 몸을 내맡긴다. 이때쯤 그녀가 아디와 함께 저 멀리서 굽이친 길을 돌아 접근하는 경찰차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기이한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그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시작된 악몽에서 우연과 필연의 비율은 몇 대 몇일까. 치밀한 리듬감이 서늘함을 자아내는 영화다.
<앰피비어스 3D> Amphibious 3D
브라이언 유즈나 | 네덜란드 | 2010년 | 86분 | 특별전 쓰나미로 부모를 잃은 타말과 아리스는 바다 한가운데의 고기잡이 일당에 팔려와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리스가 일당의 몽둥이에 맞아 죽자 분노에 찬 타말은 주술사에게 받은 목걸이로 주문을 걸어 바닷속 괴물을 불러낸다. 여전히 딸을 잃은 슬픔에 차 있는 해양생물학자 스카일라는 타말을 구하겠다고 나서지만 괴물의 힘을 빌린 타말의 복수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다. 괴수영화와 호러영화를 오가는 이 영화의 무의식에는 쓰나미와 같은 지역적인 트라우마가 잠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딸을 잃은 어머니라는 이유로 스카일라가 타말의 고통을 껴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재난의 바깥에 서 있는 이들과 타말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만큼이나 영화의 결말 또한 소름끼친다.
<시체스 별장의 공포> Atrocious
페르난도 바레다 | 멕시코, 스페인 | 2011년 | 73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블레어 윗치>에서 <파라노말 액티비티>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들에 익숙하다면 이 영화도 무리없이 즐길 수 있다. 이런 영화들에서 긴장감을 낳는 건 카메라와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 사이의 밀착감이다. 카메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쫓기고 있는 이의 운동감이 그대로 실리고 그 운동감이 영화의 호흡을 장악한다. 이 영화는 거기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 지표가 사라진 공간이다. 부모님을 따라 시체스 별장에서 지루한 휴가를 보내게 된 크리스티안과 줄리는 별장 뒤 숲에 얽힌 죽은 소녀의 전설을 조사하겠다고 나선다. 미로같이 얽힌 정원에 처음 들어선 남매는 각자 카메라를 한대씩 들고 헤어지는데 한동안 화면에는 말없이 비슷한 숲길만 계속 비춘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누군지마저 알 수 없다. 이 순간이 주는 당혹감만으로도 한밤중에 숲속에서 벌어질 잔혹극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동안> Child’s Eye
옥사이드 팡, 대니 팡 | 홍콩 | 2010년 | 97분 | 특별전 팡 형제의 3D 호러 <동안>은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시작한다. 타이의 휴양지를 다시 찾은 오래된 연인은 멀어지는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도 모른 척한다. 한편 타이 반정부시위로 공항이 폐쇄되고, 커플과 일행은 공항으로 향하던 중 시내의 한 허름한 호텔에 임시로 머무르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서서히 호러 본색을 드러낸다. 일행에게 접근해오는 귀신의 정체는 호텔 꼭대기에 사는 주인장이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인다. 나중에 밝혀지는 주인 부부의 사연에서는 뻔한 결말을 피해가려 한 노력이 엿보이지만 익숙한 구슬픔과 한스러움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무간도에서 양조위의 아역을 맡았던 여문락, 두기봉 영화에서 자주 만났던 임가동이 등장하는 가운데 귀신을 보는 강아지의 존재감이 단연 돋보인다. 허공에서 달려드는 손, 갑자기 날아오르는 의자, 벽에서 반인반견이 뛰어내리는 장면은 3D에 걸맞은 공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광란의 타이어> Rubber
쿠엔틴 듀피욱스 | 프랑스 | 2010년 | 84분 | 부천 초이스 장편 부르르. 그가 몸을 떨기 시작한다. 파팍! 유리병이 산산조각나고, 사람의 머리통도 순식간에 날아간다.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황량한 사막, 고무 타이어 한개가 비틀거리며 굴러간다.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고 나무 등걸에서는 잠을 청한다. 이름은 로버트. 그의 특별한 염력은 점점 더 많은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이유없이! <광란의 타이어>는 이 낯선 외양의 연쇄살인범이 만드는 궤적을 따라 호러, 웨스턴, 스릴러, 좀비물의 관습을 관통하며 유유히 굴러간다. 무생물이 발산하는 괴력으로부터 스필버그의 <결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단편 분량의 아이디어를 길게 늘린 듯한 감이 있지만 특유의 중첩된 구성과 유머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 로드무비가 향하는 최종 목적지를 떠올릴 때, 영화는 감독이 던지는 야심찬 출사표가 된다. 부르르. 혹은 파팍! ‘이유없음’의 장전이다.
<카붐> Kaboom
그렉 아라키 | 프랑스, 미국 | 2010년 | 86분 | 스트레인지 오마주 그렉 아라키란 이름과 퀴어시네마란 틀을 걷어내고 그냥 즐겨도 무방할 영화다. 스미스는 막 대학생이 된 만 열아홉살의 게이로 매번 같은 꿈을 꾼다. 처음 보는 여자들이 가리키는 복도 끝의 방에서 빨간 쓰레기통을 발견하는 꿈이다. 섹스 판타지처럼 시작한 영화는 꿈의 해석을 거쳐 황당한 음모론의 SF로 끝난다. 꿈의 해석은 스미스가 아버지와 아버지가 예정해놓은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풀이되는데 정작 둘은 만나보지도 못한다. 결국 꿈은 그냥 꿈일 뿐이다. 굳이 의미부여를 하자면 스텔라의 말처럼 “뇌가 하루 일과 끝에 처리하는 쓰레기” 정도나 될까. 다만 등장인물들의 조악하지만 꽤 유효한 초능력과 허술하지만 핵심은 다 갖춘 음모론은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심각한 척하는 슈퍼히어로 드라마들을 가벼운 농담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발휘한다.
<더 북> The Book: They Came from Inner Space
리차드 와이스 | 미국 | 2010년 | 92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더 북>은 B급 SF물의 조악한 톤을 살린 스릴러영화다.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의상과 분장, 그리고 만화를 의식한 소품과 제스처들이 두드러진다. 초창기 테크니컬러영화의 색감과 과격한 명암대비, 현란한 편집 등으로 눈이 어지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각적인 피로와 과장된 연기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영화다. 2484년, 평화로운 도시 엘리시아의 은밀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이들의 비밀스런 의식을 통해서 황금 도시의 실체가 밝혀진다. 200년 전, 미지의 생명체들은 SF작가 알렉시스의 정체성을 빼앗아 <더 북>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다. <더 북>은 지식이 자유를 구속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꼬집고 있다. 유토피아적인 가치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충돌하는 고전적인 주제에 닿기 위해, 다소 먼 길을 돌아 나오는 느낌도 있다.
<포> Four
에카지트 타이랏, 콩키아트 콤시리, 파왓 파낭카시리, 추키아트 사퀴라쿨 | 타이 | 2010년 | 126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인류를 몰살할 수 있는 바이러스 칩,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달콤살벌한 선물가게, 원혼과 벌이는 긴박한 신체훼손 게임, 할아버지의 시체와 함께하는 좌충우돌 동거일기. 이 기묘한 아이디어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포>는 네편의 도시괴담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사이코패스 스릴러의 주인공 같은 인물도 등장하고, 누아르적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이야기도 있다. 코미디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호러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드라마적인 요소에 있다. <포>의 이야기들은 시끌벅적한 소동 속에서 예외없이 인과응보의 원칙을 구현하며, 가족간의 사랑과 용서를 논한다. 그리고 그 테마들을 중심으로 미스터리한 사건의 전말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편이다. 따라서 관객은 흠칫 놀라고 낄낄대는 가운데 ‘교훈’적인 결말을 목격하게 된다. 맥은 좀 풀리더라도 일단은 귀담아들어보자. 특히, 영화를 보러가는 관객이라면 첫 단편의 메시지에 주목하자.
<프라울> Prowl
패트릭 시버센 | 미국 | 2010년 | 84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엠버와 친구들은 화물트럭을 얻어 탄다. 그러나 트럭이 도착한 곳은 뱀파이어들이 우글거리는 도살장이다. 여행지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는 것은 호러영화의 익숙한 공식이다. 그러나 엠버에게 있어 여정이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영화 초반, 엠버는 환영과 악몽에 시달리고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번민한다. <프라울>의 특이점은 이 영화가 진지한 성장물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각성을 향하든 성장의 과정에는 불안과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엠버의 달리는 육체는 그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각성의 과정에서 호러와 성장물은 조우한다.
<인사이트 밀: 7일간의 데스 게임> Incite Mill
나카타 히데오 | 일본 | 2010년 | 107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고액의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열 사람이 모여들고, 이해하기 힘든 룰에 따라 한명씩 죽어나간다. 영화는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생존게임형 스릴러라는 점에서 <큐브> <익스페리먼트> <쏘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굳이 이들 영화나 요네자와 호노부의 원작 소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인사이트 밀: 7일간의 데스 게임>은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디테일이 분산되어 갈등은 겉돌고 미스터리는 방향을 잃는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지점들이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가학적인 관음현상을 아우르며, 영화는 일본 사회추리소설들이 추구하는 문제의식을 이어받는다. 인물들이 실험에 참가하게 된 나름의 동기는 모두 현대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반영한다. 타인의 죽음을 유희하는 잔혹한 현실 속에서 내면의 힘을 내세우는 우직함도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야세 하루카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