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들, <블랙 스완>에 대해 입을 열다
“혜민이가 힐을 신고 오면 어떻게 하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은 좀 걱정이 되나 보다. <지젤> 연습 때문에 치장할 시간이 없었다는 건데,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황혜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와!’ <돈키호테> 연습을 끝내고 인터뷰 장소인 국립발레단으로 서둘러 온 황혜민을 보자 김지영이 탄성을 지른다. 황혜민도 김지영처럼 부츠를 신었다. ‘편하게 입고 오시라’는 게 양쪽에 전달한 주문의 전부였지만,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위아래 의상까지 맞춰 입었다. 그리고 이어진 백조들의 수다. 국내 개봉하기도 전에 해외에서 일찌감치 <블랙 스완>을 봤다는 두 무용수는 백조와 흑조의 역할을 번갈아 맡으며 입을 풀었다.
#<블랙 스완>에 대한 발레리나들의 반응은 극단으로 나뉜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질리언 머피는 <LA타임스>에서 “영리하게 계획된, 창의적인 영화”라고 치켜세운 반면 영국로열발레단의 타마라 로호는 <가디언>에서 “모든 발레영화의 클리셰를 따르는 매우 게으른 영화”라고 혹평했다. 한쪽은 신선한 자극이라는데 한쪽은 불쾌한 모독이란다. 한국의 발레리나들은 ‘이상한 나라의 니나’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김지영) 발레영화 하면 일단 반응이 ‘유치해!’ 잖아. <블랙 스완>은 핑크빛 발레리나가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서 좋았어. 발레에서 공포를 끌어내는 것도 특이하고. 무서운 영화를 잘 못 보는 편이라 눈 가리고 봤지만. (황혜민) 난 <열정의 무대>(2001) 같은 줄 알았어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서 발레를 하게 된 무용수가 결국 꿈을 이룬다, 뭐 그런 익숙한 줄거리 있잖아요. 그런데 발레리나 등에서 털이 쑥 뽑혀져 나오는 것 보곤…. (웃음)
(김지영) 섹슈얼한 장면들도 괜찮더라. 여성의 동성애를 표현한 것도 흥미롭고. 무용수 중에 레즈비언이 많지 않잖아. (황혜민) 게이들은 많죠.
(김지영) 유치하다, 유치하다 하면서도 발레영화는 결국 다 보는 것 같아. 전엔 유명한 무용수들이 나온 영화들이 많았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랑 줄리 켄트랑 나온 게 뭐였지? (황혜민) <지젤>(1987). (김지영) 알레산드라 페리도 나왔지. 더 오래전에는 <터닝포인트>(1977)가 있고.
(황혜민) <스텝 업>은 영국로열발레단을 언급해서 본 영화인데 거의 학생 수준의 발레예요. 하지만 대개는 영화에서 무용수가 훨씬 멋져 보여요. 공연은 한번에 다 보여줘야 하는데 영화는 여러 번 찍어서 최고를 보여주니까. (김지영) <열정의 무대>는 욕하면서 봤지만, 이선 스티펠이 온갖 트릭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어떻게 연출했을까 궁금했지.
(황혜민) <블랙 스완>은 일단 관심이 내털리 포트먼이잖아요.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 뭐 그런 마음이었죠. 그런데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상체는 발레리나처럼 딱 잡혔던데요. 등도 안 굽었고, 어깨도 쭉 펴고 있고. (김지영) 냉정하게 말하면, ‘저 정도 실력으로 뉴욕시티발레단에 들어가겠어?’인데. (웃음) 폴 드 브라(port de bras)는 의외로 괜찮았어.
(황혜민) 내털리 포트먼의 몸과 대역 무용수였던 사라 레인을 워낙 잘 섞어놔서 잘한다, 못한다 뭐 그렇게 평가는 못할 것 같아요. (김지영) 사라 레인? (황혜민) 얼마 전에 뉴욕 갔을 때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라 레인이 <Theme and Variations> 리허설하는 걸 봤어요. 같이 간 무용수가 내털리 포트먼 대역이었다고 알려줘서 알게 됐는데, 작지만 정말 예쁘고 잘해요. 바(bar) 연습할 때 잠깐 보이는 동양인 있잖아요. 그 친구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입양된 친구래요.
(김지영) 무용수들의 습관도 잘 잡았지. 니나가 지하철에서 누군가를 힐끗하는 장면 있잖아.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가 백조를 찾을 때 나오는 음악을 기막히게 편집했던데. 무용수들이 실제로 항상 동료 무용수들을 의식하면서 살잖아. (황혜민) 머리 풀고 다녀도 쉽게 알아보잖아요. 걸음걸이만 봐도 아니까.
(김지영) 설 연휴 때 발레단 후배가 맞선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다리가 제일 두꺼워. (웃음)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니까 태가 달라. (황혜민) 겨울에 부츠 못 신는 발레리나들 많죠. (김지영) 발레리나들은 종아리에 다들 알 하나씩 키우니까. 내털리 포트먼은 어려서 발레 배운 게 도움이 됐을 거야. 넌 언제부터 했어?
(황혜민) 초등학교 4학년? 그전에 리듬체조를 취미로 했어요. 그러다 전학 갔는데, 리듬체조부가 없어서 몸 쓰는 걸 찾다가 발레를 알게 된 거죠. (김지영) 난 발레 배우기 전에 태권도 배웠어. <권법소년>이라는 만화 알아? 딸기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서 태권도장에 갔는데 글쎄 내가 태극 1장을 못 외우는 거야. 그래서 남들 다 따는 노란 띠도 못 땄다니까. 발레는 친구 따라 학원에 간 건데. 마룻바닥이라 발에 가시 박히는데도 아프다고 안 하고 의외로 잘 따라했지. 잘하는 게 없는 찌질이가 학원 선생님한테 칭찬을 들었으니. 그때부터 발레에 목숨 걸었지. 처음에 토슈즈 신고 발 까졌을 때 그 상처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조금 까졌는데 엄마한테는 찢어졌다고 말하고.
(황혜민) 그땐 너무 좋으니까 아파도 아프지 않죠. (김지영) 무한한 엔도르핀만큼 좋은 진통제가 어딨어.
#발레는 철저하게 도약을 지향한다. 프앵트 기법(pointe technique, 발끝으로 춤추는 기술)이 아니었다면, 16세기 한낱 사교춤에 불과했던 발레가 낭만주의의 마지막 물결을 타고 19세기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격상될 순 없었을 것이다. 분홍신의 등장은 그러나 치열한 경쟁을 동반한다. 발레 관객의 관심 또한 누가 더 높이 뛰는가, 로 바뀐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니나의 불안은 발레리나의 운명이기도 하다.
(황혜민) 발레하면 중학교부터 입시잖아요. 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엔 그게 더 심해요. (김지영) 엄마들까지 가세한다면서. 근데 애들 싸우는 거랑 우리들이 시샘하는 거랑 따지고 보면 똑같지. (웃음) 겉으로 보이냐, 안 보이냐의 차이니까.
(황혜민) 학교 때 생각하면 왕따 많았죠.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전 묻혀 다니긴 했는데. (김지영) 왕따 시키던 애가 왕따 당하기도 하고. 돌고 돌아. 누구 한명이 왕이진 않지. (황혜민)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게 좀 갑갑할 때가 있죠. 몸 쓰는 직업이라 대화하는 법도 서툰데. 몸도 써야 하는 것처럼 말도 해야 느는 거잖아요.
(김지영) 특히 더 그렇겠다. (황혜민씨는 동료 무용수인 엄재용씨와 연인 사이다) 근데 두 사람은 안 싸워? (황혜민)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주거든요. 남자가 착해요. 힘든 날은 아무 말 않고 밥 먹어도 되니까 편하고. 무대에선 알아서 받아주니까 편하고. (김지영) 하늘이 내린 커플이네. 여태껏 내 파트너들은 여자친구가 있거나 유부남이거나 게이였는데. (웃음)
(황혜민) 발레가 아니구나 싶었던 적은 없어요? 난 중학교 3학년 때쯤 포기하고 싶었거든요. (김지영) 그땐 사춘기니까 다 그렇지 뭐.
(황혜민) 중학교 1학년 때 워싱턴에 있는 키로프발레단 아카데미로 유학갔는데 처음엔 외국 간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도착한 다음날부터 집에 가고 싶어서 많이 울었죠. (김지영) 러시아 바가노바에 간 게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나도 2년 지나니까 슬럼프가 오더라.
(황혜민) 향수병이야 시간이 해결해주지만 사춘기가 오면서 몸이 좀 변하잖아요. 중학생 전에는 성장 전이라서 다리가 되게 길었는데, 점점 살도 찌고. 그때 찍었던 사진은 다시 보기도 싫어요.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엄마 덕분이죠. 딸이 넷이고, 아들이 하나인데 저한테 많은 걸 쏟으셨으니까. 니나 엄마가 이해가 가요. (김지영) 우리 엄마는 학원 다닐 적에 데리러 온 적도 없어. 그때가 언니, 오빠 입시 뒷바라지하실 때라 귀찮았던 거지. 막내니까 내놓고 키운 것도 있고. 발레, 발레 하는데 저러다 말겠지 싶었을 테고. 선생님이 학원비 좀 가져오라고 할 때도 있었다니까. 중학교 2학년 때 개인발표회 하는데도 ‘지영아, 그거 꼭 보러 가야 하니?’ 했으니까. 그때마다 엉엉 울었지. 난 니나 엄마가 이해가 안 가. 그렇게 극성인 엄마가 공연날 딸을 막아서잖아.
(황혜민) 모성애 아닐까요. (김지영) 엄마가 아니라서 모르겠네. 니나 엄마가 좀 아이 같지. 케이크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 보면.
(황혜민) 전, 입시 때 쓴 ‘먹기 공책’이 생각나요. 중학교 가기 전부터 공책에다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적었는데, 군것질 실컷 하고서 안 적을 때도 많았죠. (김지영) 예전에 남자친구가 ‘니네들은 다 정신병자야!’ 그런 적도 있어. 노이로제 하나씩은 갖고 있으니까. 진짜 말랐어, 말랐어, 누가 안쓰러워하면 너무 좋아하잖아. 반대로 얼굴 좋아졌다고 하면 짜증내고. 그게 미친 거지. (웃음)
(황혜민) 전 말랐다는 말을 칭찬처럼 들을 정도는 아니에요. 발레단에서 제가 가장 말랐으니까. (웃음) 그런데 클래스 한번 안 하면 2∼3kg 찌고, 자신만 느끼는 거지만 그게 굉장히 불편하잖아요. (김지영) 엉덩이 살 붙고, 팔뚝에 살 붙고, 허리에 살 붙고, 목에 살 붙고. 거울 안 봐도 알지. (황혜민) 속도 더부룩하고. 그래서 살 빼야 한다고 막 그랬더니 선배가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아우, 저 정신병자!’
(김지영) 20년 넘게 거울 보고 살았는데 어쩌겠어. 니나는 흰색 아니면 핑크색 입고 나오잖아. 니나 보고 있으면 카를라 프라치가 떠올라. 항상 연습복이 흰색 아니면 핑크색이야. 예순이 다 됐는데도 여전히 바 하고. 발레에 미친 거지. (황혜민) 언니는 어때요? 난 색깔별로 연습복이 있어도 흰색, 핑크색은 안 입는데. (김지영) 나도 안 입어. 굳이 나 발레리나예요, 할 필요 있냐. 아마추어처럼.
#<분홍신>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발레단은 ‘환상적인 정신병원’이라고. <블랙 스완>의 발레단도 다르지 않다. 단장과 무용수들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엄격한 위계가 작동하고, 무용수들에겐 사망선고라는 진단이 내려지기도 한다. 발레리나에게 무대는 스타가 될 수 있는 발판인 동시에 곧바로 용도폐기될 수 있는 낭떠러지기도 하다. 두 얼굴을 가진 무대의 앞과 뒤.
(황혜민) 공연 때 징크스는 없어요? 전 공연 전에 무심코 오른쪽 토슈즈를 먼저 신으면 벗고 다시 바꿔 신어요. 습관처럼 다시 왼쪽부터 신죠. (김지영) 공연 때 화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 양반인 척하는 건데 그래도 못 참고 터트릴 때도 있어. <호두까기 인형> 때 조용한 음악에 맞춰서 파드되를 시작하는 부분이 있는데 누가 ‘잘하세요’ 그러는거야. 좋은 뜻으로 작게 말한 건데 계속 신경이 쓰이더라.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건드린 거니까. ‘잘하세요’, ‘잘하세요’, 계속 머리 속에 남는 거야. 아다지오 끝나고 나서 무대 뒤에 가서 도대체 누가 그런 거냐고 폭발했지.
(황혜민) 그건 이해하죠. 사실 더한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어떤 무용수는 무대 사이드에서 큐 사인 주려고 서 있는 무대감독 때문에 시선이 흐트러져 턴 동작을 실수했다면서 소리를 막 지른 적도 있어요. 자신이 무대에 설 때는 아무도 거기에 서 있지 말라면서. (웃음) 오디션 때 니나랑 비슷하죠. (김지영)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너무 욱하는 성격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공식적으론, 발레가 굉장한 매너의 예술이잖아. (웃음) 성질은 성질이고, 매너는 매너니까. 발레가 또 계급사회다 보니 위아래가 심할 정도로 깍듯하지. 배꼽인사를 안 할 뿐이지 외국도 마찬가지고.
(황혜민) 발레 수업의 시작이 레베랑스니까요. 우리는 은퇴 공연하면 박수 쳐주는 게 전부인데. 외국에선 은퇴하는 발레리나의 토슈즈 앞에 꽃을 한 송이씩 놔준대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좀 받고 싶던데. (웃음) (김지영) 학교에서 클래스할 때도 제일 잘하는 애가 가운데 자리에 서잖아. 발레단도 마찬가지고. 주역들 아니면 군무 중에서도 경력이 가장 많은 무용수가 가운데 서고. 외국에선 바 연습 하는데 젊은 애가 자리잡고 있으면 선배들이 딱 그 자리 가서 서는 경우도 있어. ‘나 여기서 해도 되니?’ 그럼 무조건 ‘소리, 플리스’ 해야지.
(황혜민) 저 발레단 처음 들어갔을 때 잘 모르고 앞에 선 적 있어요. 그러다 옆의 선배가 쿡쿡 찔러서 나왔죠. 그런데 후배들 입장에선 저만큼 하면 저 자리에 설 수 있구나 자극도 돼요. (김지영) 나도 그랬지. 이제는 가운데 설 수 있으니까 안 서는 거고. 난 좀 왔다 갔다 하는 편이야. (웃음) 근데 <블랙 스완>에서 단장하고 니나하고 로맨스를 더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냐? 뱅상 카셀이 너무 멋있던데. 네덜란드에 있을 때 토마스 같은 캐릭터를 본 적이 있긴 해.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분이었지. (웃음) 토마스처럼 대놓고 그러진 않았지만, 의외의 무용수에게 큰 역할을 주기도 하고. 주역 데뷔가 언제였어?
(황혜민) 2001년에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이었어요.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졸업 전이었는데 운 좋게 섰죠. 콩쿠르 준비만 하다가 전막 무대에 섰는데, 2막 시작하는 장면에서 손을 정말 덜덜 떨었어요. 파트너가 얘가 왜 이렇게 떨어, 그랬을 정도로.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경을 헤맨 수준이라서. (김지영) 난 1997년에 전막 공연은 아니었지만 <파키타> 주역을 한 적 있어. 국립발레단에 최연소 입단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라 각오가 남달랐지. 언니들 제치고 선 자리인데 못하면 무시당하겠구나 싶었지. 다행히 큰 실수 없이 치렀고, 몇달 뒤 <노틀담의 꼽추> 주역으로 데뷔했지. 익숙한 클래식이 아니라서 힘들었어. 게다가 19살이잖아. 동작만 생각하지. 감정 표현은 어색하고. 수진이 언니 연기하는 거 보면서 알게 됐지. 발레도 연기구나.
(황혜민) 예전에 <돈키호테> 파드되를 한 적 있는데 피쉬 다이브 하다 파트너가 저를 놓쳤어요. 다행히 떨어지진 않았는데 대롱대롱 매달린 거죠. (김지영) 니나가 실수하는 장면도 그 완벽하다는 백조 장면에서잖아. 니나 실수 장면 보면서 어땠어? 난 쟤 뭐하니, 발딱 일어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자한테 몸을 맡겨야지, 그랬다니까.
# <지젤>이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아니라 왜 <백조의 호수>였을까. 주역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으로부터 들었을 때, 줄리 켄트는 단박에 <백조의 호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 ‘백조인간’ 스토리는 한명의 무용수가 백조와 흑조를 번갈아 연기하는, 1인2역의 예외적인 구조 아닌가. 욕망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기에 더없는 모티브였을 것이다.
(김지영) <백조의 호수>는 첫 등장이 가장 부담돼.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줘야 하니까. 물 위를 걷는다, 그게 말이 되니. 말이 안되니까 어려운 건데. 단순 동작이지만 조금만 요란해도 안되니까 굉장한 스트레스지. (황혜민) 난 외려 백조가 저한텐 좀 편해요. 흑조는 캐릭터를 더 만들어서 보여줘야 하니까 연습을 훨씬 많이 해야 하고.
(김지영) 오, 거의 니난데! 너도 흰색 옷 입는 거 아니야? (황혜민) (웃음) 니나가 그러는 거 이해가 가요.
(김지영) 그래도 흑조가 더 돋보였다는 이야길 들은 적도 있지 않아? (황혜민) 있죠. 부족한 걸 인정받았을 때 기분은 더 좋죠.
(김지영) 난 다들 흑조가 더 잘 어울린다고 하니까. 한국에서 처음 <백조의 호수> 할 때는 백조 연습을 더 많이 했어. 흑조 테크닉은 됐는데 백조 폴 드 브라가 잘 안 맞는다고 선생님들도 백조 연습을 훨씬 많이 시켰지. 그렇게 무대에 섰더니 백조가 더 어울린다는 말을 하더라. (황혜민) 그게 언제였어요? (김지영) 2001년. 음, 음, 음, 그러니까 벌써 10년 전이네.
(황혜민) 1인2역이 상례이긴 해도 원래는 백조, 흑조 다른 무용수가 따로 맡았을 텐데. (김지영) 사람들이 참 못됐잖아. 시험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테스트해보고 싶은 거지. 양면성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나, 처음 시도는 일종의 테스트였을 텐데 그게 유행이 돼서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어.
(황혜민) 무용수한테 그런 테스트가 필요하긴 해요. 스무살에 처음 <백조의 호수> 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덤비는 꼴이잖아요. 그냥 힘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니까. (김지영) 전에도 감정연기를 했겠지만, 지금은 좀더 빠져들지. 스무살이 간장종지였다면 이젠 밥그릇 정도.
(황혜민) 옛날에는 한 박자, 한 박자, 뭐 이렇게 가는 거라면 이제는 그 안에서 밀고 당길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지영) <백조의 호수>는 퓨어 클래식이라 동작을 바꿀 순 없잖아. 다른 레퍼터리에 비하면 많이 막혀 있는 건데. 이젠 그 안에서 뭔가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니까 그게 더 재밌는 것 아닌가 싶어. 분장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블랙 스완>의 흑조는 악마성을 강조했잖아. 그런데 흑조는 섹시할 수도 있고, 카리스마가 있을 수도 있고, 무용수마다 자기 해석에 따라 연기하는 것 같아. 백조와 달리 흑조는 항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그런 점에서 백조보다 흑조가 더 많은 감정과 연기를 필요로 해. 화려한 테크닉에 가려서 잘 안 보일 수 있지만, 왕자가 키스하려고 할 때 흑조가 손을 어떻게 빼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확 다르잖아.
(황혜민) 백조와 흑조가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하나잖아요. (김지영) 왕자 눈에 흑조가 백조처럼 보여야 하니까 흑조가 백조의 이미지도 갖고 있어야지. 공연 전에 니나처럼 환각을 보는 경우도 있어?
(황혜민) 환각까진 아니고. <지젤>은 제일 좋아해서 그런지 좀더 빠져요. 미치는 장면에서 조명 불빛이 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김지영) <지젤>은 좀 심한 것 같긴 해. 나도 <지젤> 준비하는데, 샤워를 하면서 혼자서 모노드라마를 한다니까.
(황혜민) 자신이 관리하기 나름이긴 한데, 난 정말 오래 춤추고 싶어요. (김지영) 난 무대 서는 게 괴롭고 너무 힘들거든. 압박감을 견디기가 힘드니까. 이걸 보는 사람들은 즐기는데 난 왜 못 즐기나 싶지. 이렇게 말해놓고 벽에 X칠 할 때까지 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네. (황혜민) 그런 생각 하면서도 커튼이 딱 올라가면 잊어버리잖아요.
(김지영) 난 <블랙 스완>의 결말이 되게 우울해. 죽음의 헐떡거림을 맛보고서야 그 완벽함을 맛보는 거니까. 니나가 니진스키처럼 정신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스무살에 <블랙 스완>을 봤으면 니나였겠지만. (황혜민) 베쓰한테 더 끌리죠? 걱정되죠. 나도 그렇게 되면. (김지영) 미치진 않겠지만, 남의 일 같지 않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