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탕웨이)에게 지난 7년은 공백의 시간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교도소에 들어간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이나 기대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죽음이 그녀를 세상으로 불러낸다. 하지만 뜻밖의 휴가는 그녀에게 오히려 잔인한 시간이다. 간만에 찾은 동네는 쓸쓸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우왕좌왕이다.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쯤,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누군가에게 쫓기던 도중 애나에게 차비를 빌린 훈(현빈)이다. 그는 애나의 상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오늘 하루를 즐기자고 제안한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리메이크했지만, <만추>는 오히려 김태용 감독이 전작에서 일관되게 담아왔던 소통의 기적에 관한 영화로 보인다.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조금은 보듬게 되는 충동적인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시선 1318> 중 한 작품이었던 <달리는 차은>과 가장 가까운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까지 포함해 소통의 기적을 결론에 두었던 전작과 달리 <만추>는 기적에 이르는 과정에 집중한다. 영화는 피멍이 든 애나의 얼굴로 시작해 그녀의 엷은 미소로 끝난다. 카메라가 탕웨이의 얼굴을 집요하게 따라붙는데, 영화가 그만큼 미소를 간절히 원하는 듯 보인다.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 두 남녀의 애절하고 격정적인 사랑을 그렸던 이만희 감독의 원작, 그리고 이를 리메이크했던 김수용 감독의 <만추>보다 애나와 훈이 보내는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시간을 담는 영화의 호흡에 활기를 불어넣는 건 탕웨이의 연기다. 언뜻 아무런 표정도 없지만, 그 안에서 엿보이는 기묘한 움직임이 매혹적이다. 배우의 얼굴을 통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