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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운명, 어쩌면 믿음… 혹은 환상

우디 앨런의 <환상의 그대>와 그 커플들

뉴욕을 떠난 우디 앨런이 런던에서 만든 근작들(<매치 포인트> <스쿠프> <카산드라 드림>)은 남녀 관계의 일상보다는 장르적 사건의 전개에 좀더 치중한 영화들이었다. 이후 그가 바르셀로나에서 찍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이상하게 얽힌 특유의 남녀 관계가 다시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여행 중에 벌어진 ‘사건’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여기에 뉴욕의 반복되는 일상 같은 건 없다. 그런 다음 앨런은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와 마치 앨런의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괴짜 노인과 아리따운 소녀의 블랙코미디 <왓 에버 웍스>를 만들었다. 누가 봐도 우디 앨런다운 영화라고 부를 만하지만, 냉소적이고 신경증적으로 꼬여버린 앨런식 남녀 관계의 일상에 대한 성찰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환상의 그대>는 간만에 뉴욕을 떠나기 전의 앨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하지만 런던을 배경으로, 영국식 악센트의 대사로 펼쳐지는 이 영화의 일상에 대한 밀착은 그가 뉴욕에서 만든 작품들의 그것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다. 예전 영화들에서 뉴욕이라는 장소성에 대한 관찰은 그곳을 사는 남녀 관계에 대한 묘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어디를 걷고, 어디를 구경하고, 어디에서 마주치는지, 혹은 거리의 어떤 풍경 안에 있는지 등의 관계의 단계를 알려주거나 서로의 취향을 탐색하는 순간이거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기회 등등이었다. 이 이야기들은 뉴욕의 일상에서만 가능하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결혼은 곧 공간의 문제

그러나 <환상의 그대>에서 런던은 그저 어느 도시일 뿐 하다못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서 사랑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풍광도 되지 못한다. <환상의 그대>는 굳이 런더너(Londoner)가 아니어도 성립되는 이야기며 도시와 대화하지 않는 우디 앨런의 영화는 어쩐지 서운하다. 남녀 관계에 다시 세밀하게 매진하는 이 영화가 반갑고 예쁘기는 하지만 70대 후반에 접어든 우디 앨런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좀 이상한 지점에서 이 영화의 장소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건 밖(도시)이 아닌 안(집)의 장소성이다. 말하자면 우디 앨런의 ‘결혼영화’의 장소성, 결혼의 내부, 혹은 그것의 형식, 쉽게 말해 아파트 내부에서의 부부의 움직임으로 자꾸 생각이 옮겨간다. 부부의 집. 그것은 호텔도 아니고 스튜디오도 아니다. 결혼은 곧 공간의 문제라는 걸 앨런은 줄곧 우리에게 보여주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환상의 그대>에서 샐리(나오미 왓츠)와 로이(조시 브롤린) 부부가 분주하게 오가는 집의 구조를 보면서 결혼의 일상을 다룬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들, 특히 <한나와 그 자매들>과 <부부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껏 우리는 우디 앨런 영화에서 부부가 집 안으로 들어온 다음부터, 카메라가 대체로 컷을 나누지 않고 이들의 행로를 길게 따라가는 걸 종종 보아왔다. 그런데 한 프레임 안에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그들 각각은 미로처럼 구부러진 통로와 문이 열린 방들 사이를 불안증 환자처럼 끊임없이 오가며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컷을 나누지 않는 게 아니라 나눌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만약 카메라가 한곳에 멈춰 있다면 카메라는 금세 인물이 빠져나간 텅 빈 공간만 찍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한방에 있더라도 한 사람은 기둥이나 문 뒤에 가려져 있어서 진정한 투숏은 드물며, 간혹 투숏으로 잡히는 순간은 그들이 다툴 때가 더 많았다. 천장을 뜯고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한없이 열리고 이어진 구조지만, 더없이 은밀하고 폐쇄적일 수 있는, 벽들로 둘러싸인 공간들. 우디 앨런이 부부의 일상을 찍는 방식은 집 내부의 동선을 철저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때 부부의 집은 하나의 공간인 동시에, 결코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부부의 집이지만, 가정이라고 부르기는 어딘지 어색하다.

이를테면 <한나와 그 자매들>로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이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줄기 중 하나는 한나(미아 패로)의 두 번째 남편(첫 남편은 우디 앨런이 연기한다) 엘리엇(마이클 케인)이 한나의 여동생 리(바버라 허시)를 몰래 좋아하는 이야기다. 엘리엇의 마음이 드러나는 때는 온 가족이 집에 모여 파티를 즐기는 날이다.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 틈을 오가며 그의 끈적한 시선은 처제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눈치채는 사람은 없으며, 마침내 처제를 따라 들어간 방에서 그는 아내 몰래, 얼굴을 붉힌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모임이 있던 날, 처제는 집 안의 어느 방에서 관계의 끝을 선언한다. 한나와 엘리엇은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나가겠지만, 이미 여기에는 둘이 나눌 수 없는 비밀이 들어서버렸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유달리 깊고 입체적으로 보이는 아파트 내부의 심도는 부부가 서로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 권태, 죄의식, 표정을 영화적으로 숨겨두거나 가장하는 데 적합하다. 상대에게가 아닌, 자신에게만 정직해질 수 있는 공간, 끝까지 비밀일 수는 없지만 비밀처럼 느껴지게 하는 공간이 그의 부부 이야기를 지탱한다. 그 어떤 관객도 훤히 뚫린 원룸에서 촬영된 부부의 일상을 구경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부부일기>는 어떤가. 묘하게 다큐멘터리 형식을 끌고 와서 부부들이 카메라 앞에서 대답을 하거나 때때로 부부들이 자신의 일상에 입회한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 영화는 많은 장면이 핸드헬드로 찍혔다. 이를테면 결혼한 지 20년이 된 잭(시드니 폴락)과 샐리(주디 데이비스)가 절친한 부부 게이브(우디 앨런)와 주디(미아 패로)의 집을 방문해서 별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힐 때, 혹은 이후 게이브와 주디가 공허한 마음을 감추고 집 안에서 사사로운 대화를 할 때, 카메라는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정신없이 움직인다. 책장, 방문, 싱크대 등으로 구획된 집 내부를 요란하게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심리나 표정에 밀착하기 위해서는 핸드헬드 이외의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 방식은 인물들의 움직임을 카메라가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한 사람만 찍을 수밖에 없거나 인물들이 재빠르게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대면하는 것만큼이나 부부 관계의 씁쓸한 단면을 포착해낸다. 한 프레임에 모일 수 없는 위치의 두 사람 사이를 카메라가 컷없이 휙휙 오갈 때, 마치 부부는 영화적으로 억지로 연결된 관계처럼 무척 불안정한 상태로 보이는 것이다.

숏-역숏의 환영

<환상의 그대> 역시 부부의 집은 따스함이나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기존의 앨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이들 부부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한 장면이 물론 여기에도 있다. 샐리는 짝사랑하는 직장상사가 자신의 친구와 사랑에 빠진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상태로 집에 들어온다. 의사를 관두고 아내가 돈을 벌 동안 소설을 쓰며 맞은편 건물에 사는 젊은 여인 디아(프리다 핀토)에게 빠져든 로이는 출판사로부터 거절의 전화를 받는다. 부부 각자에게 최악의 순간인 셈인데, 때마침 샐리의 엄마 헬레나(제마 존스)가 이들의 집을 방문한다. 헬레나는 남편 알피(앤서니 홉킨스)가 40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젊음을 찾아 떠나고 나자 점쟁이의 말을 맹신하며 상실감을 달래고, 이날 역시 점쟁이의 예견을 들려주러 딸의 집을 찾았다. 로이는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헬레나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집 렌트비를 헬레나가 대주고 있어서 함부로 굴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인물들이 각자의 최악의 처지에 대한 분을 서재와 거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때로는 상대를 쫓아가며 풀 때, 이 좁은 집에서 그들의 안식을 위한 분리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원인도 해결책도 없이 이 집을 뱅뱅 도는 말다툼의 동선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로이가 헬레나의 유리컵을 빼앗아 벽에 던져 부순 뒤, 집을 나가자 상황이 종료된다. 잔인한 진실. 이 싸움의 유일한 해결책은 누구든 하나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환상의 그대>를 보며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들을 상기해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시퀀스, 즉 까미유(브리지트 바르도)와 뽈 자벨(미셸 피콜리) 부부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잠시 이주한 아파트(그들은 “호텔보다 괜찮은(!) 아파트”라고 말한다) 내부에서 벌어지는 둘 사이의 광경이 생각났다.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는 부부가 각각 말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나오고 욕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거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다툼을 하다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들을 계속 따라가며 아주 길게 지속되는 이 시퀀스는 부부에게만 가능한 기이한 게임처럼 보인다. 앨런의 영화에서처럼 일상적이지 않고 작위적이지만, 부부의 위태하고 건조해진 관계가 집 내부를 돌아다니는 그들의 희화화된, 혹은 너무 슬픈 동선을 통해 상징화되는 것 같다는 인상 때문에 내가 이 영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겹치지 않는다. 이들의 질문과 대답도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둘은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카메라는 유려하게 이들을 따라가는데, 이들이 한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는 둘 중 하나가 벌거벗은 공간, 문을 활짝 열어둔 욕실에서 아무런 긴장없이 있을 때다. 부부가 서로 어긋나는 리듬과 방향으로 작은 아파트 내부를 맴돌 때, 마치 이들의 식은 마음, 조금 남은 성적 긴장, 아직 메마르지 않은 기대감 같은 것이 닫혔다가 열리길 반복하며 그 자체로 숨을 쉬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시퀀스의 후반에 둘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앉는다. 남편은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거듭 묻고 아내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고다르는 이 숏을 나누지 않고 양편을 수평으로 오가며 찍었다. 달리 말해 이들의 시선이 서로 오가는 거의 유일한 이 순간을 투숏도 아니고, 숏과 역숏으로도 찍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이 숏을 다시 보다가 우디 앨런의 부부들이 대화를 나눌 때도 숏과 역숏을 본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할리우드식 전형성에 저항하는 고다르고, 앨런이니까, 라고 간단히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득 부부의 대화를 숏-역숏으로 찍는 게 실은 얼마나 코믹한 일인가, 아니, 얼마나 거짓말을 하는 행위인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부부일기>에서 주디가 남편과의 관계가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걸 느끼는 시점에 이런 말을 던졌던 것 같다. “서로 떨어진 부분들이 반드시 전체를 이루는 건 아니야.” 그녀가 무슨 맥락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이 말이 적어도 앨런의 영화에서 부부 사이에 숏-역숏이 즐겨 사용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설명처럼 느껴진다. 숏-역숏의 환영, 그러니까 서로를 들여다보는 완벽한 응시, 완결을 향하는 소통, 두 마음의 통합, 앨런의 부부들에게 그런 건 환영이다. 고다르가 수평 트래킹으로 만나지 못하고 평행선을 긋는 부부의 대화를 오갔다면 앨런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마주치지 않고 말하게 한다. 혹은 한 프레임 안에 있어도 어딘지 불안정한 자세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으로 말을 던지게 한다. 이때 이들의 투숏은 ‘나란히’와도, ‘마주보고’와도 거리가 멀다. 하스미 시게이코는 오즈 야스지로의 <맥추>를 평하면서 노부부가 마주보며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대상으로 시선을 옮길 때 동작의 동시성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지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는 그것을 “그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이 동시에 담는 몸짓”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나란한 시선의 숭고함이 올 때까지의 세월을 앨런의 부부들은 버텨내지 못해서 차라리 냉소하고 만다.

자리바꾸기, 짝 바꾸기

그렇다면 부부의 집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결국 벗어나고 마는 앨런의 인물들은 어떻게 되는가. <환상의 그대>에서 로이는 앞 건물의 창가에서 붉은색 옷을 입고 기타를 치는 아름다운 여인을 훔쳐보는 낙으로 산다. 그런데 의아한 건 그의 행동이 관음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관음증은 내가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한에서 커가는 환상과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일단 그는 창문으로 그녀에게 바로 말을 걸고, 심지어 자신이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밝히며 관계를 발전시켜나간다. 게다가 짓궂게도 앨런은 장면의 배치를 통해 이 환상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를테면 로이가 창문으로 이 묘령의 여인을 처음 본 장면 다음에 그가 아내 샐리와 처음 만나 사랑을 속삭이던 플래시백이 바로 오거나, 그가 창가의 여인이 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걸 넋을 잃고 훔쳐본 다음에는 장모 헬레나가 딸 샐리에게 “점쟁이가 말하길 네 아빠가 아무리 새 여자와 사랑에 빠져도 결국 나만큼 사랑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더라”고 말하는 장면을 붙이는 식이다. 환상에 현재의 반복일 뿐인 미래를 개입시켜서 환상의 매혹적인 차별성을 조금이라도 누르는 것이다.

그래도 앨런의 인물들은 짝을 바꾼다. 그의 영화에서 그 자리 바꾸기가 중요하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짝 바꾸기가 줄곧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운 자리로의 이동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한나의 둘째 여동생은 한나의 전남편과 결혼을 하고 한나의 남편은 한나의 막내 여동생과의 사랑을 꿈꾸고, <부부일기>의 주디는 가장 친한 친구 샐리와 한때 사랑에 빠졌던 남자와 재혼한다. <환상의 그대>에서도 로이는 아내와 이혼하고 결국 앞 건물의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집으로 이사를 온다. 그런데 그 순간 앨런은 약간은 섬뜩하고 낯선 장면을 쑥 밀어넣는데, 자신이 줄곧 쳐다보던 창문의 바로 그 자리에 선 로이가 얼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건너편 창문 안에서 샐리가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을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까. 짝 바꾸기의 그 소심한 이동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니라, 자신이 이전까지 존재했던 그 자리가 이제는 텅 비어 있음을 목격하는 것일 뿐이라고, 결국 짝 바꾸기란 자신의 텅 빈 자리의 목록만 추가하는 것이라고 앨런은 말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짝 바꾸기란 전체가, 다시 말해 구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안에서 개인들만 소란스럽게 이동하는 교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부부일기>에서 남편과의 결혼기간 동안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던 샐리는 남편과의 별거 뒤 만난 새 애인과 섹스를 한다. 그녀는 그러나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충분히 느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를테면 성관계에서 남편은 고슴도치라면 이 남자는 부드러운 여우다. 그럼 친구 A는 여우일 것이고, B는 고슴도치, C는 여우….” 결국 짝 바꾸기란, 혹은 결혼이란 그래봤자 고슴도치에서 여우로, 혹은 그 반대로의 이행, 아니면 교환이라는 얘기다.

그의 영화에서 굳이 환상을 포용해야 한다면

아무튼 자신의 텅 빈 자리를 목격하거나 별반 새로운 구원의 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앨런의 인물들은 그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죄의식과 불안과 허무에 시달리는데, 그 끝에는 죽음에의 공포가 있을 것이다.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앨런이 직접 연기하는 남자는 건강 염려증자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유대인임에도 가톨릭과 힌두교를 기웃거린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니체도, 프로이트도, 소크라테스도 주지 않은 답을 시인들에게서 찾는다. “결국 사랑이 답인지 모른다.” 그래서 앨런의 인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짝으로 이행하거나, 낯 두껍게도 <환상의 그대>의 알피처럼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하거나, 창작에 대한 집착으로 그 공포를 최대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로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에 집착을 보이는 앨런의 남자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생물학적인 분신을 낳고 싶어 하지 않는다. 2세에 대한 지나친 거부와 두려움은 달리 말해 그에 대한 욕망의 징후일 것이다. 앨런이 부부를 등장시키는 영화들에 어김없이 피임, 불임에 대한 트러블이 나오고 아이들이 없거나 있어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어쨌든 그들 모두는 현실 안에서 발버둥친다.

그런데 <환상의 그대>에 이르면 현실에서의 버둥거림을 한순간 뛰어넘어버리는 운명이라는 화두가 전면화된다. 처음에는 그냥 웃음 코드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영화 역시 그 화두를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점쟁이의 말에 희망을 걸고 환생을 믿어버리는 헬레나, 그리고 결국 여러 인물 중 오직 그녀의 기대만을 채워주는 영화의 선심은 이제 죽음을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 나이가 된 앨런의 심정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하는 것일까. 이 영화의 내레이션도 그런 맥락에서 신경이 쓰인다. 이를테면 <한나와 그 자매들>이나 <부부일기>의 내레이션은 등장인물 자신의 것이거나, 얼굴은 나오지 않으나 영화에 존재하는 자의 것이었고, 그때 인물들의 일상과 사건에 밀착된 내레이션은 상황과 마음의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환상의 그대>에서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영화 밖에서 인물들의 내면과 상황을 내려다보며 고정하던 내레이션이 “가끔은 환상이 신경안정제보다 나을 때가 있다”며 끝맺을 때, 여기에는 삶 혹은 관계에 대한 헛소리도, 분노도, 불평과 독설도 모두 제거되어 있다. 말하자면 앨런의 영화를 살아 있게 하던 요소들, 현실의 부조리한 시간들 대신 마치 평화로운 내세의 시간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굴해지고 비열해져도 어떻게든 현실에서 자리잡기 위해 애쓰며 헬레나의 믿음에 독설을 풀어놓던 샐리와 로이가 영화에서 사라지는 순간의 얼굴 클로즈업은 이 영화에서 가장 어둡고 이상한 장면들이다.

카메라는 성공을 코앞에 두고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찰나 알 수 없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두렵게 얼어붙는 이들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바라본다. 마치 그렇게 아우성치던 현실의 시간이 갑자기 정지한 것 같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점쟁이의 예견들, 혹은 하늘의 뜻의 승리에 굴복한 표정처럼 보인다. 그 표정들의 낯설게 생생한 결 때문인지 이후 헬레나에게만 주어진 해피엔딩은 귀엽긴 하지만, 좀 섬뜩한 면도 있다. 진지하게 전생에 대해 논하는 노년의 새로운 커플을 둘러싼 지나치게 밝은 기운이 앨런이 창조한 비관적인 신경증자들의 기운만큼이나 병적으로 느껴져서일까. 만약 앨런의 영화에서 굳이 환상을 포용해야 한다면 내겐 “다시 살고 또다시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라며 운명의 필연을 믿는 노년 커플의 환상보다 “일년 뒤”라는 자막이 나온 뒤, 누가 봐도 언젠가 깨질 게 분명해 보이는 커플이 결혼해서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다고 믿는, 이미 냉소가 내재된 환상을 보여주는 앨런이 더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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