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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조금씩 변한다 ‘이기적인’ 배우로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0-11-05

<돌이킬 수 없는> 김태우

원래 큰 키가 더 커 보인다. 좀 수척해진 듯도 싶다. 예의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대신 남성적인 분위기가 앞선다. 오늘같이 긴 헤어스타일에 가죽 블루종 차림도 사뭇 생소하다. 부러 작정하고 고친 것 같진 않다. 명백한 변화의 지점을 찾지 못하자, 김태우가 말한다. “안경을 벗었다. 라섹 수술한 지 6개월쯤 됐다. 안경 없는 맨 얼굴이 주는 변화가 큰 것 같다.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다들 ‘좋아졌다’라고 하더라.” 변한 건 사실 외형뿐이 아니다. 딸을 잃고 슬픔과 분노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돌이킬 수 없는>의 ‘노충식’은 그전까지 배우 김태우와 그를 가르는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이번 영화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이 영화가 원래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당선작이었다. 처음 받은 시나리오는 동네 사람들 비중이 지금보다 더 컸다. 사람들이 사건을 둘러싸고 자기들 잇속을 차리는 속물 근성에 초점을 둔 내용이었다. 난 좀더 인물에 초점을 두길 원해서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5~6개월 지나고 다시 연락이 왔다. 그동안 감독도 정해지고 시나리오도 수정됐다.

-다시 받은 시나리오는 맘에 들던가. =처음엔 지금의 노충식보다 이정진이 연기하는 유세진이 하고 싶었다. 노충식은 누가 봐도 기승전결이 뚜렷한 전형적인 캐릭터인 반면, 범인으로 의심받는 유세진은 겁은 나지만 배우 입장에서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캐릭터였다. 한편으론 노충식 같은 전형적인 인물을 또 다른 깊이로 표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더라.

-단순히 유괴사건에 초점을 둔 영화가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인 편견을 바라본다. 시각이 참신하고, 결과적으로 작품도 잘 나왔다. =사실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는 지금과는 좀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친해질 수 있었던 두 사람이 사회의 편견으로 결국 파국을 맞는, 그런 영화였으면 싶었다.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마을에서 정작 원래 뿌리내렸던 사람들이 소외되는, 그래서 유세진을 만나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의 노충식은 뭔가 사연이 있어서 혼자 아이를 기르지만 전원주택의 잘사는 사람들과 비슷한 계층처럼 수정됐다. 감독님과 내 생각이 다르니, 결정이 필요했다. 내가 이 작품을 안 하든지 아니면 감독님 색깔에 맞추든지. 이 경우 후자를 택한 거다.

-노충식은 어떤 인물인가. =선이 분명한 캐릭터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라는 상황은 이미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내가 몰입만 하면 되지 따로 준비할 게 필요없는 역할이었다. 난 표현을 연구하고 싶었다. 아이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 오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충격에 대한 반응은 지진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영상을 살펴보니 너무 놀라 모두 호흡을 하지 못하더라. 슬픔은 그 다음에 오는 감정이다. 바로 눈물을 보여주기보다 놀라서 입을 벌린 그런 표정에 신경을 썼다.

-연구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내린다면. =골프를 예로 들어보자. 연습은 많이 하지만 실제 칠 때 폼 교정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치지는 않는다. 연습해서 근육이 익숙해지면 실제 상황에서 그냥 나오는 것과 같다. 막상 현장에선 입을 벌린다든지 그런 생각할 틈이 없다. 연습을 해놓고도 어떤 표정으로 연기하게 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다.

-촬영 과정에서 애를 먹은 점은 없었나. =지난해 8월부터 양평에서 석달 반 촬영했다. 상황이 정확하니 연기는 편했다. 오히려 마음이 힘든 촬영이었다. 두 장면을 제외하곤 모두 힘든 장면이었다. 생각해보라. 자식이 없어지고, 어느 날 시체로 만나고, 부검하러 가고, 그것에 분개해서 복수를 하려 하는 장면들이다. 어지간한 상황이어야지 말이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전날 아무리 촬영이 힘들어도 아침에 매니저랑 만나면 인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데, 이번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장 찍을 상황을 생각하니 말이 안 나오는 거다.

-대개 충격을 받고도 ‘삭이는’ 역할을 주로 했다면 노충식은 다르다. 명백히 감정을 분출하는 역할이다. 김태우란 배우의 새로운 면이다. =내 지론은 영화 볼 때, ‘남성식 일병’이면 그냥 거기 빠져서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보고 나와서 ‘김태우 전작과 비슷한 연기’라고 평가해도 상관없다. 굳이 그 반응을 고쳐보고자 ‘이번엔 깡패하자’ 하는 생각은 없다. 난 <얼굴없는 미녀>도 <키친>도 홍상수 감독 영화도 모두 다르게 연기했다. 보는 분들이 ‘매번 김태우는 비슷해’라고 하는 데는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고, 내 잘못도 분명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KBS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늘 대학원생, 의사, 변호사 연기만 하다가 드라마 <덕이>에서 거지왕초하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악한 모습도 보여주고, 이젠 노충식 같은 역할도 하지 않나. 60~70살까지 연기하는 동안 이렇게 조금씩 변하면 된다. 조급한 마음은 없다.

-초기작인 <공동경비구역 JSA>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그간의 연기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을 텐데. =지지난해 말, 예술의전당에서 <갈매기> 공연을 하면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중앙대 연극과 출신인데, 유학가려다 방송국 시험 봐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오랜만에 다시 연극무대에 서게 된 거다. 근데 첫날 첫 공연에서 자살해서 떨어져 죽는 연기를 하다가 맨바닥에 그냥 떨어졌다. 팔에 금이 갔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공연 보던 선배들은 ‘저 자식 연기 진짜 잘한다’고 생각했다더라. (웃음) 당시에 소속사가 바뀌어서 회식 갔다가 발목을 접질러 다치고, 얼마 안 있어 <키친> 제작보고회 때는 무대 뒤에서 대기하다 1.2m 높이 위에서 그냥 내려오다 무릎을 다쳤다. 자잘한 부상 때문에 쉬게 되고 여유가 생기니, 그간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됐다. 어떤 작품은, 내가 저 나이에 어떻게 캐릭터를 끌고 갔을까 잘했다 싶은 것도 있는 반면, 남들도 칭찬해주고 나도 만족했던 작품인데 못 보겠다 싶은 것도 있더라.

-배우 김태우가 꼽는 그 워스트가 뭔가. =너무 많다. 홍상수 영화를 예로 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같은 작품이다. 비교를 해보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훨씬 잘했더라. 내 모습에서 그게 보이더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할 때는 더 진지하게, 인물로만 들어가려고 하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여유가 보이더라.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그게 좋게 말하면 능숙하다는 건데, 결국 오지랖이 넓은 거다. 김태우는 현장에서 사람 좋고, 배려하는 걸로 유명하지만, 이젠 조금 이기적일 필요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한 작품이 <돌이킬 수 없는>이다.

-마음을 먹으니 못되게 되던가. =일부러 못되게 구는 건 아니고. (웃음) 내 배려가 오히려 좀 건방진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감독이랑 싸워보자 이런 게 아니고 대립이 생길 때, 아니다 싶을 때 내 주장을 좀더 확실하게 했다. 배려도 좋지만, 이젠 조금 더 에너지를 내 역할쪽으로 몰아가는 거다. 나 편한 대로 말이다. 오늘 사진 촬영 때도, 전 같으면 ‘저 못해서 어쩌죠’라고 오버했다면 지금은 사진 기자분이 이상하다 싶으면 얘기하시겠지. 난 내 느낌대로 하자 하는 거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건 아니다. 스탭들은 ‘달라진 거 없는데. 연기도 그대로인데’ 이럴 거다. (웃음)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통해 꾸미지 않은 자연스런 연기스타일에 익숙해졌다. 그런 작업 환경 역시 연기에 변화를 줬을 것 같다. =딱히 홍 감독님 영화의 영향이라고 설명할 순 없다. 그보다 전에는 대본을 들고 달달달 외우며 촬영 장면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시나리오에 없는 장면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게 연륜이고 나이일 수도 포지션에서 오는 여유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 열 테이크 가서 한 장면 건지는 그 과정이 이젠 초조하지 않다. 결국 그 장면 하나를 위해 하는 거다. 내가 신인이라면 현장 상황을 다 신경 쓰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에 대한 여유는 생겼다.

-30대를 지나고 이제 40대다. 자연적인 나이듦도 배우를 변하게 하는 큰 요소 아닌가. =어느 날 보니 현장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더라. 이젠 감독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경우가 많다. 임재영 조명기사와 <접속> <버스, 정류장> <공동경비구역 JSA> <얼굴없는 미녀>에 이어서 이번이 다섯 번째 작품이었는데, 현장 가면 어른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더라. <접속> 때만 해도 완전 아기였는데 이젠 선배가 됐다. 그러니 말 하나라도 더 조심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항상 신인감독과의 작업을 선호해왔다. =난 신인인지 아닌지보다 시나리오 자체를 보고 좋으면 한다. 한번 작업한 감독들이 다음에 더 써줄 듯한데 흥행이 안돼서 그런지 다들 다음 작품을 거의 안 들어가신다. (웃음) 오죽하면 이쪽에서 ‘신인감독들 상 타려면 김태우랑 해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해외영화제는 (송)강호 형 정도 빼면 남부럽지 않게 다녔다. (웃음) <기담>이나 <리턴> 같은 작품은 명백히 흥행이 될 장르영화였다. <리턴>만 해도 대박은 아니지만 흥행은 생각했던 거였고. 그런데 자꾸 영화제만 가고, 작품 평만 좋은 거다. 그러니 관객도 김태우가 하면 작품은 좋은데 재미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다.

-김태우라는 배우가 흥행을 막는 어떤 요소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돌이킬 수 없는> 기자 시사 반응 좋다고 하는데, 난 그런 반응 필요없는데. (웃음) 배우 이전에 영화 보는 게 취미다 보니 주위에서 연출하라고 권유도 한다. 흥행 영화를 보면 나는 잘 모르겠는데 왜 그러지 싶은 경우도 있다. 근데 나 대중 배우다. 그래서 요즘은 영화 잘 안 보고 자제한다. 장르영화 들어오면 하고도 싶다. 의도적으로도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은 그럼 흥행을 염두에 둔 작품이 되는 건가? 드라마 <대물>은 잠깐 출연이지만 흥행이 됐다. =TV의 힘이 대단하더라. 포털 검색어에도 상위권에 오르고, 지인들한테 전화도 많이 받았다. 9년 만에 TV 나왔으니 얘깃거리도 됐을 거다. <대물>은 어쨌든 잠깐 출연한 거니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지난해 촬영한 <여의도>가 바로 뒤에 개봉할 거고, <>도 얼마 나오지 않지만, 멋지게 나온다. 그리고 지금은 들어온 작품이 없다. 오늘도 없다. 차기작은 고르는 게 아니고 없으니까 기다리는 거다. 그러다 곧 생길 거다. 늘 그랬으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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