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말 열린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는 ‘21세기 논픽션시네마’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기 면에서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간 ‘다큐멘터리’라는 용어 자체가 제한적으로 여겨질 만큼 다큐멘터리영화는 형식 면에서 흥미로운 발전과 혁신을 이루었다. 영화감독들이 실제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넘나들며 진실과 사실성에 관련된 개념을 좀더 깊이 탐구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영화들이 출현했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상영된 총 40편의 다큐멘터리 중에서 아시아영화로는 왕빙의 <철서구>(중국, 2003), 리티판의 <S-21, 크메르루주 살인 기계>(캄보디아·프랑스, 2003),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정오의 신비한 물체>(타이, 2003)와 가와세 나오미의 <하늘, 바람, 불, 물, 흙>(일본, 2001)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한편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영화 시리즈의 일환으로 출판된 260쪽에 달하는 특별 책자에 실린 어떤 글이나 영화목록에도 한국 다큐멘터리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김동원의 <송환>(2004) 같은 작품을 언급하지 않은 저자나 프로그래머를 꾸짖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한국 다큐멘터리는 외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외국 관객보다 국내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다. 고도의 시장성이 있는 주제를 다룬 잘 만든 한편의 한국 다큐멘터리가 나타나 세계에 알려지고 널리 보급되는 날이 언젠가 올지 모른다. 그렇지만 위에 언급한 특별 책자에 실린 글들을 보면 다큐멘터리는 당연히 그 지역의 이슈에 관여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국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일반적이다 . 다큐멘터리영화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지름길은 이미 장편영화로 명망이 높은 작가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경우다. <무용>(2007)은 중국 방직공장에 대해 창조적으로 표현된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지아장커의 작품, 그것도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소개되고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어쩌다, 혹은 계속해서 다큐멘터리로 외유하는 일은 흔하다. 잘 알려진 예로 베르너 헤어초크, 스파이크 리, 아녜스 바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마틴 스코시즈 같은 감독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강한 개인적인 시각과 스타일을 작품에 불어넣으면서 종종 장편영화 작업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한다. 한국의 작가 감독인 이창동이나 박찬욱 감독이 장편영화 길이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여러 영화제에 널리 소개될 것이다(그들의 픽션 장편영화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감독들이 다큐멘터리 형식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동시에 봉준호나 홍상수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 역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갖고 있는 사실주의 개념 때문이다. 관객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 픽션 장편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게 그 사실성에 대해 특정한 기대를 갖는다. 따라서 사실주의 영화로 실험을 하고 있는 지아장커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시도해보고 싶을 만하다. 사실주의는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영화적 흐름이었지만 지난 15년간 이끌어온 주된 창조적 힘은 장르와의 실험이었다. 한국의 유명 감독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까?
몇명의 감독들은 이미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실험을 했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은 CCTV의 특성을 살린 <인플루엔자>라는 30분짜리 픽션영화를 만들었다. 이창동 감독은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경우에 속한다. 그가 향후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이는 현재 그의 작품을 완성하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물론 이창동의 사실주의는 엄격한 규칙에 기초하고 있어 지아장커의 실험적 접근 방식과는 많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내가 픽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거리를 지나치게 멀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음악과 고전영화가 마틴 스코시지에게 영감을 주고, 정치적 사건이 스파이크 리를 자극했던 것처럼 이런 영화감독들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데는 그것을 추동할 강한 개인적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나는 A급 한국 감독들이 오는 10년 안에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그 최종 작품의 성격이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