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문제가 많은 시칠리아 가족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 Malavoglia 파스콸레 시메카/이탈리아/2010년/94분/월드 시네마
말라볼리아가의 성원들은 문제가 많다. 안토니오는 가업인 어업보다 작곡에 빠져 늘 음악만 듣고 산다. 누나는 모로코 불법이민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동생은 돈 많은 낯선 남자와 사귄다. 그러던 중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할아버지는 부서진 배를 고쳐 그와 남동생을 데리고 바다로 나간다.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한 어부 가족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시칠리아의 일상과 이민자 문제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칠리아 태생인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의 작품으로, 시칠리아 섬을 기반으로 작품을 집필, 이탈리아 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조반니 베르그의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시칠리아 섬의 아름다우면서도 건조한 풍경과 어우러진 음악은 영화의 비장미를 더해준다. 특히 안토니오의 음악과 할아버지가 읊는 옛 속담들이 어우러지면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선사한다.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다수의 독립영화를 연출해온 중견감독.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올 베니스영화제 오리존티 부문에 출품,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글 이화정
32. 이라크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만두 Mandoo 에브라힘 사에디/이라크/2010년/90분/아시아영화의 창
<만두>는 포스트 이라크전을 다룬다. 후세인의 폭정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 간 쉬란은 헤어졌던 삼촌을 만나 이라크로 돌아온다. 쉬란의 가족과 삼촌은 그들의 고향인 이란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에 오른다. 그러나 여정은 험난하다. 고속도로에서 폭탄이 쉴새없이 터지고, 검문검색 과정에서 인정사정없는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한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이 풍경, 이라크에서는 일상이다. 물론 전장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남아 있다. 도로 한가운데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가 고장나 더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을 태워주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야기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차 뒷좌석에 앉은 삼촌의 눈에 비친 풍경을 그대로 본다. 카메라의 눈이 삼촌의 눈이요, 또 관객의 눈이다. 삼촌이 조카와 승강이를 벌이는 경비대를 향해 권총을 겨눌 때, 보고 싶지 않은 풍경 앞에서 눈을 감을 때 우리는 삼촌처럼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관객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만두>의 1인칭 시점은 포스트 이라크전에 어울리는 선택이다. 글 김성훈
33. 상하이의 기억들
상해전기 I Wish I Knew 지아 장커/중국/2010년/138분/와이드앵글
변화와 현대화. 지아장커의 지속적인 테마가 이번엔 상하이를 향했다. <상해전기>는 상하이의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읽는 시적 다큐멘터리다. 중국에서 최초로 산업화된 도시, 중국 문화의 요람이 된 상하이의 결은 다양하다. 상하이에 살고 있는 혹은 상하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홍콩과 대만의 정치가, 배우, 갱스터, 노동자 18명의 증언을 모자이크를 통해 중국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중국의 거대한 스튜디오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동안 상하이의 과거는 증언으로, 또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푸티지로 삽입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결합한 <24시티>의 실험은 이번에도 계속된다. 중국 청두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그렸던 <24시티>의 형식,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 화면도 그대로다. ‘24시티’에 집중된 전작의 단단함을 벗어나, 이번 작품의 범위는 좀더 넓어지고 확장된다. 지아장커 감독은 “근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한 혁명가들의 도시, 상하이의 면면을 탐구함으로써 상하이의 포트레이트를 남기고 싶었다”고 전한다. 영화 속 출연자들을 통한, 생생한 증언들, 그것을 통한 역사와 집단의 역사에 대한 반영은 지아장커 영화라는 인증이다.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됐다. 글 이화정
34. 필리핀의 국화는 아이들의 눈물
삼파기타 Sampaguita, National Flower 프란시스 파시온/필리핀/2010년/78분/뉴 커런츠
‘삼파기타’는 필리핀의 국화를 뜻한다. 필리핀을 상징하는 동시에 필리핀의 아이들이 생계수단으로 삼는 꽃이다.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 라디오에서는 식사를 준비할 부모와 늦잠꾸러기인 아이가 만드는 평화로운 가정을 이야기하지만, 라디오를 듣는 아이들은 등잔과 통을 들고 삼파기타 밭으로 향한다. 아이들이 모아온 꽃으로 어른들은 목걸이를 만들고, 이를 아이들에게 팔게 한다. 아이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거리에 나온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부모가 버렸거나, 부모로부터 강요를 받았거나, 제 스스로 가족을 탈출했거나.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다. 또 다른 아이는 단지 비를 피해 잘 수 있는 곳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삼파기타>는 이 아이들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다. 실제 아이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그들의 사연을 재연하고, 그들의 현재를 전하는 함축적인 연출을 보이기도 한다. 등잔을 든 아이들이 삼파기타 밭으로 천천히 모여드는 장면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프다. 경찰에 쫓기던 아이가 거리에 서 있는 성모상을 바라볼 때는, 그의 절실함과 신이란 존재의 허무함이 드러난다. 부모, 국가, 신이 버린 아이들은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연대한다.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음식을 구해와 나름의 만찬을 꾸미는 모습은 따뜻하기보다는 애처롭다. 글 강병진
35.염소에 집착하는 아버지라니
처녀 염소 Virgin Goat 무랄리 나이르/인도, 프랑스/2010년/87분/아시아영화의 창
농부 칼리안에게는 딸이 둘이다. 하나는 부족한 지참금 때문에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미나이고, 다른 하나는 암컷 염소 라일라다. 미나보다 라일라를 더 아끼는 칼리안의 최대과제는 라일라의 짝짓기다. 어떤 멋진 수컷 염소들을 갖다놓아도 반응이 없자, 칼리안은 비아그라를 빻아 물에 녹여 라일라에게 먹이는 등 갖은 애를 쓴다. 마침내 라일라의 몸에 반응이 온 어느 날, 칼리안은 딸을 데리고 읍내로 향한다. 하지만 마침 높은 정치인이 마을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칼리안과 라일라의 여정은 험난해진다. 가는 곳 마다 길을 막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구금당한다. 칼리안은 라일라의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처녀 염소>를 연출한 무랄리 나이르 감독은 인도의 정치사회적 풍경을 풍자해온 감독이다. 집안을 건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일이나 공부를 하기는커녕 TV를 껴안고 사는 그의 아들, 그런 남자들 때문에 악을 쓰며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무랄리 나이르가 관찰한 지금 인도의 가족 풍경이다. <처녀 염소>는 여기에 마을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운을 함께 묘사하면서 풍자의 대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소시민에 대한 권력의 억압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염소에 집착하는 칼리안의 모습 또한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허허로운 집착이 낳은 허허로운 좌절을 보여주는 영화다. 글 강병진
36. 아름다운 콜롬비아 풍광이 품은 상처
거짓말의 바다 속 초상들 Portraits in a Sea of Lies 카를로스 가비리아/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2009년/90분/월드 시네마
소녀 마리나는 알코올중독인 할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산사태로 할아버지가 죽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석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버는 사촌 하이로는 오갈데없는 마리나에게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한다. 바로 마리나의 기억을 토대로 수년 전 떠나온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집문서를 찾기 위해서다. 실어증과 기면증을 앓는 마리나는 여행 중 잊고 있었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직면한다.
표면적으로는 마리나와 하이로가 고향집을 찾기 위해 떠나는 로드무비지만, 영화는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내전으로 상처받은 콜롬비아인들의 고통스런 현재다. 카를로스 가리비아 감독은 이 수난사를 얼버무려 말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기술 속에는 난민으로서의 삶뿐 아니라,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녀의 혼란스런 사춘기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사회의 고통을 디테일한 개인의 역사로까지 파고들며 영화는 생생한 힘을 얻는다. 끔찍한 영화 속 현실에도 불구하고 로드무비 속 콜롬비아의 풍광은 이 모든 상처를 치유할 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모순을 선사한다. 글 이화정
37. 아프리카 영화의 저력 맛보기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A Small Town Called Descent 자밀 쿠베가/남아프리카공화국/2010년/106분/월드 시네마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은 남아공의 사회문제인 제노포비아의 참상을 고발하는 경찰드라마다. 남아공의 후미진 마을에서 짐바브웨 출신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특수경찰 스콜피온 3인조가 곧 파견되고, 그들은 동네 신부의 증언으로 부패한 지역 경찰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그러나 변호사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의 진실을 파헤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여자의 증언으로 끔찍한 사건이 드러나고 사건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마다 일자리를 찾아 아프리카 이주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남아공에 제노포비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적 문제다. 영화 속 표현처럼 남아공인들에게 이들 이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더러운 외국인’이며, 그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폭력사태는 언제든 가능하다. 줄곧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자밀 쿠베카 감독은 대중적인 수사극의 형태를 빌려와 심각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루할 틈 없는 짜임새있는 내러티브, 스타일리시한 화면, 빠른 편집이라는 효과적인 도구 속에, 실제 뉴스 화면들을 입혀 현실적인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는 아프리카 음악의 사용 또한 눈여겨 볼 만하다. 글 이화정
38. 세계를 향한 이란의 외침일까
방해하지 마시오 Please Don’t Disturb 모흐센 압돌바합/이란/2010년/80분/아시아영화의 창
유명한 TV쇼 진행자인 카림자데흐는 신혼 생활 6개월 만에 파혼 위기를 맞는다. 법원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궤변 수준의 변명만 늘어놓는 그의 말을 아내가 들어줄 리 없다. 한편, 지갑과 휴대폰을 도둑맞은 율법학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율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 수리공을 부른 어느 노부부는 그가 정말 수리공이 맞는지 끝끝내 의심하며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자동차, 휴대폰 등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것들에 경고문처럼 붙여 알리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방해하지 마시오’. 저 멀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도 현대인이 느끼는 비애는 마찬가지인가보다. 영화는 테헤란을 배경으로 일상적이지만 조금은 별스러운 상황을 실타래처럼 얽힌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해 블랙코미디라는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란의 여성문제를 비롯해 율법학자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현실과 율법 사이의 괴리, 이란사회가 처한 도덕과 종교적 가치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39. 김복남처럼 ‘복수의 칼’을 든 여인
트럭 밑의 삶 Chassis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필리핀/2010년/73분/아시아영화의 창
<트럭 밑의 삶>은 필리핀판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 할 만하다. 살 집이 없는 두 모녀, 노라와 사라의 거처는 트럭 밑이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지만 엄마 노라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다. 하루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트럭 운전사들에게 몸을 팔고, 트럭이 부두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싸서 또 다른 트럭을 찾아나선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노라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분노로 가득한 노라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트럭 밑의 삶>은 항상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필리핀 길거리 여성의 현실을 그린 극영화다. 그러나 감정의 구축보다 현실 고발에 더 신경 쓰는 듯 감독은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연출한다. 시종일관 인물을 따라다니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흑백화면은 상황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한편, 노라의 마지막 복수는 너무나 강렬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 김성훈
40.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피노이 선데이 Pinoy Sunday 호위딩/대만, 필리핀, 일본, 프랑스/2009년/84분/아시아영화의 창
대만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인 마누엘과 다도의 삶은 낭패의 연속이다. 그들이 꿈꾸는 건 단지 퇴근 뒤의 안락함이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와 여름밤의 하늘을 보며 맥주를 마신다고 상상해봐!” 그러던 어느 일요일, 두 사람은 길거리에 버려진 빨간색 가죽소파를 발견한다. 문제는 이 소파를 집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트럭을 빌리기는 돈이 부족하고, 버스로 옮기려 하니 태워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들은 크고 무거운 소파를 직접 들고 가기로 결심한다. <피노이 선데이>는 이들의 ‘뻐근한’ 일요일을 쫓아가는 영화다. 소박한 바람이 좌충우돌 소동극으로 변해갈 때, 애처로운 유머와 안타까운 현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마누엘과 다도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두 여인의 비정한 현실까지 비춘다. 두 남자에게 그들은 다가서고 싶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역시 어디까지나 같은 이주노동자인 그들 또한 밤새워 일하고,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유머러스한 행복찾기로 볼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하든 그 소망이 고통이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결론이다. 글 강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