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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머스트40 - 신성발견 [2]
김성훈 이화정 김도훈 2010-10-08

거칠고 당찬 신인을 만나는 기쁨

11. 싱가포르 현대사의 한 장면

모래성 Sandcastle 부준펑/싱가포르/2010년/96분/아시아영화의 창

진실은 우연히 찾아온다. 군입대를 앞둔 혈기왕성한 열여덟살 청년 ‘엔’. 아버지 없이 자란 그는 어머니와 함께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쓰던 옛 컴퓨터에서 한 영상을 발견하면서 그는 아버지의 부재에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는 어떤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말레이시아에 산다고 믿고 있던 그였다. 그 영상은 1956년 10월 싱가포르 학생운동 관련 뉴스클립이었다. 그러나 가족 어느 누구도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엔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싱가포르의 신예 부준펑 감독의 데뷔작 <모래성>은 아버지 세대와 단절된 한 청년을 통해 그늘진 싱가포르 현대사에 눈을 돌린다. 시종일관 뉴스클립, 사진자료로 보여주는 ‘1956년 10월 학생운동’은 영국 직할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싱가포르 학생들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들의 격렬한 저항 덕분에 그해 열릴 예정이었던 ‘제1차 영-싱가포르 헌법회담’이 결렬됐고, 수석장관이 사임했다. 엔의 가족사를 통해 싱가포르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솜씨가 신예답지 않게 노련하다. 2008년 PPP프로젝트로 제작된 작품이다. 글 김성훈

12. 루마니아 영화 붐의 기수

오로라 Aurora 크리스티 푸이유 / 루마니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 / 2010년 / 181분 / 월드 시네마

부쿠레슈티 외곽. 중년 남자 비오렐은 버려진 트레일러 뒤에서 어느 가족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자동차에 소총을 싣고 달리는 그는, 모호한 생각에 시달리고 혼자만이 아는 목적지를 향해서 간다. 비오렐은 알 수 없는 자신의 주변인들을 만나게 되고 결국, 목적한 대로 비극적 결론에 도달한다. 자신을 지배하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인해 결국 몰락의 길을 선택하는 남자의 자화상.

데뷔작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의 대상을 수상, 루마니아영화의 붐을 예고했던 크리스티 푸이유 감독의 작품. 전작이 응급실에서 죽어가는 남자에 대한 기술이라면, 이번 작품은 살인을 하는 남자에 대한 집요한 쫓아가기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적절히 유머를 결합했던 전작과 달리, <오로라>에선 그런 여유는 없어 보인다. 유럽의 변방, 황폐한 부쿠레슈티 외곽을 배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지만, 결국 설명할 길 없는 모호한 인간에 대한 탐구다. 푸이유 감독은 직접 주연인 비오렐을 연기하며, 비오렐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다. 푸이유 감독이 에릭 로메르에게 헌정하는 <부쿠레슈티 교외의 여섯 가지 이야기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데뷔작에 대한 찬사를 다시 한번 입증하는 수작이다. 글 이화정

13. <카페 뤼미에르>의 아들영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Taipei Exchanges 샤오야추엔/대만/2010년/82분/아시아영화의 창

거장의 제자가 만든 작품을 지켜보는 건 늘 흥미롭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의 샤오야추엔 감독은 허우샤오시엔의 조감독 출신이다. 현대 대만 젊은이들의 고민을 그리는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의 작품인 <카페 뤼미에르>를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그의 촉수는 (도시나 역사보다) 카페라는 작은 공간과 동시대 청춘의 삶에 좀더 향해 있다. 카페를 연 도리스는 타이베이에서 가장 엘레강스한 카페가 되기를 꿈꾼다. 타이베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라떼와 입에 살짝 닿기만 해도 금방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에클레어라면 실현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개점한 지 며칠이 지나도 카페를 찾는 손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도리스에게 반전이 찾아온다. 함께 일하는 동생 조시가 카페를 벼룩시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여기저기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카페로 몰려들지만 도리스는 자신이 꿈꾸던 카페와 다른 모습에 혼란스럽다. 그러던 중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남자를 만나면서 마음을 주고받는다.

영화의 외형은 멜로드라마지만 속은 영락없는 성장드라마다. 어릴 때 공부와 여행 중 “여행을 택했던” 동생 조시와 “공부에 충실한” 언니 도리스, 두 자매의 성격은 커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늘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둘은 카페를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조금씩 자신을 마주한다. 여느 성장영화와 달리 감독은 인물에게 큰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더 큰 꿈을 안고 살아가야한다고 강조한다. 영화가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답다. 글 김성훈

14. 대담한 두 개의 반전!

그을린 / Incendies 드니 빌뇌브/ 캐나다/ 2010/ 130분/ 월드 시네마

아마도 올해 부산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강력하고 소름끼치는 반전을 품고 있는 작품. (아마도 레바논으로 추정되는) 중동 출신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잃어버리고 죽어간다. 아직 살아 있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쌍둥이 남매는 캐나다 퀘벡을 떠나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중동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생사도 모르는 아버지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형/ 오빠를 찾아야만 한다. 여정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출생의 비밀이다.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을린>은 캐나다영화의 새로운 저력을 보여주는 영화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퀘벡 남매의 여정과 엄마의 과거를 교차편집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며 천천히 남매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피비린내나는 내전으로 인해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지옥을 통과한 뒤, 결국 살아남은 중동 여자들의 초상이다. <그을린>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엄한 멜로드라마인 동시에 감동적인 로드무비이며, 대담한 반전(反轉+反戰)영화다. 글 김도훈

15. 이탈리아의 윤회사상?

네 번 / The Four Times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2010/ 88분/ 월드 시네마

가난한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외딴 마을. 염소를 치는 노인은 교회 바닥의 먼지가 지병을 고쳐줄 거라 믿으며 매일매일 염소젖과 맞바꾼 먼지를 마신다. 어느 날 노인은 조용히 숨을 거둔다. 노인이 죽자마자 영화는 새끼 염소가 태어나는 장면으로 다음 장을 연다. 조금씩 자라던 염소는 어느 날 무리에서 뒤처져 나무 아래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이제 영화는 염소가 앉아 있던 나무가 사람들에 의해 베어지고, 축제의 상징으로 쓰이고, 목탄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침내 목탄은 허공의 연기가 되어 마을 위로 사라진다. <네 번>은 다큐멘타리와 극영화의 아슬아슬한 사이에 머무르는 영화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은 오랜기간 관찰자의 마음으로 생명의 순환과 자연의 섭리를 카메라 속에 담아내는데, 영화 속 자연은 살아 숨쉬는 동물과 식물뿐 아니라 먼지와 광물과 공기이기도 하다. 네 마디로 나뉘어 진행되는 영화의 형식 자체가 감독의 자연에 대한 철학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마술처럼 아름답다. 프라마르티노 감독은 밀라노의 폴리테크니코공과대학에서 수학한 과학자 출신이며, <네 번>으로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미래의 거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글 김도훈

16. 한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사건

줌 헌팅/ Zoom Hunting 조리/대만/2009년/87분/아시아영화의 창

대만에서 온 신예들의 약진.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동남아시아영화의 경향 중 하나를 꼽으라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대만의 신인들은 선배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자기 식대로 흡수하고 소화했다. 조리 감독 역시 그중 하나다. 그가 연출한 <줌 헌팅>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1966년작인 <욕망>(Blow Up)을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 모두 한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차이라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라는, 리얼리즘의 의미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면 조리는 ‘프레임 밖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릴러 장르로 접근한다.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다. 사진작가 루이는 맞은편 건물에서 벌어지는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는다. 며칠 뒤 같은 장소에서 두 남녀가 싸우고, 루이는 이 광경을 또 찍는다. 그러면서 루이는 추리소설가인 동생 루싱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다소 복잡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길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극을 전개한다. 동시에 스스로 던진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잊지 않는다. “프레임 안의 세계가 전부 진실인 것은 아니다”라고. 글 김성훈

17. 평온한 가족의 불청객, 할아버지

비, 두려워마/BI, Don't Be Afraid 판당디/베트남,독일,프랑스/2010년/92분/아시아영화의 창

할아버지가 하노이로 돌아오기 전까지 ‘비’의 집안은 평화로웠다. 아버지는 얼음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집안일로 항상 바빴다. 선생님인 누나는 매일 같은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여섯살의 비 역시 아버지의 얼음 공장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게 일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다가 거동이 불편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의 존재는 식탁에 수저 하나 추가한 것 이상이었다. 가족 구성원의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다툼이 잦아지고, 그들의 일상은 조금씩 뒤틀리게 된다.

<비, 두려워마>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외부인인 할아버지의 합류로 가족의 일상과 질서가 변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가족드라마다. 베트남의 신예 판당디 감독은 ‘비’의 눈을 빌려 인물의 작은 행동 변화까지 포착한다. 덕분에 이야기는 가족의 균열이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 모르는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아버지의 존재’를 불안해하면서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족을 통해 감독은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글 김성훈

18. 반복된 소녀의 실종과 성폭력의 진실

침묵 The Silence 바란 보 오다르 / 독일 / 2010년 / 118분 / 월드 시네마

13살 소녀의 갑작스런 실종사건. 시나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사라진 장소는 공교롭게도 23년 전 또래의 소녀 피아가 강간당한 뒤 살해된 곳이다. 시나카도 피아와 같은 끔찍한 일을 겪은 것일까? 당시, 피아 사건을 조사했던 은퇴한 형사 크리스찬은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직감해 범인을 잡기 위해 나선다. 범인검거에 실패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그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된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성폭행 살인사건에 관한 본격적이고 정성스런 질문.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며 불안에 떠는 시나카의 부모는, 23년 전 딸을 잃고 아픔의 세월을 살아온 피아 부모의 고통과 함께 평행선상에서 오버랩된다. 스위스 태생의 바란 보 오다르 감독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침묵>을 연출했다. 끔찍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말초적인 보여주기와는 거리가 멀다.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밀밭을 달리는 소녀의 유려한 영상은 이 영화를 규정하는 대표적 이미지다. 영화는 잔혹한 장면을 직접 기술하는 대신 사건으로 인해 파멸된 가족들의 심리에 집중한다. 첫 데뷔작으로 오다르 감독은 주목할 만한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글 이화정

19. 러시아라는 거대한 악몽

나의 기쁨 / My Joy 세르게이 로즈니차/ 독일, 우크라니아, 네덜란드/ 2010/ 127분/ 월드 시네마

이건 정말이지 소름끼치는 지옥으로의 여정이다. 러시아의 지방에서 밀가루를 나르는 트럭 운전사 게오르기이는 시민을 학대하는 지방 경찰들, 나이 어린 매춘부,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냥꾼 등 여러 인간들을 만나며 점점 마음이 얼어붙어간다. <나의 기쁨>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에 속아서는 안된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다큐멘터리 작업 중에 수집한 수많은 동구권의 일화들을 바탕으로 러시아라는 거대한 대륙의 악몽 같은 현실을 로드무비로 치환해냈다. 게다가 이건 물리적인 거리를 여행하는 로드무비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 인간의 마음과 마음을 헤엄치는 일종의 정신적 로드무비다. 주인공 게오르기이가 탐험하는 장소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뛴 러시아의 얼어붙은 욕망과 생존의 법칙이다. 로즈니차 감독은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카메라 기법을 종종 선보이는데, 게오르기이를 뒤쫓던 카메라가 러시아 시골 시장 군상의 동선을 마구잡이로 따르는 시퀀스는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는 인공 두뇌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과학자 출신이다. 이 영화의 냉담한 서정은 아마 거기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글 김도훈

20 전당포에 아기를 맡기면?

10월 October 다니엘 베가, 디에고 베가 / 페루, 베네수엘라, 스페인 / 2010년 / 83분 / 월드 시네마

전당포업자 클레멘테. 하루 일과는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과의 무심한 대화와 가끔 창녀를 찾아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전부다. 단조로운 그의 삶이 뒤바뀐 건 어느 날 바구니에 아기가 배달되면서부터다. 관계를 했던 창녀가 아이를 클레멘테의 자식이라며 떠맡기고 떠나버린 것. 난감한 클레멘테 앞에 이웃의 여인 소피아가 보모를 자처하게 되고,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시작된다.

<10월>은 고독하고 메마른 현재의 삶 속에서 과연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적극적 시도다. 고독했던 클레멘테의 삶은 아기라는 존재로 인해 급변한다. 온기라고 없던 집에 보모와 아기, 병상에 아내를 둔 노인까지 모이면서 잊고 있던 인간적인 면모가 끄집어내지는 것이다. 영화 속 가장 상징적이고 현실적인 장소는 전당포다. 전당포에서 오가는 건 돈과 물건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이 돈을 구하기 위해 클레멘테에게 늘어놓는 하소연은, 마치 지금 남미의 가난하고 딱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연속 인터뷰 같다. 다니엘, 디에고 베가 형제 감독은, 절제된 화면구성으로 클레멘테의 단조로운 생활 속, 남미의 지금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여 준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영 작품. 글 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