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집행위원장의 소지품 중 가장 구경하고 싶었던 건 여권이었다. 1년 중 1/3을 해외영화제를 다니며 보내는 그의 여권에는 출입국 증명 스탬프가 얼마나 많을까. 평소의 궁금증을 털어놨더니,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올해 초에 여권을 새로 발급받았는데 다시 재발급받아야 할 상황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한국영화 로비스트’로 활동한 김동호 위원장에게 편애할 수밖에 없는 해외영화제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소개된 영화제들은 김 위원장의 뇌리에 선명하게 도장 자국을 낸 특별한 영화제들인 셈이다. 이들 영화제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막이 알고 싶다면 김 위원장이 <국제신문>에 연재했던 ‘김동호의 영화제 기행’을 찾아보시길(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피프웹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니면, 좀더 기다렸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출간될 <세계영화제 기행>(가제)을 들춰보면 된다.
‘한국의 밤’이 기억납니다
스페인 라스팔마스영화제
2004년에 심사위원으로 초청받아 처음 갔어요. 라스팔마스는 대서양 카나리아 군도에 있는 섬인데 스페인의 대표적인 관광, 휴양 도시예요. 마드리드 대학교수인 알베르토 엘레나를 부산영화제에 초청했는데 그가 고른 12편의 한국영화가 2004년 5회 라스팔마스영화제에서 상영됐죠. 라스팔마스가 1960, 70년대 한국 원양어업의 전진기지였음은 그곳에 가서야 알았어요. 원양어업에 종사하다 라스팔마스에 정착한 교민 수만 800명이 넘어요. 그런데 그중 80%가 부산 출신이에요. 섬이 생긴 뒤로 한국영화가 한번도 상영된 적이 없어서 첫 방문 때 교민들의 환대가 대단했어요. 총영사는 한국영화 감독들의 기자회견까지 일일이 참여했고, 교민회 부인회에선 영화제 기간 중에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외국 게스트에게 대접하는 ‘한국의 밤’ 행사까지 열었어요. 이게 진짜 축제구나 하는 느낌이었죠. 교민들은 영화제 기간 중에 생업을 전폐하고 하루에 3편씩 시간표를 짜서 한국영화를 봤어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마리아 슈나이더 등이 함께 심사를 진행했는데, 그해 폐막식 때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최우수작품상과 촬영상을 차지했어요.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가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지난해 10회 영화제 때 다시 라스팔마스를 찾았는데, 5회 영화제 때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교민들에게 나눠드렸더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고갱보다 산호초 해변을!
오세아니아 다큐멘터리영화제
화가 고갱이 말년을 보낸 섬으로 유명한 타히티에서 열리는 독특한 영화제예요. 올해 1월에 심상위원으로 초청받아 갔는데, 아시아인이 심사위원을 맡은 건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전까지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섬나라 대표 인사들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했다고 해요. 인터뷰 요청이 많고 공식 언어가 불어라서 고생도 하고 애도 먹었죠. 이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은 섬 원주민들의 생활과 역사에 관한 방송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이에요. 섬사람들이 즐길 만한 여흥거리가 많지 않아선지 이러한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현지에선 굉장히 인기있다고 해요. 한국도 해양국가이고 부산도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잖아요. 추후에 이 영화제의 재미난 프로그램들을 가져와서 부산영화제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여담인데, 타히티는 고갱이 말년을 보낸 섬으로도 유명해요. 가기 전까지만 해도 섬 전체가 고갱, 고갱, 고갱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제 타히티에 가면 고갱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요. 섬 끄트머리에 고갱박물관이 있긴 한데 뭐 거기 걸려 있는 작품들은 다 모사품이고, 원본은 하나도 없죠. 고갱을 보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산호초 있는 해변에서 시원한 해수욕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즐거움이에요.
와인의 향이 감도는 영화제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
감독이나 배우들이 초청받길 원하는 영화제 중 하나예요. 게스트는 50명 이내로 많지 않아요. 대신 초청받은 게스트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죠. 스탭들이 게스트들의 매 끼니를 일일이 다 챙겨요. 그래서 영화제 스탭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어요. 가족적인 분위기의 영화제예요. 상영관도 테아트로 누에보라고 한곳뿐이어서 영화 보기도 수월하죠. 1980년대 초에 우디네에는 포르데노네무성영화제가 있어서 러시아나 독일영화를 주로 상영했어요. 그러다가 당시 <버라이어티> 기자였던 데릭 엘리가 홍콩영화 특별전을 했는데 반응이 굉장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극동아시아영화들을 집중 조명하는 이 영화제가 만들어졌죠. 저녁에 상영하는 영화들은 상영 종료시간이 다 다른데도 그때마다 스탭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게스트들을 데리러 와서 그날 지정된 레스토랑으로 몰고 가요. 굶을 일 없는 영화제예요. 우디네는 특히 와인으로 굉장히 잘 알려져 있어요. 매일 다른 식당으로 초대됐는데, 다양한 하우스와인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요즘은 그런데 영화제 예산이 좀 줄어서 이제는 여러 곳의 식당을 돌진 않고 한두곳의 식당에서 게스트들을 대접해요.
심사위원으로 다시 찾고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독립영화제
네덜란드 기자인 피터 반 뷰렌과 함께 1회 영화제 때 심사를 맡았어요. 인상적인 점은 자원봉사자들이 전부 영화감독들이에요. 에인절스라는 이름으로 게스트들을 안내하죠. 아르헨티나의 경우 점심은 3시 이후에 먹고, 저녁은 10시 이후에 먹어요. 우리와는 식사 시간이 안 맞아서 조금 고생했어요. 밤 10시쯤에 저녁 먹고 자정부터는 파티가 밤새도록 열리는데 게스트들도 탱고에 맞춰 춤을 추곤 하죠. 영화감독들이 자원봉사를 맡다보니 파티가 열리는 동안 영화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어요. 그러다 맘에 맞으면 자원봉사자들이 2차로 게스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기도 해요. 제가 갔던 1회 때는 다들 굉장한 의욕들을 갖고 있어서 그랬는지 경쟁작이 25편이 넘었어요. 하루에 3, 4편을 봐야 해서 이과수 폭포는 구경도 못했죠. 영화 보고 점심 먹고, 영화 보고 파티 가고. 딴 짓을 못해요. (웃음) 2회 때부터는 퀸틴이라는 집행위원장으로 바뀌었는데, 이 친구는 와이프와 함께 1년 내내 영화제 구경 다니는 그런 친구예요. 아마 지금은 경쟁작 수가 줄었을 텐데, 그렇다면 심사위원으로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요.
프랑스 영화 속 그 해변에서…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이해준감독과 김무령프로듀서등과 함께
도빌은 클로드 를르슈의 <남과 여>, 홍상수의 <남과 여>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도시예요. 혈통 좋은 말들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죠. 이 도시를 만든 귀족이 호텔보다 경마장을 먼저 만들었을 정도예요. 원래는 도빌 미국영화제가 있어서 할리우드 감독과 배우들을 초대했어요. 가을에 열리는 이 영화제는 유럽에선 거의 유일한 미국영화제였죠. 그러다 1999년 외과의사였던 알랭 파텔이 아시아영화제를 만들었어요. 영화제를 만들고 나서 곧바로 부산에 와서 우리와 자매결연을 맺었죠. 알랭 파텔은 이전에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를 한 적도 있고 부산에서 근무한 적도 있는 지한파 인사예요. 그런 돈독한 인연 대문에 매년 양쪽 집행위원장이 도빌과 부산을 빼놓지 않고 찾았죠. 아마도 3대 국제영화제를 제외하면 우디네영화제와 함께 가장 많이 들른 곳일 거예요.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된 것은 2회 때부터였는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파이란> <공동경비구역 JSA> 등 한국영화가 몇년 동안 상을 독식했어요. ‘도빌한국영화제’라 부를 만도 해요. 남우주연상 수상자에게는 루이 18세라고 면세 가격으로만 800달러 이상 되는 코냑을 주고, 최우수작품상에는 부산국제영화제도 주고 있는 에르메스 수제 감독 의자를 부상으로 줘요. 한국 감독과 배우들이 고가의 코냑과 의자를 다 가지고 와버린 셈이죠. 루이 18세는 박중훈도, 송강호도 다 갖고 있을 거예요. 도빌도 굉장히 아름답지만 지근거리에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어촌의 배경인 옹플뢰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알려진 ‘디데이 해변’이 있어요. 볼거리가 많죠.
상금이 두둑, 한국 감독에게 권하리
폴란드 크라쿠프 오프 플러스 카메라 독립영화제
폴란드 크라쿠프 오프 플러스 집행위원장 시먼 미슈라크와 프로그래머 하나 피셔
이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시먼과 아나는 서른이 안된 젊은이들이에요. 같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두 남녀가 운영하는데 굉장히 열심이죠. 지난해에 세미나 토론자로 참석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올해 3회 영화제에선 부산국제영화제 15주년 특별전을 열어 손영성 감독의 <약탈자들>,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를 상영키로 했죠. 그런데 영화제 개막 직전에 폴란드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어요. 크라쿠프에 폴란드 대통령의 시신을 안장키로 하면서 영화제 일정 또한 밀렸어요. 게다가 아이슬란드 화산폭발까지 겹쳐서. 먼저 암스테르담영화제로 떠났던 전양준 프로그래머도 연락해보니 교통이 두절돼서 뮌헨 민박집에 머물고 있더라고요. 올해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길 순 없고, 일단 뮌헨까지 가보자 했어요. 그런데 뮌헨공항에 도착해보니 항공편이 다 취소됐어요. 기차편도 전부 만석이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루프트한자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탔죠. 저녁 8시 반에 바르샤바로 향하는 버스를 탔는데 다음날 오후 3시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1시간 기다렸다가 영화제에서 마련해준 차를 타고 다시 5시간 걸려서 겨우 크라쿠프에 도착했어요. 인천에서 크라쿠프에 도착하기까지 40시간이 넘었어요. 가장 고생했던 영화제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영화제라 상금이 많은 게 기억에 남아요. 경쟁부문 상금이 10만달러나 돼요. 폴란드에서 촬영하고 후반작업까지 하면 영상위원회 등에서 30만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고, 그 감독이 차기작도 폴란드에서 촬영하면 더 얹어주죠. 제작 상황이 좋지 않아 애먹는 한국 감독들을 꼭 데리고 가야 할 영화제예요.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델이 된 바로 그!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네델란드 로테르담영화제-1997년 심사위원 무프다 트라틀리, 파비아노카노사, 샹탈 애커먼, 슐루터(왼쪽부터)
여러 번 말했지만,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델이 된 영화제예요. 벤치마킹 대상이었죠. 특히 시네마트라는 프로젝트 마켓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아시아 감독들에게도 이런 기회를 제공해줘야겠구나 싶어 우리도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을 만들었죠.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사이먼 필드 전 집행위원장과는 막역한 사이인데, 1993년에 한국에 왔을 때 위스키를 나눠 마시면서 가까워졌어요. 집행위원장을 맡은 첫해 사이먼 필드가 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왔는데, 그때까지 전 심사위원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로테르담처럼 큰 영화제에서 심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얼떨떨하고. 맨 먼저 대형 서점에 가서 회의진행을 위한 영문 책부터 구입했어요. 동의, 제청, 삼청이 영어로 뭔가. 반대는 또 뭔가. 메모를 열심히 해갔어요. 심사를 해본 영화인들한테 자문도 구하고 그랬던 일이 생각나요. 굉장히 많은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이니만큼 많은 세계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라서 매년 빼놓지 않고 들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