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독립영화 지원의 기치 아래 출범한 시네말라야영화제가 지난 7월9일부터 18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렸다. 필리핀영화진흥위원회와 필리핀문화센터, 시네말라야재단이 개최한 시네말라야영화제는 올해로 6회째를 맞는다. 이 영화제가 특별한 이유는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방식에 있다. 연초에 영화제쪽은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시나리오를 응모받아 이중 최대 10편을 선정하여 제작비를 지원한다. 그리고 선정된 작품들은 모두 자동으로 시네말라야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다. 그동안 시네말라야영화제를 통해 배출된 감독들을 살펴보면 아우라에우스 솔리토, 크리스 마르티네즈,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프란시스 파시온, 롬멜 톨렌티노 등이 있다. 필리핀영화가 가히 백화제방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 영화계에서는 브리얀테 멘도사, 라브 디아즈, 라야 마틴 등이 주목받고 있지만, 머지않아 위의 젊은 감독들 역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올해 시네말라야영화제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중견 감독들에게도 독립영화를 제작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5편의 작품들은 디렉터스 쇼케이스에서 소개되었다. 조엘 라망간, 질 포르테스, 마리오 오하라 등 주류에서 활동 중이거나 작품 활동이 뜸했던 주요 중견 감독들이 이 쇼케이스에 동참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상업영화와는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독립영화를 선보였다. 또 하나 긍정적인 측면은 주류 영화계의 최고 인기 스타들이 출연료에 상관없이 기꺼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5편 중 최고의 작품은 에드워드 마크 메일리의 <이식>이다. 빚을 갚기 위해 부유한 중동인에게 신장을 이식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작품은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떠올리게 하는 수작이다. 데뷔작 <곡하는 여자>로 필리핀 내에서는 주목받았지만 해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에드워드 마크 메일리 감독은 이 작품으로 새롭게 평가받게 될 것이다.
젊은 감독 중에서는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해 32살의 이 유망한 감독은 18살 때 이미 필리핀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력이 있는 탁월한 시나리오작가 출신이다. 2006년에 <돈솔>로 장편영화 감독이 된 그는 다작을 하는 감독이다. 지난해에 라야 마틴과 공동으로 연출하여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마닐라>도 그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올해에도 이미 3편을 만들었는데 그중 <트럭 밑의 삶>은 단연 수작이다. <돈솔> <아델라>에 이어지는 또 한편의 여성영화이면서 신랄한 사회비판영화인 <트럭 밑의 삶>은 집이 없어 컨테이너 트럭 밑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는 한 여인의 고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단선적인 내러티브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과 함께 올해 필리핀영화가 배출한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작품은 아직 미공개다.
또 한편으로, 이들 독립영화가 주류영화와 만날 가능성은 없는가 하는 것이 필리핀영화계의 화두이다. 그 모범사례가 있다. 바로 크리스 마르티네즈다. 지난 2008년 <100>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던 그는 올해 두 번째 작품인 <신부 도착하다>를 만들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코미디인 이 작품은 독립영화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배급은 필리핀 최대의 제작 배급사인 스타시네마가 맡았다. 그 결과 올해 필리핀영화 중 흥행 수입 2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낳았다. 필리핀의 주류 영화계가 독립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여러 요인 중에 정부 산하의 필리핀영화진흥위원회와 시네말라야재단의 과감한 제작지원을 빼놓을 수 없다. 과거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한국의 영화정책, 특히 독립영화 제작지원제도를 부러워하고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