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에브리바디 올라잇>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아네트 베닝과 줄리언 무어가 레즈비언 부부를 연기한다는 데서 온다. 몰래 게이 포르노물을 보고 잠자리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애무하는 모습은, 그들이 쌓아온 필모그래피를 생각할 때 무척 생경하면서도 파격적이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고 선댄스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며 자신을 단숨에 주목받는 감독 반열에 올려놓은 데뷔작 <하이 아트>(1998)에서도 리사 촐로덴코는 위층 여자와 아래층 여자의 우연한 만남과 낯선 사랑을 그렸었다. 마치 그들의 좀더 나이든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에브리바디 올라잇>의 두 여자도 의사와 환자로 우연히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그 불꽃같은 사랑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이제 뜻하지 않은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은 레즈비언 커플 닉(아네트 베닝)과 줄스(줄리언 무어)는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간다. 하지만 딸 조니(미아 와시코스카)와 아들 레이저(조시 허친슨)가 생물학적 아버지 폴(마크 러팔로)을 찾아가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폴은 여전히 싱글로 지내는 매력적인 중년 남성이다. 조니와 레이저는 틈만 나면 폴을 만나고, 가족식사에 초대해 친하게 된 뒤로는 줄스도 폴 집의 뒤뜰 공사를 해주면서 수시로 만나 가까워진다. 지나친 완벽주의자인 닉에게 불만이 쌓였던 줄스는 어딘가 자유분방한 폴에게 끌려 급기야 육체적인 관계까지 맺게 된다.
엄마들이 보던 게이 포르노물을 아들이 훔쳐보면 ‘왜 이런 걸 보냐’고 따지고, ‘걔랑 했을까 안 했을까’ 고민하며 아들을 게이로 의심해 전전긍긍하며, 가족의 내밀한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까지 리사 촐로덴코는 그런 파격적인 설정들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상으로 담아낸다. 어떻게 보면 아들의 질문에 대한 줄스의 대답이 이 영화 혹은 리사 촐로덴코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다. “레즈비언 아닌 여자들이 그런 척하는 거 보기 싫어!” 레즈비언 아닌 여자들이 단지 남성들의 별난 관음증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레즈비언 포르노물에 대한 환멸이자, 여전히 자신의 진심과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아들을 향한 따스한 한마디. “우리한텐 말해도 돼. 다 이해하고 도와줄게.” 왜냐하면 닉과 줄스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이성애자 가족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우월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나 <해피니스>(1998) 같은 토드 솔론즈의 냉소적인 세계라기보다 이미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는 펠리시티 허프먼의 <트랜스아메리카>(2005)나 한 가족의 미국 횡단기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온화함을 전제로 깔고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무척 섬세하다. 억지로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싫은 것도 좋다고 말하는 모습이 그리 어색해 보이진 않는다. 이제 곧 대학 진학과 함께 집을 떠나게 될 조니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심리묘사도 마찬가지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폴을 보며 레이저와 웃는 모습이 너무 똑같다며 신기해하는 줄스의 모습에서 묘한 혈연의 매혹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쯤에서 여느 휴먼코미디처럼 결국 아이들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렇게 잔잔하게 돌려서 하는 건가 하고 냉철하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네트 베닝과 줄리언 무어의 경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가족에게 큰 위기가 닥쳤을 때다. 리사 촐로덴코의 이전작 <로렐 캐년>(2002)에서 너무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프랜시스 맥도먼드처럼 아주 제멋대로인 엄마 수준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서로를 감싸안는다. 억지로 환부를 도려내거나 상처를 과장하는 법이 없으면서도 더 멋진 치유의 시간을 선사한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남자를 용서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 역시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인 구도와는 거리가 먼 여성 감독 리사 촐로덴코의 단호한 결말이 무척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