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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정의의 전쟁 따윈 없다고
정재혁 2010-08-25

극장 개봉한 와카마쓰 고지의 신작 <캐터필러> 후폭풍 예상

<캐터필러>

8월15일, 한국에선 나라를 찾은 광복의 날이 일본에선 깃발을 내린 패전의 날이다. 한국은 8월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 강제 병합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사죄 담화문을 보도하며 한층 나아진 일본의 태도를 반겼지만, 사실 일본 내에선 무심한 반응 일색이었다. 오히려 비판의 목소리가 눈에 띄었고, TV에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의 혼령을 추모하는 기획이 줄을 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다룬 다큐멘터리, 아버지와 오빠 세명을 전쟁으로 보낸 뒤 홀로 살아남은 할머니의 증언. 2010년 일본의 8월15일은 여전히 전쟁의 참담함을 되뇌고 힘들게 살아낸 전쟁 세대를 추모하는 날이었다.

다만 극장가는 조금 시끄러웠다. 8월14일 개봉한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신작 <캐터필러>가 전쟁에 대한 논쟁적인 화두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8월6일 히로시마 원폭의 날 기념 상영을 시작으로 8월14일 전국 개봉한 <캐터필러>는 전쟁에서 사지를 잃고 돌아온 군인과 그 군인을 간호하는 아내의 이야기다. 2010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됐고, 여주인공 시게코를 연기한 데라지마 시노부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세계2차대전 때의 일본의 실상을 폭로한다. 일본 내 상영을 위해 일종의 방충망이 필요할 것(<버라이어티>)”이란 베를린 현지의 평처럼 <캐터필러>는 일본 내에서 논쟁이 예상된다.

<캐터필러>는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일본 군가가 흐르는 가운데 군인들이 중국의 민가를 쳐들어가 여인들을 탐한다. 주인공 구로가와(오니시 시마)의 살기로 번뜩이는 눈과 저항이 힘겨워 쏟아버린 중국 여인의 눈물.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러 나간 남자들의 모습을 와카마쓰 감독은 전장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일본 구로가와의 고향집이다. 남편을 기다리던 시게코는 손발이 모두 잘려나간 남편의 몸뚱이와 마주한다. 멀쩡하던 남편이 전쟁에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나라는 훈장을 수여하며 ‘일본의 자랑’이라 치켜세우지만, 구로가와는 먹는 거, 자는 거를 빼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말하는 영화는 많다. 소위 우익영화라 거론되는 <남자들의 야마토> <내일에의 유언>도 그렇다. 다만 대다수 영화가 국익이란 이름 아래 희생된 생명을 아름답게 치장한다면, <캐터필러>는 국익에 희생된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대로 보여준다. 라디오의 선전방송 없이 마음을 다잡기 힘들고, ‘군신(軍神)’이란 칭호 없이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운 구로가와와 시게코.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일제국’에 대한 충성이 그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했단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심지어 영화는 시게코의 시선을 빌려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믿음을 집단적인 광기로 바라보고 조롱한다. 불구가 된 남편의 몸에 대고 “군신의 얼굴이 이 모양 이 꼴”이라며 웃는 대목은 아마 올해 일본영화 중 가장 도발적인 장면일 거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이 반전이든 아니든 전쟁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데라지마 시노부) “젊은이들이 정의의 전쟁 따위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와카마쓰 고지).” 올해도 어김없이 일본에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쟁이 불거져 나왔다. 간 나오토 내각의 신사 참배 불참 결정을 두고 ‘외압에 못 이겨 신앙의 자유를 포기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아직도 많은 일본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을 아프고 힘들게 잘 견뎌냈다 위로한다. 하지만 와카마쓰 고지 감독과 데라지마 시노부의 바람처럼 지금 일본에 필요한 건 그들이 믿고 있는 전쟁의 가치를 의심해보는 게 아닐까. <캐터필러>가 일본 내 몰고 올 논쟁이 주목된다.

영화를 무기로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을 전하고 싶을 뿐

(이 인터뷰는 시사 이후 가진 기자회견과 <키네마준보> 8월 하순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작품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뭔가. =<실록 연합적군>을 하며 젊은 배우들을 보고 있는데, 저들을 낳은 건 바로 전쟁세대구나 싶었다. 전쟁이 뭔지 한번은 제대로 그려야겠다 생각했다.

-시게코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다. =전쟁 때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제 몫을 하는 거였다. 즉 전장에 내보낼 사람을 만드는 거지. 그러니 전쟁만 일어나면 여자를 먼저 죽였던 거다. 시게코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 거고, 그 때문에 구로가와에게 폭행도 많이 당했다. 시게코는 전쟁이란 시스템 안에서 패자였던 거다.

-영화의 마지막 히로시마 원폭 투하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나. =조감독 시절 원폭자료관에서 사진을 본 게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이후에 히로시마까지 가서 기억을 더듬으며 거리를 걷기도 했다. <벽 속의 비사>도 <성모관음대보살>도 그런 기억이 담긴 영화다. 당시 사진의 충격이 워낙 커 계속 남아 있는 거 같다.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은 있나. =빠르면 내년 4월에 촬영할 것 같다. 전쟁 이야기는 아니고 1960년대를 총괄하는 작품이 될 거다. 나는 그저 영화를 무기로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들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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