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세미라미스 극장에서 모하마드 알 다라지의 <바빌론의 아들>이 개봉했다. 세미라미스는 현재 바그다드에 남아 있는 35mm 극장 두곳 중 하나다. <바빌론의 아들>은 걸프전 때 실종된 아버지와 아들을 찾아나선 손자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로드무비로, 올해 선댄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모하마드 알 다라지는 이라크에서 태어나 1994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해외파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이후 이라크 영화산업은 붕괴되고, 대부분의 극장들은 문을 닫았다. 때문에 이라크 시민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CD와 비디오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1940년대 황금기를 누렸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이라크는 아랍권 전체의 영화산업 선도 국가였다. 하지만 60년대 바트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멜로드라마 같은 대중적인 장르는 배제되고 영화의 사회적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이라크의 역사를 찬양하는 시대극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걸프전 이후 영화제작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소모품들의 수입이 금지되면서 영화제작이 거의 중단되었으며,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이후 영화산업은 붕괴되었다. 일부 영화인만이 비디오로 영화를 만들거나, 해외파 영화인들이 해외 자본과 인력을 가지고 이라크 내에서 영화를 만드는 정도였다. 그나마 이렇게 만든 영화도 이라크 내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막혀 있었다. <바빌론의 아들> 개봉은 이러한 기나긴 터널을 지나 이라크영화산업의 부활을 알리는 첫 출발점인 셈이다. 이라크 출신의 해외파 감독으로는 하마드 알 다라지 외에도 <보드카 레몬>(2003), <킬로미터 제로>(2005)의 히너 살림, <노출부족>(2005)의 오다이 라쉬드 등이 있다.
문제는 국내파다. 아직 해외파만큼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주목할만한 조짐이 있다. 자치정부인 이라크 북부의 쿠르디스탄 지역이 바로 그 조짐의 중심이다. 쿠르디스탄은 아랍인이 아닌, 쿠르드족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이다. 아직 온전한 독립국가를 갖지 못했지만, 쿠르드족은 자기만의 언어와 문화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쿠르드족 영화인들의 활약도 대단하다. 고 일마즈 귀니(터키), 바흐만 고바디(이란), 히너 살림(프랑스) 등이 쿠르드족 감독들이다. 그리고 최근 쿠르디스탄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 수상자인 <킥 오프>의 샤우캇 아민 코르키, <헤르만>(2009)의 후세인 하산에 이어 올해 단연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이 나왔다. <까마귀의 땅>의 하산 알리 마흐무드다. 연출 경험은 단편 몇편이 전부인 그는 샤우캇 아민 코르키의 데뷔작 <먼지 속을 지나서>의 제작을 맡은 뒤, 올해 장편 데뷔작을 만들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살육이 벌어졌던 대지에 까마귀 떼가 몰려 들고, 피해를 입은 지주는 까마귀 떼를 쫓아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우는가 하면 아이들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대지는 허수아비와 까마귀 떼가 지배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좀비처럼 변해버린 허수아비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숨져간 수많은 사상자를 떠올리게 한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초창기 작품을 연상시키는 <까마귀의 땅>은 풍부한 상징적 영상으로 인간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살육 행위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놀라운 작품이다. 정치적, 경제적 환경 때문에 영화적 전통이 일천한 척박한 땅에 이런 작품과 작가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마치 세계영화계에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80년대 말의 이란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직 그 어느 곳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이 작품은 가을에 부산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