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와 장이모는 2006년 4월 중국의 한 영화채널이 주관한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했다. 서양과 아시아의 대표적인 두 감독이 1시간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내용 중 하나는 영화와 기술 발전과 관련된 대목이었다. “영화의 역사가 기술 발전의 역사라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스필버그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어 “영화의 역사는 좋은 스토리텔링의 역사다”라고 힘주어 주장했다. “대신 새로운 기술은 스토리텔링을 쉽게 만들어준다. 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통해 <쥬라기 공원>의 공룡을 만들 수 있었다. 이 기술은 상상 속으로 좀더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죠스> <미지와의 조우> < E.T >처럼 획기적인 특수효과가 두드러지는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그이지만, 만약 스필버그가 기술적 성취에 매몰돼 나태한 이야기를 펼쳤다면 지금처럼 최고의 흥행감독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같은 이야기는 픽사 스튜디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픽사의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3차원으로 표현된 정교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기술이었다. 1995년 <토이 스토리>를 처음 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이들의 기술력이 뛰어나더라도 보다 생생한 묘사는 어려울 거라는 섣부른 예상도 했었다. 놀랍게도 <벅스 라이프> <토이 스토리2>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등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픽사의 묘사력은 더욱 정묘해졌고 질감은 더욱 풍부해졌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만약 <토이 스토리>에 우디와 버즈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주인에게 버림받는 장난감들에게 감정이입되지 않았다면, 신나고 가슴이 따뜻한 모험담이 없었다면 픽사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픽사의 영화가 진정으로 기억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 덕분이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노래에 몽타주되는 제시의 과거 이야기(<토이 스토리2>)나 설리와 부의 가슴아픈 이별(<몬스터 주식회사>), 아버지 말린과 니모의 마지막 해후(<니모를 찾아서>), 노인과 소년 사이의 각별한 우정(<업>)이 없었다면, 그 농도 진한 이야기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픽사의 영화는 쉽게 잊혀졌을지 모른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선 스필버그의 말이나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는 픽사의 창립자 존 래세터의 이야기처럼 테크놀로지는 영화에 영향을 끼친다. 단 거기까지다. 개인적으로 3D라는 화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한국영화계의 분위기가 걱정스럽다. 한때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한국영화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장점이 사라지고 있는 듯해 더욱 우려된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돼야 한다. 스필버그와 픽사가 주는 교훈은 바로 그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