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촉수는 늘 관계를 향해 있다. 부티크에서 일하는 여자와 매사가 잘 안 풀리는 남자의 동거생활을 통해 일상의 미묘한 균열을 포착했고(<M/Other>(1999)), 히로시마라는 도시와 감독의 내면의 관계가 충돌하면서 파생되는 감정을 다루기도 했다(<응시 혹은 2002년 히로시마>(2000), <H스토리>(2001)). <퍼펙트 커플>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유키와 니나> 역시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 영화다. 어른들의 세계를 그린 전작과 달리 처음으로 아이들의 세계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그리고 배우 이폴리트 지라르도와 함께 공동연출한 것도 차이라면 차이다. 영화는 부모가 이혼하면서 절친 니나(아리엘 무텔)와 헤어지게 된 유키(노에 삼피)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인 <유키와 니나>는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꼽은 ‘2009년 올해의 영화 베스트5’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7월10일 제12회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유키와 니나>를 상영한 스와 노부히로 감독을 만났다(국내개봉은 7월15일이다).
-한 사이트(http://www.ustream.tv/recorded/7674129)에서 당신이 현재 조케이대학에서 진행하고 있는 뉴다큐멘터리 수업 동영상을 봤다. 다큐멘터리적 장치들이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다루더라. 혼마 다카시라는 유명 사진작가와 함께 기획한 수업이다. 그나 나나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지만 동시에 저항감도 가지고 있다.
-저항감이라면 어떤 저항감인가. 다큐멘터리라도 정치·사회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싫다. 너무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영화는 단순한 메시지밖에 안된다.
-수업에서 <카모메 식당>의 음식 만드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요리프로그램의 전형적인 영상이 극영화에서 새롭게 기능한다”고 했고, 지아장커의 <공공장소>의 버스 안 풍경을 담아낸 장면을 보여주면서 “다큐멘터리지만 숏들이 극영화처럼 의도적으로 감정을 쌓아올린다”고 말했다. 그렇다. 리얼리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대상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리얼리티, 리얼리티적인 요소들, 인물과 사회와의 관계 등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퍼펙트 커플> 이후 4년 만의 장편 연출이다. 1년 동안의 프랑스 생활에 대한 리액션이 <퍼펙트 커플>이다. 이 영화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한 바퀴 돌고 원점에 선 작품이다.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팽창하기 위해 고민을 계속 했다. <유키와 니나>는 이미 착수한 상태고. 그러니까 거의 4년을 <유키와 니나>로 보낸 셈이다.
-당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나. 얻지 못했다. 사실 답을 구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음은 무슨 질문을 할까’가 중요하다.
-<퍼펙트 커플>을 만들고 나서 차기작은 “프랑스와 일본사회의 어떤 면모를 그릴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점에서 <유키와 니나>는 어떤 고민에서 나왔나. 지금까지 남녀 관계를 주로 다뤘다.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싶었다.
-역시 당신이 아버지라서 그런 건가. 혹시 아이 있나? (기자가 없다고 하자) 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어렸을 때 내가 했던 행동들을 아이를 통해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 있다. 이걸 언젠가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공동감독이자 배우 이폴리트 지라르도를 만났다. 그 역시 아버지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유키와 니나>를 함께 쓰고 연출하기로 했다.
-프로젝트의 어떤 면에서 공동연출이 필요했나. 개인적으로 톱 혹은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늘 공동성에 대한 꿈과 환상이 있다. 작업의 주체가 ‘나’가 아닌 ‘우리’가 되는 것이잖나. 사실 공동연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H스토리> 하기 전에 미국의 로버트 프레이머 감독과 히로시마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히로시마에서 촬영하는 서로의 모습을 찍는 내용이다. 그러나 진행 도중 로버트 프레이머가 죽으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촬영 초반은 이폴리트 지라르도가 혼자 준비했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함께하지 않은 이유는. 2008년부터 도쿄 조케이대학에서 학장을 맡는 바람에 바빠졌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 합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랭크인 직전에 프랑스에 도착했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배우 역시 두 감독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혼란이 있었고.
-역할 분담이 절실했겠다. 초반에는 프랑스인인 이폴리트가 배우 연기를, 내가 카메라를 맡았다. 그런데 일이 마음먹은 대로 나눠지지 않더라. 결국 매일 스탭들이 모이기전에 이폴리트와 통역과 함께 회의를 해야 했다.
-전작인 <H 스토리> <퍼펙트 게임>을 촬영한 카롤린 샹페티에(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아르노 데스플레생 등과 작업한 프랑스의 여성 촬영감독)와 이번에는 함께하지 않았다. 왠지 카롤린이 합류하면 같은 프랑스인인 이폴리트하고만 소통할 것 같더라. 그러면 두 사람의 작업이 되는 거지. 고립될까봐 두려워서 이번만큼은 카롤린과 함께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카롤린은 지금 삐쳐 있다. (웃음)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될 때마다 기준이 된 것은 주인공 유키다. 유키는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다. 현장에는 세명의 유키가 있었다. 나의 유키, 이폴리트의 유키, 그리고 노에의 유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노에의 유키다. 영화를 보면 노에가 매우 귀엽고 매력적인 아이인데, 촬영 당시 그 아이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어떤 점에서 어려웠나. (노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노에는 연기를 해본 경험도, 누군가에게 연기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다. 그럼에도 굉장히 열심히 하더라. 가령 화내는 장면에서 나름 심각하게 화를 낸다. 그러면 주위에서 “노에, 화난 것처럼 안 보여. 더 화를 내야지”라고 한다. (웃음) 노에는 한참 고민하다가 다시 화를 낸다. 그렇게 배워나갔다.
-전문배우라 생각될 만큼 연기를 잘하더라. 어떻게 캐스팅했나. 유키 역은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 혼혈인이어야 한다는 것. 둘째,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과연 그런 아이가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 오디션이 여름 바캉스 시즌에 열리기도 했고. 그럼에도 40여명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유키 역을 남자 애로 설정하려고 했는데 이내 그만뒀다. 두 감독 모두 남자라 아무래도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을 캐릭터에 투영할 것 같았다. 우리가 모르는 존재인 여자아이와 함께해보고 싶었다. 40명 중에서 유독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가 노에였다.
-반면 니나는 유키와 달리 매사가 적극적이다. 소극적인 노에 혼자 부모님의 이혼에 저항하기에는 힘이 부족해 보였다. 이 아이를 리드할 수 있는 적극적인 파트너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두 아이가 힘을 합쳐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배우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현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이들이 배우였다. 그 점에서 연기연출방식이 이전과 달랐을 것 같다. 성인 배우와 작업할 때는 서로 이해하면서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아이와 어른의 관계에서 이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더라.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극중에서 어른들이 더 아이 같고, 아이들이 더 어른처럼 보였다. 혹시 어렸을 때 어른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하지 않았나. ‘왜 저런 걸로 싸우지?’ 하면서. (웃음) 반면 어른들은 당장 살아가는 것 때문에 아이들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극중에서 유키의 엄마가 유키가 보낸 편지를 읽고 우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엄마가 먼저 울어서 유키는 울 수가 없다. 사실 정말 울고 싶은 건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래서 친구 니나를 두고 일본으로 가야 하는 유키인데 말이다. 그 장면은 NG컷이다. 따로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엄마 역을 맡은 배우가 울고 유키는 웃었다.
-그런 건가. 그 장면을 보고 정말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라고 생각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때 한 기자가 노에에게 “왜 웃었어?”라고 물었다. 대답은 “엄마가 울어서 화장이 지워지자 그게 너무 웃겼어요”라고 했다. (웃음)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적 순간은 언제 출현하는가’라는 주제로 강의하면 재미있겠다. 편집 과정에서 그 장면을 두고 격렬한 논의가 있었다. 이폴리트 감독은 ‘연기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고 봤다. 그러나 나는 노에의 행동이 중요한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울 때 웃으면 이상하다? 그건 어른들의 생각이잖아. 아이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하리라 봤다. 나중에 이폴리트가 납득해서 그 장면을 쓸 수 있었다.
-숲에서 헤매던 유키가 어디론가 나가자 일본의 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아무렇지 않게 지구 반대 공간으로 이동했다. 일종의 판타지다. 이 장면이 만화라면 그냥 일본을 그리면 된다. 하지만 영화는 모든 스탭들이 카메라를 들고 일본으로 가야 한다.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이중적으로 뒤틀려 있다. 하나는 유키가 극중에서 일본으로 공간을 건너뛴다는 것. 또 하나는 제작진이 그 장면을 위해 일본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유키가 일본 아이들과 집에서 노는 장면은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이라 들었다. 원래 계곡에서 땀 뻘뻘 흘러가며 몸 부딪혀가며 노는 장면으로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진행과정상 그렇게 찍지 못하고 집으로 대체했다.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는 분장실용으로 빌린 집이었다. 다만 집이 등장하면서 일본 색깔이 드러날까 걱정했다.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어쨌거나 집 장면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유키의 적극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다.
-숲에서 유키가 달리면서 니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내레이션은 영화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장면이다. 유키는 혼자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다. 말할 타이밍을 잘 놓치기도 하고. 숲에 홀로 남겨졌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현장에서 “니나에게 편지 쓰듯이 유키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래?” 정도로 노에에게 지시했는데, 혼자서 생각하고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말하더라. 놀라운 순간이었다.
-또 하나, 숲속 장면이 모두 낮이다. 유키와 니나가 숲에 들어간 시간이 오후였는데, 유키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낮이더라. 밤이 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하. (웃음) 정말 중요한 지적이다. 프랑스의 낮 시간이 유독 길다고만 해두자. (웃음)
-공동연출이라 편집이 힘들었을 것 같다. 두 사람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함께 있으면 대화로 풀면 되는데 아무래도…. 도중에 ‘확 그냥 일본영화로 만들어버릴까’ 싶었다. (웃음) 이폴리트에게 <유키와 니나>는 영화가 편집을 통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깨닫게 된 첫 번째 영화였다. 그만큼 욕심도 많았고 불안해했고.
-완성작을 보고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있고,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게 뭔가. 유키의 아빠가 술 먹고 유키에게 변명하는 장면. 이폴리트가 생각한 장면인데 나라면 그렇게 안 만들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말로 설명하려는 건 좋은 표현이 아닌 것 같다. 때로는 침묵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래서 그 장면은 이폴리트에게 맡기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고 나서 아이들을 좀 이해할 수 있겠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웃음) 어른들은 늘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 아이들의 생각은 무시당하고 있는 거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해하나 안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액션을 취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아직 계획이 없다. 당분간 학교에서 영화교육에 힘쓸 거다. 영화를 하나 찍는다는 건 영화 인생에 대한 리포트를 하나 제출하는 것 같다.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다음 리포트를 준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