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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미 데루요 ] “그의 영화는 구로사와 그 자체였지”
주성철 사진 백종헌 2010-07-20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원한 영화적 동지 노가미 데루요

만 82살의 고령임에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는 마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당장 현장으로 달려나갈 태세였다. 노가미 데루요는 <라쇼몽>(1950)을 시작으로 마지막 작품 <마다다요>(1993)에 이르기까지 구로사와의 수많은 대표작에서 스크립터이자 프로덕션 매니저, 혹은 프로듀서로 함께했다. 구로사와의 영화 현장에 없어서는 안될 여장부였다. 구로사와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노가미 여사를 두고 “나의 오른팔이자, 이 자서전을 쓰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 때문에 가장 고생했다”고 쓰고 있다. 오랜 세월 구로사와와 가장 가까웠던 영화적 동지가 바로 그녀다.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구로사와의 영화 속 인물들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도 하는가. 구로사와는 늘 본인을 투영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당시 환경과 고민에 따라 그의 영화에는 그 자신의 인생이 녹아 있다. 전체적으로는 <스가타 산시로>(1943), <붉은 수염>(1965), <마다다요> 등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다뤘다.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존경하고 성장하는 성장담으로서 데뷔작과 유작 모두가 그렇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구로사와의 영화에는 유독 비와 바람이 인상적이다. 야마다 요지는 우스갯소리로 “쇼치쿠의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도 솔솔 부는데, 구로사와의 도호 영화의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바람도 쌩쌩 분다”고 말한 적 있다. <7인의 사무라이> 때 소방차가 여러 대 동원됐고 호스를 드는 사람만 40여명이었다. 구로사와는 어중간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 바람 효과를 낼 때도 비행기 프로펠러 강풍기를 늘 2대씩 돌렸다. 다른 일본 감독들에 비해 비와 바람 모두 3배 정도 규모였다고 보면 된다.

<라쇼몽>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은 구로사와의 필모그래피에서 무척 중요한 분기점이자 아시아영화 전체로서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서구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해외영화제를 의식해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감독님도 나도 상당히 분노했다. 늘 옆에서 지켜봐서 알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는 늘 일본 사람들의 생생한 현실을 담고 싶어 했다. 국내 관객이건 해외 관객이건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고, 널리 통용되는 영화들은 그렇게 자신이 속한 환경에 대해 정직하게 묘사한 영화들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나 중국의 지아장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들에는 그 자체로 그 사회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모두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럼 구로사와가 평소 좋아했던 미국영화나 혹은 그런 영향관계를 느낄 만한 것들이 있는가. 미국영화라기보다는 존 포드를 무척 좋아했다. 아까 한 얘기와 연결짓자면 오즈 야스지로의 초창기 영화들이야말로 직접적으로 미국영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로사와 감독에게 서구적이라고 비판했던 사람 중에 당시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쇼몽>이 제작사도 감독도 모르는 상태에서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되고 관계자도 없어서 이탈리아에 사는 일본인이 대신 트로피를 받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그리고 <라쇼몽>은 구로사와가 평소 무성영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적용한 영화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의 이상심리와 충동을 빛과 그림자의 정교한 사용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작품이다.

<7인의 사무라이>는 감독과 배우, 스탭 모두 정말 오래도록 고생한 영화인데 그때 기억은 어떤가. 여러 채의 집이 불타는 대규모 화재신에서 마을 청년 ‘리키치’가 그 산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있는데, 불길에 휩싸여 천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감독님도 포기하고 컷을 외치고 소방차가 불을 끄기 시작했는데 리키치는 의도대로 연기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스탭들에게 미안하다며 통곡을 했다. 감독님은 괜찮다며 그를 위로했는데 나중에 보니 감독님도 한구석에서 그 큰 덩치로 혼자 울고 계셨다. 비용이나 일정상 다시 찍을 수 없는 장면이었기에 원하는 장면을 얻지 못해 무척 속상했을 거다.

만약 구로사와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다면 현재 일본영화계의 후배 감독 중 누구의 영화를 좋아했을 것 같나. 하하.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긴 한데,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 뭐라고 답해야 할지…. 음, 아마도 내 생각에 현재 일본 감독 중에 구로사와가 좋아할 만한 감독은 없는 것 같다.

구로사와와 40년 넘게 함께했고 마지막 순간도 함께했는데, 오로지 그하고만 영화 인생을 보낸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재밌으니까. 그거 하나다. 그의 영화와 현장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의 다른 동세대 남자감독들과 비교할 때 키도 크고 굉장히 매력적인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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