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얼굴을 보여드립니다.” 4월24일부터 5월1일까지 서울 압구정동 갤러리 LF에서 열리는 사진전 <한국영화의 얼굴-CINE F.A.N>은 비단 <씨네21> 창간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만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활력 넘치는 풍경이 없었다면 <씨네21>이 지난 15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또 지치지 않고 전력질주할 수 있었을까. <씨네21> 15주년 기념 사진전은 동반자로서 함께 달려왔던 한국영화에 감사하는 자리인 셈이다. 전시할 130여점의 다채로운 사진 중 촬영현장을 담은 15장을 일단 맛보기로 골랐다. 한국영화의 숨겨진 표정이 더 궁금하다면 직접 갤러리를 방문하시길. 사진전 수익금은 독립영화 전용관,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에 쓰일 예정이다.
<코르셋>(1996): 양말도 벗어야 예술이지
기념사진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요. 아니,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 소풍 사진을 찍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창립작 촬영을 끝내고 기쁜 마음에 훌러덩 벗은 이은 명필름 대표와 앙상한 체구를 큰 넥타이로 어떻게든 커버하려고 애쓴 고(故) 박광정과 <코르셋> 촬영을 위해 일부러 17kg이나 찌운 이혜은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그런데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이 기념사진은 아쉬움이 커요. 다 벗지 못했거든요. 이왕 벗겠다고 맘먹었으면 다 벗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속옷 말고 양말이요.
<은행나무 침대>(1996): 아랍왕자가 꽃미남이었네
<맨발의 기봉이>의 신현준만을 기억하는 10대 관객에겐 실로 충격적인 사진이 아닐 수 없네요. <은행나무 침대>의 황 장군 역을 맡은 신현준이 분장사의 정성스런 빗질을 채근하며 자신의 미모를 만끽 중이네요. 황 장군의 므흣한 미소가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자뻑은 아니었나 봅니다. 10여년 전 기사를 검색해보니 황 장군은 200명의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가을맞이 비련의 주인공’이라는 이색 설문조사에서 영화부문 으뜸 캐릭터로 뽑혔군요.
<낮은 목소리2>(1998): 할머니의 잔소리가 그리워
곁에 있지 않았지만 변영주 감독과 할머니들의 대화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참에 한번 재구성해봅시다. 변영주 감독이 이렇게 말합니다. “참외 좀 드시고 찍죠. 날도 더운데.” 할머니들은 곧바로 대꾸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영화는 언제 찍노. 나 죽기 전에 (영화) 실컷 찍어라!”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2>를 찍은 뒤 “내가 아니라 할머니들이 다큐멘터리를 찍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들의 의지는 곧 <낮은 목소리> 연작의 마지막인 <숨결> 제작으로 이어졌죠. 자, 다시 사진을 찬찬히 봅시다. 할머니들의 정겨운 타박이 이제 들리는지요.
<텔미썸딩>(1999): 돌아와요! 은하 언니
오랫동안 심은하를 볼 줄 알았습니다. <텔미썸딩>과 <인터뷰>의 심은하를 선배 기자가 가로채서(?) 인터뷰할 때도 다음 기회가 있을 줄 알고 땅을 안 쳤지요. 그런데 웬걸? 심은하는 갔습니다. 님은 영영 갔습니다. 사진을 보니 뒤늦은 회한이 다시 떠오르네요. ‘님’은 언제 돌아오시나이까. <텔미썸딩> 촬영장에서 영문 모를 그림만 그리고 있는 님을 보니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설마 이날 촬영장에서 10년 뒤 열게 될 동양화 전시회 준비를 하고 계시진 않았겠죠.
<무사>(2001): 대륙의 위엄을 간직한 남자
‘일상이 화보’라는 정우성이 중국 대륙으로 달려간 건 필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소주잔보다는 창이 어울리는 남자니까요. 태양도 미술감독 후팅샤오(<현 위의 인생> <패왕별희>)의 손길이 빚어낸 중국의 고성보다 정우성의 조각 같은 외모를 탐하네요. <무사> 촬영 중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를 당해 목발 신세를 져야 했지만, 정우성은 카메라 앞에 서면 창 들고 돌진하는 괴력을 선보였다는 후문. <무사> <중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호우시절>에 이어 <검우강호>까지, 이 정도면 중국 대륙에서 정우성에게 상이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복수는 나의 것>(2001): 태양을 바라며 피는 담배맛은?
이곳은 <복수는 나의 것> 촬영현장입니다. 멀리 빈 삼각대가 보이나요?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 신하균이 하늘을 보고 ‘멍’ 때리고 있네요.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하늘로 날아가버린 것일까요. 배두나는 이미 체념한 표정이에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촬영현장의 이 나른한 풍경, 모두 날씨 때문입니다. 사라진 건 카메라가 아니라 태양이지요. 담배 한대 피워 물 휴식 시간을 제공하는 건 좋았는데, 그렇다고 태양이 아예 사라져버리면 대략 난감이지요.
<선물>(2001): 피곤해! 졸려! 그래도 찍자
이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전날 밤샘 촬영이라도 했던 걸까요. 숲속엔 청량한 햇살이 가득한데, 이정재는 연방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쫙 찢어지는 걸 보니 전날의 피곤이 이만저만 아니었나 봅니다. 봤어도 봤다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지요. 지금이 딱 그 모양입니다. 이정재의 피곤을 못 본 척 <선물>의 스탭들은 무표정으로 카메라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저 기다란 줄자로 이정재의 입 크기를 재보고 싶은 묘한 충동이 이는군요.
<세이예스>(2001): 잘 봐! 이렇게 하란 말이야
타격 부진으로 기아 타이거즈 선수들이 시즌 초반 허덕이고 있습니다. 타격 침체에 일본에서 타격 인스트럭터까지 데려왔습니다. 기아 타자들은 일본 인스트럭터의 지도 아래 급기야 싸리 빗자루로 배팅 연습을 하고 있다네요. 배트보다 무거운 싸리 빗자루로 스윙을 하면 하체의 타격 밸런스를 찾기가 용이하다나요. 어때요. 이참에 박중훈식 목발 특타 연습! “두산 팬이라는” 박중훈의 간결한 스윙, 천하일품이지요. 유비통신에 따르면, 타율 높은 두산 김현수도 박중훈으로부터 목발 특타를 받았답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방위병 감독님 주특기는 권총 관리?
‘총이란 말이지, 자고로 이렇게 쏴야 맛이거든.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말이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장선우 감독이 ‘600만불의 소녀’ 임은경에게 권총 쏘는 시범을 보이고 있네요. 당시 몸무게 39kg의 가녀린 소녀였던 임은경양은 콜트와 베레타는 물론이고 3kg짜리 기관총을 들고 촬영장을 뛰어다녀야 했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시고니 위버가 되고 싶다”는 오랜 소망이 없었다면 고된 행군을 중도 포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잠깐. 장선우 감독의 이력을 살펴보니 방위병 출신이군요. “감독님, 방위가 권총 쏘는 시절도 있었나요?”
<오아시스>(2002): 오아시스의 삼위일체
연기라면 혼도 판다는 <오아시스>파가 동대문을 접수했네요. ‘오아시스’파는 배우의 감정이 늘어지면 포도당을 강제로 주입하는 ‘변태’ 이창동 감독, 다섯달 동안 장애인 연기를 하느라 골반이 틀어진 악바리 문소리, 또라이 연기하느라 하마터면 정신줄 놓을 뻔했다는 설경구, 이렇게 3인1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1990년대 결성된 조직으로, 한때 과거 상처를 되살리는 ‘박하사탕’을 국내 밀반입해 물의를 일으켰죠. 서울 도심의 러시아워를 뚫고 ‘오아시스’ 시추를 벌이던 이들 일당은 그해 바다 건너 베니스까지 진출해 코쟁이들의 마음까지 훔쳤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3): 헉! 누구세요?
누가 보면 숯불갈비 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들인 줄 알겠습니다. 경남 합천의 황매산에서 만난 장동건과 원빈은 흡사 형제 고학생의 느낌이었지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장을 방문했던 날은 태풍 매미의 기습으로 무너진 세트를 복구하던 여름날이었습니다. 3억5천만원의 피해를 입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지요. 그저 밤낮없이 밀린 촬영을 강행하는 수밖에요. 그랬으니 세수할 시간이 있었겠어요. 홍경표 촬영감독 왈, “대구에 가끔 옷 사러가면 다들 물어봐. 산에서 내려왔냐고. 새카맣거든”.
<털>(2004): 그 털 참 복스럽구만
“가슴에 털이 참 많네.”“감독님, 턱에 제 털 좀 붙여드릴까요?” 장준환 감독과 신하균의 <털> 집착은 원시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아닐까 의심되는군요. 감독과 배우가 촬영현장에서 상대의 털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죠. 주인공들이야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결과물은 코믹에 가깝네요. 어쨌거나 지구를 지키기 위해선 ‘털’이 필요하다는 걸까요. 하긴, 우린 모두 손오공의 후예들이죠.
<늑대의 유혹>(2004): 강동원의 풋풋한 꽃미남 시절
여고생들의 ‘끼약’ 소리 끊이지 않는 촬영현장이 있었습니다. <늑대의 유혹>이었지요. 일요일인데도 휴일을 반납하고 단역 출연을 자청한 50여명의 여고생들은 잠깐이라도 짬이 나면 강동원, 조한선 두 꽃남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토바이에 슬쩍 걸쳐 앉은 강동원이 좀더 여유로워 보이죠? 조한선은 <늑대의 유혹>이 데뷔작이었던 반면, 강동원은 이미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 출연한 상태였습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고추총각선발대회’에 나간 강동원은 좀 ‘안습’이었죠.
<인어공주>(2004): 공주님이 춥다고 하신다~ 어서 따뜻한 물을
1박2일 멤버들이 사시사철 입수 전문이라지만 아직 멀었어요. 남정네들의 호들갑은 11월 우도의 찬바람 맞으며 한 시간 넘게 물속에서 버텨냈던 ‘인어공주’의 끈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죠. 촬영 중간 빨간 드럼통을 간이사우나 삼아 촬영을 끝냈다는데, 얼마나 추웠으면 전도연은 물통 안에 담요까지 끌고 들어갔을까요. 고생 끝에 낙이 오면 좋으련만. 정작 이날 우도 촬영분은 물속이 탁해서 결국 쓰지 못했고, 제작진은 수중촬영을 위해 필리핀의 세부 섬까지 날아가야 했답니다. 세부의 바다에선 해파리가 인어공주의 다리를 쏘아댔다는군요.
<수>(2007): 자, 찍습니다~ 잘 좀 찍어봐요~
박찬욱 감독이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대담에 앞서 최양일 감독을 찍었습니다. 셔터 소리가 좋았나봅니다. 최양일 감독이 카메라를 빌렸습니다. 그러고는 박찬욱 감독을 찍었습니다. 특이한 감독들의 특이한 인사법입니다(영화 스타일만 놓고 보면 주먹을 주고받는 게 더 어울릴 듯하지만). <수> 개봉을 앞두고 대담에 흔쾌히 나선 박찬욱 감독과 한국을 찾아 <수>를 찍은 최양일 감독의 흥미진진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한국영화의 얼굴: CINE F.A.N 사진전>
일시: 2010년 4월24일~5월1일 시간: 오전10시~오후8시 장소: Gallery LF 입장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