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영화감독들과 지금 시대의 영화감독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숙련도에 있다. 1년에 7~8편을 만들어내던 시기의 감독들이 3~4년에 한편을 만드는 시대의 감독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할리우드의 존 포드가 100편을 자랑한다지만, 한국에는 김수용이 있다. 그는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하여 1999년 <침향>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11편을 만든 고영남을 제외하면 한국 감독 중 최다의 기록이다. 1967년 한해에만 10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니, 그 생산성은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장인과 예술가들이 명멸했던 1960~7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굳이 5대 감독을 들라면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이만희, 그리고 김수용이 거론된다. 그들 각각은 차이가 있다. 유현목은 철학자다. 그의 영화의 주제는 심오하고 지적이며 종교적이다. 신상옥은 장인이다. 그의 영화들은 형식의 파격은 없으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와 안정감이 느껴진다. 고전적 리얼리즘의 틀 안에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능숙하게 펼쳐놓곤 했다. 김기영은 압도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세계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창적이며 기괴하다. 이만희는 천재적이다. 김기영만큼 기괴하지 않고, 신상옥만큼 웰메이드는 아니지만 익숙한 장르의 외피에 그만의 낯선 세계를 끼워넣음으로써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김수용은? 재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영화를 만들었고 그 속에는 당연하게도 걸작과 태작이 섞여 있다(대체로는 고르게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이러한 이질적인 편차는 그를 ‘거장’으로 부르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에게 ‘거장’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더 있다. 그의 영화의 밝고 낙관적인 기운 때문이다. 본인은 초기의 코미디 영화경력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지만, 나는 그 코미디적 정서가 김수용 영화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까치소리>나 <토지>와 같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무리 심각한 영화에서라도 일상의 디테일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세속적이고 평범하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과 도덕에 따라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파열음들로 영화가 진행된다. 그는 인위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착취하지 않으며, 엄청난 운명의 힘 앞에 등장인물들을 던져놓는 거창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앞의 네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것이 장르영화건 아니건 어느 순간 줄거리와 명시적인 주제의식을 넘어서는 일종의 영화적 초월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영화를 위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김수용 영화의 세계는 언제나 현실의 일부이다. 그의 영화는 위대하지 않다. 그의 세계는 낮고 범속한(요즘말로 하자면 ‘찌질한’) 세계다. 어둡고,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담긴 영화만이 걸작이라 평가받았던 한국영화사의 전통 속에서 김수용 영화의 이런 특징은 과거 그가 다소 박한 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거장과 걸작에 대한 환상이 지워진 지금, 김수용은 그 어떤 감독들보다 다시 발견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 영화 속에 본인의 사람됨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감독들이 있다. 김수용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다정하겠구나, 똑똑하겠구나, 긍정적이겠구나, 합리적이겠구나, 타협적이겠구나, 모범생이었겠구나, 세속적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의 영화만큼 그는 속물적이리라.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속물성에 한편으로는 만족하면서도, 예술가로서는 마음속 깊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리라. 나는 그의 이 세속성이 좋다.
걸작부터 실험작까지 6편의 추천작
<혈맥>(1963) <혈맥>을 보면 <오발탄>에 비해 무엇이 못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김수용 초기 영화세계의 걸작이다. 이 영화가 <오발탄>에 비해 저평가받은 이유는 김수용과 유현목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오발탄>이 당대 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그리고 비관적으로 다룬 데 비해 <혈맥>은 해방 공간 하층민들을 배경으로 회고적이고 낙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1960년대 초의 상황이 해방공간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당시의 문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전달한다.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으로 생선을 발라먹는 어리석은 듯 교활한 조미령의 연기는 최고다. 필름의 일부가 없고 손상이 심해 공개 상영이 쉽지 않은 작품이라 기회가 있을 때 봐두는 것이 좋다.
<안개>(1967) 많은 소설들을 영화로 만든, 문예영화 대표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감독이지만 <안개>는 그야말로 김수용다운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 ‘아, 김수용은 김승옥을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김승옥의 넘치는 재능, 그 끼를 주체하지 못해 순수문학 대신 대중영화로 뛰어들었던 행로가 보여주는 세속성, 풍속가적 기질, 현대적이고 댄디한 감수성은 김수용에(그리고 <안개>의 주인공 윤기준에) 거의 그대로 겹쳐진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자기 반영적인 영화다. 전례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수용은 이 자기 반영성을 너무나 뻔뻔하고 재기 넘치며 풍부하게 그려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의 충무로를 거의 완벽하게 시각적으로 복원한다. 그가 왜 훌륭한 감독이자 풍속가인지를 알게 해주는 영화.
<산불>(1967) 줄거리만 놓고 보면 ‘토속 에로티시즘’의 원조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 전면적으로 전쟁의 비극, 출병한 남성들과 후방에 남겨진 여성들 사이의 긴장과 간극을 잘 드러낸 영화도 드물다. 남성들은 차라리 ‘나라와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후방의 여성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수십년간 함께 살아온 이웃 주민들과 의심과 적의에 찬, 그러면서도 우의와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갯마을>의 여성 연대보다 훨씬 깊고 현실적인 자매애가 그려진다. 주증녀와 도금봉의 연기는 <혈맥>의 조미령만큼이나 생생하고 육체적이며 활기에 차 있다.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김수용 필모그래피의 후기작에 해당하는 두 영화는 그의 새로운 미학적 모색의 산물이다. 환상과 이중·삼중인화, 어지러운 교차편집이 난무하는 거의 실험영화에 가까운 작품들. 미학적 야심이 두드러져 균형감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 한국영화의 실험적 시도가 어느 정도까지 갔었나를 확인하려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