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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사 파도 타고 부산으로 가요
이영진 2010-03-17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3월19일부터 ‘월드시네마Ⅶ’, <아나타한>은 국내 첫 상영

시네마테크 부산이 세계영화사를 수놓은 걸작 25편을 상영한다. 3월19일부터 4월25일까지 계속되는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월드시네마Ⅶ’은 성스러운 향연이라 부름직하다. 시네마테크 부산의 특별기획전 ‘월드시네마’는 2004년부터 시작해 지난해까지 116편의 작품을 소개해왔는데, 작가 중심의 프로그램과 달리 세계영화사의 흐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일곱 번째 행사를 치르는 시네마테크 부산이 첫손에 꼽는 영화는 <학이 난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아나타한> <0번> 등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학이 난다>(1957)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가 등장하지만, 로맨스나 이념 대신 광포한 전쟁의 한가운데로 보는 이를 인도한다. 특히 현기증 이는 세르게이 우르세프스키의 카메라는 지옥 같은 현실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학이 난다>가 옛 소련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영화였다면,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는 할리우드영화의 독식을 저지했던 프랑스영화의 방어선이었다. 어이없는 우연으로 세상의 이치를 일찍 깨우친 소년이 돈 많은 사기꾼이 된다는 줄거리의 영화로, ‘입담 좋은’ 파리지앵의 익살이 넘쳐난다.

천재와 문제아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조셉 폰 스턴버그의 <아나타한>(1953)은 국내에서 첫 상영된다. <푸른천사>를 시작으로 마를렌 디트리히와 단짝을 이루며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조셉 폰 스턴버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일본에서 제작됐다. 태평양 전쟁 중 아나타한 섬에 표류하게 된 12명의 남자는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벌인다. 종전 뒤에도 7년 동안 30명의 남자들과 섬에서 지낸 ‘여왕벌’ 히가 가즈코의 실화를 모티브 삼았다. 조셉 폰 스턴버그는 이 영화에 ‘실망’을 표했지만, 후일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동안 프린트가 망실됐다 2003년에야 다시 발견된 탓에 상영기회가 많지 않았던 장 으스타슈 감독의 다큐멘터리 <0번>도 이번에 소개된다. 자신의 외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해 탐색하는 <0번>은 감독이 완성 뒤 공개하지 않고 몇몇 친구들에게만 보여줬을 정도로 내밀한 기록이다.

1960년대 새로운 물결이라는 기치 아래 금기와 관습에 도전했던 문제작들도 함께 상영된다. 글라우버 로샤의 <검은 신, 하얀 악마>(1964)는 “굶주리는 자들에게 폭력은 일상적인 행위”임을 각인시켜주는, 시네마노보 운동의 선두 격인 작품이다. 브라질에 글라우버 로샤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있었다. <테오라마>(1968)에서 파졸리니는 한 부르주아 가정을 내파하며 주어진 세계를 전복하려 한다. 성과 정치의 억압적 금기를 뛰어넘으려 한다는 점에서 두산 마카베예프의 <W.R: 유기체의 신비> 또한 챙겨볼 영화다. 이 밖에 쇼치쿠 누벨바그의 대표 격인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1968), 로저 코먼 사단의 일원이었던 몬티 헬먼의 <복수의 총성>(1967)에서도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0), 오토 프레밍거의 <로라>(1944), 나루세 미키오의 <오누이>(1953), 자크 베케르의 <구멍>(1960),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 등이 연이어 상영되는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월드시네마Ⅶ’에선 관객의 영화 이해를 돕기 위한 각종 해설 프로그램들도 마련되어 있다. 강소원, 김남석, 김무규, 박인호 등 부산 지역 영화학과 교수 및 평론가들은 구스 반 산트의 <제리>(2002), 로버트 알트먼의 <긴 이별>(1973) 등이 상영된 뒤 작품 해설을 제공할 예정이다. 한편 칼 드레이어의 작품 6편을 상영하는 ‘포커스 온 드레이어’에도 해설 프로그램이 곁들여져 있다. 4월3일 <게르트루드>(1964) 상영 뒤엔 정성일 평론가가 ‘드레이어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해설을 진행한다. 특별기획전이 열리는 동안 김의석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교수는 강좌를 개설해, 로베르 브레송,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의 작품과의 비교분석을 통한, 칼 드레이어의 영화세계를 집중적으로 파헤칠 계획이다(문의: 051-742-5377, cinema.piff.org).

영혼의 번역자, 그의 열정을 느끼다

‘월드시네마Ⅶ’ 중 칼 드레이어의 작품 상영하는 ‘포커스 온 드레이어’… 정성일 평론가 해설도

“그는 자연주의자보다 자연에 대해 잘 안다. 그리고 그는 인류학자보다 인간에 대해 잘 안다.” 장 르누아르는 동시대 감독이었던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1889∼1968)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통찰력을 지닌 예술가라는 헌사를 바쳤다. “눈이 쌓인 가지가 떨어질 때, 나무의 고통을 아는”, “봄비가 내릴 때, 나무가 느끼는 스릴을 아는” 그에 대해 또 다른 거장 마뇰 드 올리베이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심오함에 대해,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답이 없는 것에 대해 그는 탐구했고, 우리는 그를 찬미한다.” 앙드레 바쟁이 칼 드레이어를 ‘영혼의 번역자’라고 명명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시네마테크 부산이 마련한 ‘포커스 온 드레이어’에선 평생 단독자(單獨者)로서 진실과 직접 대면하려 했던 북구의 영화철학자 칼 드레이어의 ‘열정’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집 안의 주인> 출연 요하네스 마이어, 아스트리드 홀름, 카린 넬레모즈/1925년/115분

1920년대 유럽영화의 거대한 지축이었던 제작자 에리히 포머와 결별한 드레이어가 덴마크로 돌아와 만든 첫 번째 영화. 아내를 수족처럼 부리는 빅토르, 남편의 폭력 앞에 묵묵히 순종하는 이다, 빅토르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맘먹은 늙은 유모 카렌이 주인공이다. 좁은 집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구성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드레이어는 인물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감정들을 뽑아내 극대화함으로써 긴장을 생성한다. 드레이어의 후기작에선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유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무성영화. 특히 빅토르가 코흘리개 아이처럼 벽을 보고 반성하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진다.

<잔 다르크의 수난> 출연 르네 팔코네티/1927년/82분

<집 안의 주인>의 성공은 드레이어를 프랑스로 향하게 만든다. 자신이 내놓은 프로젝트를 프랑스 제작자들이 결정하지 못하자 제비뽑기로 결국 잔 다르크가 결정됐다고 드레이어는 훗날 말했다. 드레이어에 대한 자본의 믿음은 그러나 엄청난 실망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스펙터클을 기대했으나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아무리 탐험해도 물리지 않는 대륙”인 ‘인간의 얼굴’에 맞춰져 있었다. “이후 40년 동안 간신히 5편의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잔 다르크의 수난> 때문이다. 영국군의 포로가 된 잔 다르크가 마녀재판의 단두대에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하루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영화. 클로즈업만으로 숭고한 서사를 완성한다.

<뱀파이어> 출연 니콜라스 드 군츠버그, 앙리에트 제라르/1932년/70분

데이비드 그레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여행 중 한 여인숙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괴이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숙소의 주인인 노파가 고대의 뱀파이어였음을 알게 된다. 드레이어의 첫 번째 유성영화로, 개봉 당시 <잔 다르크의 수난>에 버금가는 비난을 들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고정불변의 시점과 연속성이라는 서사의 관습”을 모조리 무너뜨린 이 ‘시적’ 영상은 불안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모호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영(靈)과 육(肉의)이 분리되는 악몽을 경험하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영화. 공포영화의 거장 마리오 바바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뽑은 공포영화.

<분노의 날> 출연 토킬드 루스, 리스베트 모빈, 지그리드 네이엔담/1943년/97분

“사실 위대한 드라마들은 조용하게 펼쳐지는 게 아닐까?” ‘사건이 요청하지도 않은 리듬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제된’ 영화들은 무성영화의 유산이라고 여겼던 드레이어는 <분노의 날>에서 유성영화에 ‘걸맞은’ 느린 카메라워킹으로 부유한 목사 집안에 도사리고 있는 ‘긴장감과 사무친 불만’을 조심스럽게 도려낸다. 젊은 아내가 목사인 남편이 전처와 사이에서 낳은 건장한 아들을 탐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이지만, 인물들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털어놓지 않고 수많은 빛과 그림자의 오브제를 통해 금기와 욕망의 결을 풍부하게 드러낸다. 전작들의 실패 뒤 카메라를 놓고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드레이어가 12년 만에 침묵을 깨고 내놓은 작품.

<오데트> 출연 헨릭 말버그, 에밀 하스 크리스텐센/1954년/125분

농부 보르겐은, 삶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믿고 있지만 정작 그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큰아들은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고, 둘째아들은 믿음이 넘쳐 정신을 놓았고, 막내아들은 믿음이 다른 집안의 딸과 결혼하려 든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서 유일하게 보르겐을 이해하는 이는 첫째며느리 잉거다. 그러나 잉거 또한 출산 도중 숨을 거두자 보르겐은 실의에 빠진다. 드레이어 영화의 특징으로 자주 거론되는 회화적인 화면 구성이 <오데트>에선 극한에 다다른다. 보르겐이 막내아들과 함께 종교가 다른 재봉사 페터의 집에 들르는 장면에서 인물들은 무표정만으로도 공간의 냉랭한 공기를 전달한다. 믿음이 기적을 불러오는 마법의 순간 또한 놓쳐서는 안될 명장면이다.

<게르트루드> 출연 니나 펜스 로데, 벤트 로테/1964년/117분

‘소파와 피아노에 관한 2시간짜리 연구’라는 개봉 당시 비난은, <게르트루드>가 드레이어에게 궁극의 영화였다는 훗날의 찬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잠깐 동안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얼핏 보면 게르투루드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과거 남성편력에 대한 지루하고 통속적인 기술처럼 보이지만, 드레이어는 그 안에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이념을 좇는 여인의 모습을 망토처럼 둘러놓는다. 허상을 좇는 듯한 게르트루드의 이기적인 욕망이 실존을 위한 전제임을 일러준, 우아한 단독자 드레이어는 <게르트루드>를 완성하고 4년 뒤 삶 저편으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