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이랬다. 마지막 회이고 하니 같이 영화를 본다. 나란히 앉아 영화 한편을 감상한 다음에(그러고 보니 같이 영화 본 지도 꽤 오래됐구나) 근처의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 마시며 영화에 대해 토론하다가 토론이 깊어지면 술을 마시러 간다. 술자리에서는 주로 한국영화의 미래와 영화 <아바타>로 인해 제기된 극장산업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계획은 그랬다.
만났지만, 함께 볼 영화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친구사이?>를 볼 수는 없고, 남녀가 연애하다가 ‘깨지는’ <500일의 썸머>를 보기도 그렇고, <전우치>는 내가 이미 봤고, <아바타>도 내가 이미 봤고, 그렇다면 <페어러브>는? 그거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라던데, 그것도 좀 그렇고,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주유소를 습격하기도 그렇고, 남는 건 결국 <파워 레인저 극장판: 엔진포스 VS 와일드 시피릿>뿐인데…. 그러면 못다 한 이야기나 하지 뭐. DVD의 스페셜 피처 같은 건가? 그렇지, 삭제장면도 들어 있고, 감독과 배우의 코멘터리도 있고, 결말이 전혀 다른 감독판도 부록으로 끼워주는, 뭐, 그런 거. 그래, 그거 좋다.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김중혁)
<스페셜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왜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는가?
지난해 이 칼럼을 시작하면서 나는 스페인 말라가의 춥고 외로운 밤들에 대해서 썼다. 하도 외롭고 심심해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또 봤다고. 얼마 전 우연히 김상경씨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말라가 산카탈리나 거리에 위치한 그 빌라의 뒷방이 떠올랐다. 그 방에서 <극장전>을 본 것이다. 요즘 국가대표 축구팀이 말라가에 가서 훈련 중인데, 뉴스에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라고 말라가를 소개할 때마다 적잖이 속이 쓰리다. 내게 말라가라면 소파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야,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 정말 좋겠다”라거나 “친구들하고 술 취해서 떠들고 놀면 꼭 저런 꼴 나지”라며 혼자 낄낄대던 기억뿐이니까. 첫회에서 말라가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고도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다. 그러니까 쓸 게 하나도 없는 위기 상황이 닥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한 일을 쓰면서 한회를 때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미리 복선을 깐 것이지. 하지만 이 치밀하고도 완벽한 계획은 <씨네21> 강병진 기자의 전화 한통으로 깨져버렸다. 호시탐탐 대충 한회를 때우려는 기회를 노리던 지난해 5월,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사회에 가기 위해 3호선 전철을 탔다. 지축을 지날 즈음, 한참 졸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하면서 강병진 기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하하하, 제가 무슨 배우라도 되나요?” 비몽사몽 내가 대범하게 말했다. “다른 배우들도 다 했어요.” 음, 그렇다면…. “그럼, 하시죠.”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이 영화에서 강간범으로 나오잖아요….” 잠깐만, 잠깐만. “제가 강간범이라고요?” 큰 소리로 내가 되물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지하철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 영화에 제가 그렇게 나옵니까?” 그렇게 수습하려고 했으나, 내 얼굴을 본 승객은 “영화라면 에로영화?”, 이런 표정이었다. 해서 배우로서의 삶과 관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단 하나.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습니다. ㅠ.ㅠ” 그렇게 한회 분량을 때우려던 내 계획도 무산됐다. (김연수)
<스페셜2> 비하인드 스토리 전도연씨, 좋아합니다!
<여배우들>을 보고 난 뒤에 쓴 칼럼에서 여성지 기자 시절 전도연씨와의 에피소드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는 말로 글을 끝맺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고 혼자 생각한다. 로맨스 같은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리라고 혼자 추측한다. 미처 말하지 못했던 사연을 여기 공개한다. 그러니까 잡지사 기자 시절, 편집장께서 더위를 먹었는지 한국의 대표적인 배우 20명인지 30명인지를 모두 인터뷰하는, 말하자면 양으로 승부하려는 기획을 내놓으신 것이다. 기자 1인당 4명 정도를 인터뷰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다들 유명한 배우들인 데 비해 분량은 7매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섭외하는 것도 힘든데, 7매짜리 인터뷰를 하는 건 더 힘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저 상처 입은 짐승들에 불과했다고. 울부짖으며 촬영장에 쫓아가서, 매니저를 졸라서, 인터뷰를 땄다. 전도연씨도 내가 맡은 배우 중 하나였다.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겨우 전화 인터뷰를 잡았다. 마감이 코앞이라 여기저기 키보드 소리만 들리던 어느 밤, 내 책상 전화벨이 울렸다. 전도연씨가 차량으로 이동 중인데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있다고 매니저가 말했다. 그건 무슨 전화였는지, 휴대폰이었는지 시티폰이었는지 카폰이었는지, 아니면 내쪽의 전화가 잘못됐는지, 차량이동 중이어서 그런지 전도연씨의 목소리는 화성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한쪽 귀를 손으로 막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대답을 들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7매 분량만 따면 된다는 일념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7매 분량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연씨가 너무나 열심히 계속 내게 뭔가를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말이 끊어질 때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연씨도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얘기 시작. 해서 눈치를 보다가 조금 더 크게 얘기했다. “잘 들었다고요. 인터뷰 다 끝났습니다.” 전도연씨가 되물었다.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잘 들릴 수 있도록 내가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제 그만 얘기하셔도 된다고요! 인터뷰할 거 다 했다고요!” 그렇게 전도연씨가 전화를 끊었다. 일방적으로 이별통보를 한, 뭐, 그런 느낌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전화를 끊고 나자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마감하고 있던 기자들이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멀리서 편집장이 나를 불렀다. “너, 인터뷰를 항상 그렇게 하냐?”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전도연씨라고 하면 그렇게 열심히 내게 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김연수)
<스페셜3> 작가들의 말 영화를 보면서 보낸 1년
나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글을 쓴다. 비판하려고 글을 쓰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나만 알았으면 싶은 책이나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쓴다. 영화에 대한 글이라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씨네21>에 연재하는 동안, 2주일에 한번씩은 꼭 개봉영화를 봤다. 글을 써야만 했으니까. 나는 그게 어떤 영화든 본 영화로 글을 썼다. 어떨 때는 시작하자마자, 왜 이런 영화를 선택했을까 후회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도 그 영화를 소재로 글을 썼다. 그러자면 그런 영화에도 좋은 점은 있다고 생각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좋은 점을 찾았다. 실패한 경우, 그러니까 아무리 좋아해보려고 해도 좋아질 수 없었던 건 두번이었다. 그 밖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좋은 점을 찾아냈다. 심지어 만화영화 <초코초코 대작전>에서도. 연재가 끝난 뒤에도 이렇게 영화를 열심히 볼까? 그럴 것 같진 않다. 그럼 나의 영화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To be continued…. (김연수)
나도 할 말이 많은데, 김연수군이 이렇게 많은 분량을 써버렸으니, 저, 편집장님, 지면을 조금만 더…, 네, 아무래도, 안되겠죠, 알겠습니다.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끝나는군요. (김중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