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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 안 귀엽고 싶었어요
이화정 사진 이혜정 2009-09-21

<애자>로 연기 사춘기 통과한 최강희

만일 최강희였다면 가장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 최강희가 정통 멜로드라마 <애자>에 도전한다. 아픈 엄마를 병수발하며 눈물 펑펑 쏟는 딸 애자로 최강희가 현실에 안착했다. 늘 여행갈 것 같은, 공상을 할 것 같은, 아무런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수식어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말간 얼굴로 그녀가 ‘엄마’를 떠나보낸다. 애자의 가슴 아픈 성장을 겪는 동안, 배우 최강희도 부쩍 자랐다.

“이번엔 드레스다운 드레스를 입어보려고 해요.” 최강희가 앞으로 자신의 변화를 예고라도 하듯, 복장에 대한 규정을 내린다. 마침 커버 촬영 컨셉으로 제시된 무려 세벌의 드레스를 갈아치운 참이었다. 제법 격식이 차려진 시상식에서조차 여배우들이 즐겨하는 우아한 드레스를 마다하고 히피풍의 맘 내키는 복장으로 일관하던 최강희였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드레스는 잘 안 어울리더라고요. 남의 옷 입는 것 같을 바에는 그냥 나라도 편한 옷을 입자, 그런 마음이 컸죠.”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가 드레스에 대한 결심을 드러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올해부터 저 배우가 되고 싶단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차림새도 배우처럼 해보자 싶었죠.”

연기자가 ‘저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판에 박힌 인터뷰 멘트임을 의심해 봐야 한다. 직업인으로 한몸 불사르겠다는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대략 근사하지만, 도달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빈말일 가능성이 크다. 많은 이들이 ‘배우’가 되기 전, ‘연예인’으로의 풍족을 누리고 있고, 별다른 자의식 없이도 잘 살아간다. 이게 또 사람 미치게 하는 게 배우의 길엔 누구처럼 20kg을 빼야 한다거나, 아니면 메소드 연기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놔야 한다는 식의 기준점이 없다는 거다. 누구나 앤서니 홉킨스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관객이 모든 배우에게 그런 연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고생한 모든 나날이 수포로 돌아갈 확률 0%의 싸움. 그런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무려 15년 차의 ‘배우’ 경력을 쌓은 최강희가 지금 그 ‘배우’에 도전한다.

<애자>에서 아픈 엄마를 둔 철부지 딸 애자를 연기한 최강희는 <애자>를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 규정한다. “그동안은 뭐랄까, 애와 어른 사이. 배우와 연예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연기를 하고 난 뒤 감동도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무진장 긴장해서 연기했고, 그리고 제가 기대했던 부분에 대한 반응이 오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죠.” 화색이 만연한 그녀의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직접 봤다면 아마 이 말의 신빙성은 배가 됐을 것이다. 최강희는 그만큼 열렬하게 배우에 대해 토로하고 나선다. “오죽하면 저희 엄마는 시사를 봤는데도, 영화가 기억이 잘 안 난대요. 찍으면서 제가 링거 맞고, 약 먹고, 옆에 사람 괴롭히는 거 지켜보셨으니까 긴장해서 장면이 안 들어오더라는 거죠.” 연기가 별로면 가차없이 극장을 나가던 매몰찬 친구들까지 <애자>에는 번쩍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친한 배우 친구인 류현경이 영화 보고 나서 그러더라고요. 언니 이제 진짜 배우가 된 것 같아요.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던지. (웃음)”

선택부터 <애자>는 아예 작정하고 나선 길이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연기 중 하나가 애자 같은 캐릭터였어요. 늘 피하던 연기였죠. 그런데 제3자가 되어서 보니 ‘최강희가 해도 어느 정도 괜찮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건 다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한번 해보자 했죠.” 말마따나 최강희는 장르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배우였다. <여고괴담>으로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고 하지만, 그녀의 출연작들에선 늘 장르를 벗어난 ‘최강희식’ 캐릭터가 존재했다. <와니와 준하>에서 두 연인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소녀 ‘소양’에게서, <달콤, 살벌한 연인>의 끔찍한 살인마 ‘미나’에게서, 또 <내사랑>의 규정하기 힘든 몽상가 ‘주원’에게서도 빠짐없이 ‘최강희’가 존재했다. 그런데 애자는 그 최강희를 가차없이 쏙 빼버린다. “어느 날 친한 작가분들이 ‘강희는 뭘 해도 귀엽잖아’하시더라고요. 말에 뼈가 있는 거죠. 그래서 애자만큼은 안 귀엽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나를 보지 않게 하자 싶었어요. 다들 이 영화 보고 최강희가 싫어지더라도, 뾰족뾰족하고 애매한 20대 후반의 그냥 여자. 그 애자가 되고 싶었어요.”

최강희의 성장은 이미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의 ‘오은수’에서 시작됐다. 늘어나는 주름을 걱정하고 이성적으로 어필할 요소들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하는 나이, 서른살 오은수의 걱정거리는 또래 연기자 최강희의 그것과 묘하게 겹쳤다. “<달콤한 나의 도시> 하면서부터 ‘연기 사춘기’가 시작됐어요. 어떻게 하면 잘할까, 진심의 연기를 할까, 관객에게 쓸모있는 연기를 할까. 그런 원론적인 질문에 부딪힌 거죠. <애자> 하면서 크게 한번 막힌 적이 있는데 그때 혼자 별 생각 다했어요. 스카프를 팔까, 뭐 이런 생각들. 그래도 그건 안되겠더라고요.”

‘최강동안’과 ‘4차원’이라는 수식에도 최강희는 방송에 나와 어린 후배 이연희의 싱그러움이 예뻐 보인다며 부러워할 줄 아는, 그녀를 둘러싼 수식어 밖의 자연인이다. “제일 겁냈던 연기를 하나 끝냈으니, 이젠 두 번째로 겁내는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그건 철두철미하고 지적인 여성이라고 한다. 지금, 연기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한 뒤 격식을 갖춘 슈트 차림의 최강희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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