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 문화는 섬광 같은 순간을 지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연히 모여 특이한 예술적 삼투 작용을 통해 특별한 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순간 말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대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카사블랑카>(1942)와 프랑스 뉴웨이브의 시금석처럼 여겨지는 <네 멋대로 해라>(1960)가 바로 그러했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지금 들으면 참으로 놀라운 이름들이 한데 모여 있다. 감독·시나리오 장 뤽 고다르, 공동집필자 프랑수아 트뤼포, 카메라에 라울 쿠타르, 장 폴 벨몽도, 장 세부르, 장 피에르 멜빌이 배우로 출연하고 클로드 샤브롤이 그의 이름을 기술감독으로 올렸다. <네 멋대로 해라>는 첫 번째 프랑스 뉴웨이브 영화는 아니었지만 기존 프랑스 영화계에 도전하는 건방진 활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드럼이 울리고 트럼펫 팡파르가 들리고… 여러분께 <빨간 코끼리>를 소개합니다. 빨간 뭐? 베이징 어린이영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영화 좀 봤다는 사람들도 보기는커녕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감히 이 영화를 1980년대 초기 중국 뉴웨이브(보통 제5세대라 칭해지는)의 섬광적 순간을 담은 영화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운동의 초기작으로 알려진 유명한 영화들인 1983년작 <하나와 여덟>과 1984년작 <황토지>는 부디 잊어주시길. <빨간 코끼리>는 국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중국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훌륭히 키워낸 장이었다.
영화 초반의 크레딧을 보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영화광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세명의 감독 중 야외장면을 담당했던 장지앤야는 지금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고, 스튜디오 시퀀스를 담당했던 시에샤오징은 그 뒤 모습을 감추었고, 전체 감독인 티엔주앙주앙은 곧 국제적인 감독이 되었다. 아트디렉터였던 펑샤오닝은 이후 와이드 스크린 시대극 감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D. P. 였던 젱니안핑은 이후 그의 아내이기도 한 리샤오홍 감독과 함께 <사랑에 빠진 바오버> 같은 영화에서 함께 작업하는 카메라맨이 되었다.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카메라 어시스턴트의 명단이다. 조명에 장이모, 초점에 허우용, 카메라 로더에 뤼위에. 모두 이후 너무나 유명한 감독이 된 이들이다.
76분짜리인 이 영화는 소수민족인 따이족과 하니족의 두 소년이 따이족의 소녀와 마을 어른들한테 들었던 신비로운 빨간 코끼리 사냥을 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스토리 전개는 거의 없지만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정해졌을 듯한 세 아이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따라간다. 내용은 남쪽 지방 소수민족의 얘기를 다룬 이후 제5세대 영화들과 비슷하다. 영화의 외관은 정글의 빛과 초점이 나간 전경의 수풀 등 이 젊은이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시도해보려 한 실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영화는 현재 중국에서 DVD로 구할 수 있지만 장이모에 관한 인터뷰나 전기영화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최근 나는 이전부터 알고 지낸 허우용과 만나서 이 영화 작업에 관해 기억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는 내게 위에 언급한 대로 정확히 모든 사람들이 했던 역할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영화가 윈난의 남쪽 지방 여강 근처에서 약 두달간 촬영된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졸업영화를 찍듯 모두에게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했다.
이제 아시아의 한 영화제가 그때 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을 한두명이라도 초대해서 이 영화를 상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 영화사의 작은 한 부분이 다시 쓰여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