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U에서의 유학생활에 적응해 갈 때쯤 박중훈은 배우가 아니라 완전한 ‘학생’이 됐다. 나를 포기하고, 인기를 포기하고 떠나면 사람들이 나를 다시 봐주지 않을까, 새로운 결심에 박수를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면학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우묵배미의 사랑> 촬영 당시 스케줄을 쪼개 강남역 시사영어학원에서 토플과 보캐블러리 20000을 동시에 수강했던(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거나 사람들이 대중스타에 대해 폭발적으로 떠들어대던 때가 아니라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학원 다니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부지런한 배우 박중훈이 그렇게 성실한 유학생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게다가 재학 중에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아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물론, 뉴욕 아시안 소사이어티에서 주관한 뉴욕아시안필름페스티벌에서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상영됐고, NYU에서 열린 아시안 영화 퍼레이드에서는 <칠수와 만수>가 상영됐다. 이쯤 되면 평범한 학생 이상으로 교내 유명인사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 기뻤던 것은 유학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오랜 사랑을 가꾸기 시작한 일이다. 그렇게 미국 유학은 그의 인생에서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인기스타가 아닌 ‘노바디’로 살아가더라도 돈은 필요했다. (웃음) 당시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에티켓 치약, 뱅뱅 청바지, 샤우면, 밀키스, 미라클바 등 한 10개쯤 되는 CF의 모델을 했다. 그런데 단발성 광고 말고 계속 진행되던 광고 중에서 내 유학을 이해해주고 지원해준 곳은 뱅뱅 청바지가 유일했다. 롯데칠성 밀키스 모델도 했었는데, 내가 뉴욕에 있는 기간이라도 광고 촬영을 하게 해주면 싸게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웃음) 그렇게 뱅뱅 청바지로 받은 개런티가 유학생활에 큰 도움이 돼서 정말 고마웠다. 나중에는 내가 뉴욕에 있으니까 뉴욕제과에서도 전화가 와서 맨해튼에서 광고를 찍은 적도 있다. 그래서 유학 기간이 완전한 공백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지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도 많았다. 가령 일찍부터 NYU에서 자리잡고 공부하고 있던 분이 바로 현재 개봉대기 중인 장동건 주연의 영화 <런드리 워리어>를 연출한 이승무 감독이다. 이승무 감독은 당시 시티은행에서 내 은행계좌를 터준 고마운 사람이다. (웃음) 사실 유학생활 초창기에 은행계좌를 트는 건 정말 중요한데 바로 영어회화가 잘 안되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금도 어쩌다 뵙게 되면 그날 일을 얘기하면서 많이 웃는다.
유학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방학 때 미국 일주도 했다. 크로스 컨트리를 하면서 뉴욕을 출발해 시애틀을 거쳐 LA까지 간 적도 있다. 세상에 이렇게 땅이 넓구나, 감탄하면서 정말 <캐스트 어웨이>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런 광활한 밭을 3일 동안 계속 달린 적도 있다. 3일 동안 달리는데도 양옆으로 옥수수밭밖에 없더라. 그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의 느낌이란 내겐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래도 역시 유학생활을 떠올리면 아내를 만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웃음)
뉴욕의 어느 술집에서 처음 만난 아내
당시 뉴욕에 캔디B1이라고 하는 유명한 지하 가라오케가 있었다. 조그만 곳이지만 신디 로퍼도 거기서 생일 파티를 열 정도로 유명한 곳으로 와이프가 거기서 바텐더를 하고 있었다. 정말 운명처럼 완전히 내 이상형이어서 첫눈에 보자마자 같이 간 친구들에게 그랬다. “저 여자가 한국 여자면 무조건 결혼한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Excuse me. Are you Korean?” 뭐 그렇게 시작한 첫 대화였는데 한국말은 전혀 할 줄 모르는 재일동포 3세였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나랑 같이 NYU에서 ‘VIP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앤드 매니지먼트’라는, 정말 다 아는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어떤 식으로든 번역하기 애매한(웃음) 과정의 전공자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토요일에 바텐더를 하면서 그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너무 느물느물 웃기에 처음엔 참 싫었다고 하더라. (웃음) 그 뒤로 두세번 더 찾아갔는데 도저히 마음이 안 움직인 거지. 당연히 데이트 신청을 계속 거절했는데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온 부잣집 아들로 봤나 보더라. 요즘에야 조기유학이 흔하지만 그땐 정말 공부를 잘하거나 도피성인 학생들이 주로 미국 유학을 왔었으니까. 아무튼 나의 열렬한 구애와 별개로 와이프의 나에 대한 첫인상은 완전 꽝이었다.
NYU에서의 운명같은 재회와 결혼
그러다가 하루는 NYU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주사를 놔주는 게 있는데 그걸 맞았다. 그리고 당시는 뉴욕이란 데가 워낙 험해서 외국인 학생들은 그 주사는 물론 ‘How to Surviving in New York’이라는 수업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다. 아무튼 그 주사를 맞고 바이올렛이라는 학교 공식카페에 앉아 있는데 그녀도 주사를 맞고 들어오더라. 서로 바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지 한달 정도가 지난 뒤였다. 나도 그녀가 NYU 학생인 줄 모르고 그녀도 내가 제대로 된 학생인 줄 모르는 상태에서 헤어졌다가 그렇게 만나게 되니 묘한 신뢰 같은 게 생기게 됐다. 나를 좀 달리 본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내가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해서 처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정말 들뜬 마음으로 그녀를 만나 식사를 하고 얘기를 하는데 자기도 아는 한국 학생들이 몇명 있다며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와서 유학 중이라는데 아세요?”라고 물었다. 난 그때 한국의 모 영화사에서 일하다가 유학을 온 상태라고 말해둔 터였다. 당연히 난 물론 안다, 정말 멋진 배우고, 아주 좋아하는 배우라고 얘기해줬다. 그리고는 헤어질 때 그 사람이 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 깔깔깔 아주 기분 좋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그녀와 계속 만남을 가지게 됐고, 만난 지 세번 정도 만에 뉴욕의 한 택시 안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1991년 8월에 처음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고 교제를 하다가 프러포즈를 하게 됐고 그해 겨울 일본의 그녀 집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장인, 장모님께서 바로 허락해주셨고(웃음) 1992년 5월 졸업식 때 온 우리 부모님도 그녀를 만나고는 결혼을 허락해주셨다. 그 뒤 와이프는 나보다 학점을 더 따야 해서 내가 먼저 한국으로 떠났고 아내는 한 학기 더 다녔는데 그렇게 미국과 일본, 한국을 오가며 사귀다 1994년 결혼에 골인했다. 첫눈에 반해 만나서 결혼하기까지 딱 3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야심찬 복귀작 <들소>는 무산되고…
사실 난 유학을 떠나기 전 한국영화계가 걱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지만, 내가 빠진 한국영화계는 어떡하나, 하면서 정말 큰일난 것처럼 생각한 거다. 유학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충무로에 정말 미안했다. (웃음) 지금으로 치자면 박지성이나 이승엽이 대표팀 불참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걸로 생각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내가 빠진 그 다음 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영화 르네상스 원년이라고들 하더라. (웃음) 그래서 생각했지, 유학을 마치고 멋지게 컴백하겠노라고.
한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쯤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국인이 미국 뉴욕에 가서 벌어지는 로맨틱코미디 한편을 찍자고 했다. 제목은 <익스큐즈 미 뉴욕>이라고 했다. 그런데 좀 문제가 복잡했던 것이 당시 내가 유학을 갈 때 <칠수와 만수> 등을 했던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회장이 “유학 갔다 돌아오면 우리와 세 작품을 함께하자”며 선계약금으로 3천만원씩 3편, 총 9천만원을 주셨던 거다. 조건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무조건 첫 번째 영화는 동아수출공사와 하는 거였다. 다른 두편은 나중에 때가 되면 하는 거고. 그런데 귀국할 시점에 동아수출공사에서 프로덕션 준비가 잘 안돼 있었고 나는 <익스큐즈 미 뉴욕>를 먼저 하면 안되겠냐고 했더니 난리가 났다. 그래서 부랴부랴 최사규 감독의 <들소>를 하자고 해서 유학 뒤 첫 동아수출공사 작품으로 <들소>를 찍기 시작했다. 유영길 촬영감독이 촬영을 맡았고 임순례 감독이 당시 조감독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도중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 <익스큐즈 미 뉴욕>도 흐지부지해졌고 <샴푸의 요정>이란 작품도 엎어졌다. 몇년 뒤 <세상 밖으로>라는 제목으로 빛을 본 여균동 감독의 데뷔작도 그때 순간 엎어졌고 최영학 감독의 <아테네 가는 배>도 유야무야됐다. 그러니까 이거 원 유학 갔다 돌아오자마자 무려 5편이 연달아 무산된 거다.
전쟁보다 힘들었던 <머나먼 쏭바강> 촬영
정말 조바심이 났다. 떠나기 전에 계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복귀하겠다는 목표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SBS 창사특집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에 ‘황 병장’ 역할로 출연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난 지금도 TV드라마 출연을 하지 않고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드라마는 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왕룽일가> <우묵배미의 사랑> 등을 쓴 박영한 작가의 원작도 마음에 들었고, 사전 20부작 극본도 다 나와 있었으며, 방송 시점 1년 전부터 찍는 드라마니까 영화 시스템처럼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 앞서 큰 인기를 끌었던 <여명의 눈동자> 스탭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화제도 많이 됐었다. 영화는 아니라도 나에게는 의미있는 작품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런데 1992년 11월부터 3~4개월 촬영하고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떠났던 작품이 무려 1년을 끌었다. 정말 베트남에서 꼬박 1년을 있었다. 이미 <바이오맨>으로 그런 경험을 했지만 그 고생의 거의 10배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 생애 영화 촬영현장에서의 고통은 그때 다 겪었다고 보면 된다. 이경영씨와 내가 주인공이라 보면 되는데, 이경영씨는 호찌민에 있는 반정부주의자로 ‘전쟁이란 무엇인가?’하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도시인 호찌민에서 찍으니까 뭐가 잘못돼도 수월하게 병원도 가고 회복할 수 있는 시설도 충분하다. 그런데 나는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같은 고민을 붕따우, 바올로, 나트랑, 다낭, 나짱 같은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했다. (웃음) 베트남 사람들도 잘 모르는 변두리는 물론 베트남에 사막 있는 거 아나? 그런 사막지대까지 가서 촬영했다.
당시 스탭 중에는 실제 백마부대 소속 베트남전 참전용사들도 있었는데 ‘실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공포’만 없다뿐이지 전쟁 때보다 더 힘들다고 말했을 정도다. 정말 그 정도로 고생했다. 엉덩이는 완전히 땀띠와 각종 피부질환으로 빨래판이었다. 시중에 파는 초콜릿 중에 ‘크런치’라고 왜 울퉁불퉁한 초콜릿 있지 않나? 엉덩이 전체가 그 모양으로 색깔만 빨간색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그 상태로 하루 종일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군복만 입고 있어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육체적으로 고생한 기억이 없다. 그때가 1992년이고 바르셀로나올림픽이 있었던 해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었다’ 뭐 그런 얘기를 해서 유행어처럼 되기도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농담 삼아 “베트남에서 하도 고생해서 나중에 서울 돌아가면 배씨하고는 말도 안 할 거”라 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