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돌아온 4편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터미네이터가 돌아왔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 제한시사를 통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심판의 날 이후를 다루는 이 미래의 프리퀄에서 존 코너는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가 될 소년 카일을 만나고, <트랜스포머>의 묵시록 버전이라 할 만한 거대한 로봇들의 공격에 맞선다. 그런데 모두가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 과연 젊은 감독 맥지는 제임스 카메론의 거대한 유산에 압사당하지 않은 채 모두가 즐길 만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냈는가. 설명이 좀 따라야겠지만 간단하게 대답부터 하자면, 그렇다.
터미네이터는 죽었다. 모두가 그런 줄 알았다. 조너선 모스토의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은 시리즈의 죽음이었다. 형편없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모스토는 훌륭한 장인이다. 최선을 다했다. 심판의 날로 끝나버리는 먹먹한 엔딩만큼은 시리즈 중 최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미네이터3>가 훌륭한 속편이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대중도 그걸 모를 리 없다. 모스토의 영화는 박스오피스 성적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은퇴하고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됐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는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터미네이터의 묘비명으로 “I’ll be back”을 쓰는 건 불가능해졌다.
신기한 일이 생겨났다. 한번 죽은 프랜차이즈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는 역사 속에 묻혀버린 프랜차이즈를 되살릴 비밀의 열쇠를 찾았다. 프리퀄이라는 이름의 열쇠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모두가 프리퀄을 원하기 시작했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 만들어졌다. <스타트렉>의 부활이 J. J. 에이브럼스의 손에 맡겨졌다(그러고보면 올여름은 프리퀄들의 역습이라고 부를 만하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리즈 중 하나인 <터미네이터>를 되살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두가 기대했다. 문제는 이거였다. 누가 감독을 맡을 것인가. 제임스 카메론은 당연히 관심없었다. 제작사가 마침내 발표한 감독은 맥지였다. 맥지? <미녀 삼총사> 시리즈의 그 친구?
맥지는 심란했다. <미녀 삼총사2>는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처참했다. 맥지는 <수퍼맨 리턴즈>의 감독으로 내정됐다가 막판에 쫓겨났다(후임자는 브라이언 싱어였다). 그는 마침내 복귀작을 낚았다. 새로운 터미네이터 영화였다. 팬들은 못 미더워했다. 스튜디오도 딱히 그가 최적임자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제임스 카메론이 좋아할 리도 없었다. 카메론은 조너선 모스토가 감독한 <터미네이터3>도 싫어했다. 맥지는 “카메론이 싫어하는 영화를 만드는 업보를 떠안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메론이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신작 <아바타>의 촬영장으로 찾아갔다. 카메론은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 “(새로운 터미네이터 영화를) 지지하겠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 어쨌든 좋은 영화 만드시게. 근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묻겠네. 대체 어떤 영화를 만드려는 거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프리퀄이 만들어질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대체 어떤 영화를 만들려는 꿍꿍이일까.
존 코너와 마커스, 그리고 소년 카일 리스의 이야기
마침내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미래전쟁의 시작>)이 공개됐다. 무대는 ‘심판의 날’로 처참하게 파괴된 2018년의 지구다. 존 코너(크리스천 베일)와 저항군들은 스카이넷이 지휘하는 터미네이터 군단과의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고 있다. 모르는 사람 있겠냐만 잠깐 시리즈의 시간대를 정리해보자. <터미네이터>(1984)는 과거로 돌아간 T-800과 카일 리스가 사라 코너의 목숨을 두고 혈전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의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된다.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이하 <터미네이터2>)은 귀환한 T-800이 10대 존 코너의 목숨을 신형 T-1000으로부터 구한다는 이야기다. 조너선 모스토가 감독한 <터미네이터3>에서 존과 사라 코너는 심판의 날을 막으려 하지만 결국 스카이넷은 핵폭탄으로 세계를 멸망시킨다. 심판의 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니, 심판의 날은 와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심판의 날이 오지 않는다면 존 코너가 아버지 카일 리스를 지구로 보낼 리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미래전쟁의 시작>에서 존 코너는 매일매일 엄마 사라 코너가 녹음한 음성 테이프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는 불안하다. 엄마가 예언한 미래가 올지도 의문이다. 왠지 자신이 저항군의 리더가 될 그릇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존 코너는 아직 (과거로 돌아가서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만나지 못한 상태다. 존 코너의 반대편에 새로운 캐릭터인 마커스(샘 워딩턴)가 있다. 마커스는 2003년에 사형당한 살인범이다. 그런데 그는 2018년에 갑자기 깨어난다. 그는 자신이 왜 사형당하지 않고 15년 뒤의 미래에 다시 깨어났는지를 알아내려 하다가 우연히 소년 카일 리스(안톤 옐친)를 만난다. 두 사람은 저항군의 기지로 향하지만 카일이 도중에 터미네이터들에게 납치당한다. 마커스는 현장에서 만난 저항군 전투기 조종사 블레어 윌리엄스(문 블러드굿)와 함께 저항군 기지에 당도한다. 그리고 존 코너와 마커스는 만난다.
여기서부터 <미래전쟁의 시작>의 진정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고보니 마커스는 인간의 외형과 심장을 그대로 지닌 반(半)로봇이다(이건 스포일러가 아니다. 마커스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그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존 코너와 저항군은 그가 스카이넷이 보낸 첩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로봇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마커스는 필립 K. 딕 소설의 주인공처럼 존재론적 자기혐오에 빠진다. 문제는 카일 리스다. 곧 저항군은 스카이넷 요새로 총폭격을 퍼부을 예정이다. 그러나 요새에 갇혀 있는 카일 리스를 구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카일 리스가 죽는다면 존 코너는 태어나지 못한다. 모든 희망은 사라진다. 결국 존 코너와 마커스는 혈혈단신 따로 스카이넷에 잠입해 들어간다. 그러니까 <미래전쟁의 시작>은 오로지 존 코너의 투쟁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존 코너와 마커스라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카일 리스라는 소년의 이야기다. 인간과 기계가 인간의 미래를 위해 손을 잡는 이야기다.
질주하는 액션에 이야기는 추월당해
제작진은 시리즈를 되살리기 위해 지금 할리우드의 가장 노련한 장인들을 모조리 끌어들었다. <다크 나이트>의 각본가이자 크리스토퍼 놀란의 친동생인 조너선 놀란, <배트맨>의 작곡가 대니 앨프먼,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비주얼을 완성했던 스탠 윈스턴(그는 영화 제작 중 작고했고 영화는 그에게 헌정됐다), <트랜스포머>의 ILM 군단은 제임스 카메론이 상상했던 심판의 날 이후의 세계를 근사하게 스크린에 되살려냈다. 특히 특수효과가 듬뿍 투여된 스펙터클로 보자면 <미래전쟁의 시작>은 확실히 <트랜스포머>의 또 다른 형제다. 본격적인 로봇영화라는 이야기다. 물속에서 뱀처럼 헤엄치는 터미네이터, 전투기형 터미네이터인 헌터킬러, 엄청난 스피드로 질주하는 오토바이 형태의 모토 터미네이터 등 다양한 형태의 로봇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베스터라는 인간 수집용 로봇이 20m가 넘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사막 위를 걸어다니는 장면은 직접적인 <트랜스포머>의 인용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맥지 역시 <트랜스포머>의 영향력을 굳이 부인하진 않는다. “<트랜스포머>는 끝내주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와 비교하자면 좀더 컬러풀하고 긍정적이다. <미래전쟁의 시작>은 조금 다르다. 좀더 리얼한 이야기다.” 두 영화 모두 SFX의 화력에서는 용호상박이다.
그러나 <미래전쟁의 시작>은 감독 맥지의 장단점이 두드러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일단 맥지의 장점은 장난감 놀이다. <미녀 삼총사>에서 그는 헬리콥터나 트럭 등 움직이는 탈것과 주인공들을 현란한 CG로 버무려내는 MTV 스타일의 액션 연출에 장기가 있음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맥지는 홀로 헬리콥터를 조종하다가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추락하는 존 코너의 모습을 원신 원컷으로 헬리콥터 내부에서 잡아낸다. 배경만이 홀로 돌아가는 거대한 무중력 가상현실 체험관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마술이다. 마커스와 카일 리스가 거대한 협곡에서 터미네이터들의 추격을 피하는 시퀀스는 <미래전쟁의 시작>의 백미다. 카일은 모토 터미네이터들에 쫓기다가 협곡에서 거대한 하베스트에게 납치당하고, 마커스는 협곡을 날아가는 하베스트에 혈혈단신 매달린 채 카일을 구하려 애쓴다. 이 시퀀스는 <미녀 삼총사2>의 오프닝 액션장면과 <트랜스포머>의 후버댐 액션장면을 하나로 엮어놓은 듯하다.
반면 맥지의 단점은 캐릭터 만들기다. 그는 대담한 액션 감독이지만 훌륭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조너선 놀란이라는 1급 각본가와 크리스천 베일, 샘 워딩턴, 안톤 옐친이라는 좋은 배우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맥지는 존 코너와 카일 리스라는 기념비적인 캐릭터들을 새롭게 구현하는 데 못내 서툴다. 팬들이라면 존 코너와 카일 리스가 처음으로 마주치는 장면에서 심장이 멈추는 듯한 감동을 기대할 거다. 뒤틀린 시간의 뫼비우스 띠를 타고 마침내 상봉한 부자(父子)의 모습으로부터 제임스 카메론이 창조한 위대한 시리즈의 역사를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의 만남은 보는 이의 심장을 기대만큼 두들기지 못한다. 맥지가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하지 않은 탓이다. 지나치게 몰아치며 질주하는 액션을 조금 다스리고 인간의 이야기를 좀더 쓰다듬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I’ll be back”, T-800과의 혈투, 2편 주제곡 등 팬서비스
맥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묵시록적인 심각함으로 달려가는 영화 속에 팬들을 위한 장면들을 삽입하는 팬서비스를 잊어버리지 않는다(얄팍한 방식이지만 효과는 좋다). 존 코너는 스카이넷으로 침투하기 직전 아내에게 말한다. “I’ll be back.” 그가 모토 터미네이터와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터미네이터2>의 주제곡이었던 건스 앤드 로지스의 <You Could Be Mine>이 흘러나온다. 스카이넷에 침투해들어간 존 코너는 1편에 등장한 T-800과 혈투를 벌인다. CG로 만들어진 젊은 시절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존 코너의 얼굴을 가격하는 순간, 오랜 팬들이라면 빙그레 웃음을 지을 거다.
맥지와 제임스 카메론의 만남을 다시 상기해보자. 카메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넨 이 영화를 독창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맥지는 “당근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먼 옛날의 에피소드를 카메론에게 상기시켰다. “당신이 <에이리언2>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람들은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했죠. 누구? 제임스 카메론? <피라냐2>를 만들었던 그 작자? 그런 놈이 리들리 스콧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맥지가 스스로를 제임스 카메론과 비교하는 게 철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분명한 것은, 맥지가 거대한 시리즈의 유산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압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이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다. 존 코너는 영화의 마지막에 선언한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맥지와 제작진도 마찬가지다. <미래전쟁의 시작>은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념할 만한 전투를 치러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전투다.
T월드의 시간여행
1편부터 4편까지 시간 순으로 보는 <터미네이터>의 사건일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는 50여년의 시간이 응축해 있다. 미래에 벌어진 사건이 과거의 시간을 흔들고 과거의 일들은 미래의 부름을 받으며 달려간다. 전체적으로는 프리퀄인 4편이 가장 처음, 그리고 1, 2, 3편의 순서지만 영화는 인물들을 서로 뒤얽힌 시간 속에서 풀어낸다. 까딱 잘못하면 길을 잃을지 모른다. 4편의 원활한 감상을 위해 1, 2, 3, 4편의 주요 사건을 시간순대로 정리해보았다. <터미네이터>의 사건일지.
1984년 5월12일(T1) 미래(2029년)에서 T-800 터미네이터가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지구에 옴.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옴.
1984년 말(T1) 카일 리스가 사라 코너와 함께 T-800 터미네이터를 제거하지만 그 역시 목숨을 잃음. 사라 코너는 카일 리스의 아이를 갖고 사이버딘에선 터미네이터의 잔해가 발견됨.
1985년 2월28일(T1) 카일 리스와 사라 코너의 아들 존 코너가 태어남.
1994년(T2) 사라 코너는 컴퓨터 공장을 폭파시키려다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존 코너는 사회복지소의 감시를 받음.
1995년 6월7일(T3) 존 코너는 미래의 아내가 될 케이트 브류스터를 친구 집 지하실에서 만남.
1995년 6월8일(T2) T-1000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미래(2029년)에서 옴. 재프로그램된 T-800은 존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지구에 옴.
1996년(T2) T-1000이 제거되고 T-800은 용광로 속에서 사라짐.
1997년 말(T3) 사라 코너가 백혈병으로 죽음.
2003년(T4) 살인범 마커스 라이트가 장기이식 제안에 동의한 다음 사형당함.
2004년 7월24일(T3) T-X 터미네이터가 존 코너와 케이트 브류스터를 죽이기 위해 미래(2032년)에서 지구에 옴. 재프로그램된 T-800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T-X의 뒤를 쫓음.
2004년 7월25일(T3) 기계들의 반란이 시작됨. 스카이넷이 자각력으로 움직이고 핵무기가 폭발. 존 코너와 케이트 브류스터는 크리스털 피난처에서 간신히 살아남음. 심판의 날.
2018년(T4) 스카이넷과의 전쟁. 저항군 리더 존 코너가 미스터리한 마커스 라이트를 만남. 카일 리스를 찾기 위해 적의 기지에 침입함.
2032년 7월4일(T3) 존 코너가 살해됨. 그를 죽인 건 1984년 사라 코너를 죽이려 했고, 1995년엔 존 코너를 지키려 했던 T-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