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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스토리 8] 봉산 마스크 댄스, J의 히트
박중훈(영화배우) 정리 주성철 2009-05-08

미친 듯이 공부만 하던 미국 NYU 유학 시절의 좌충우돌 에피소드

NYU 유학 시절의 박중훈.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1990년 12월29일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개봉했고 그야말로 기분 좋게 뻥 터졌다. 박중훈은 이제 마음 놓고 유학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가 유학을 마음먹었던 것은 <칠수와 만수>를 끝낸 다음이었다. 그때부터 영어 공부도 착실히 하면서 ‘영화만 터지면 무조건 떠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유학을 위한 영화 흥행을 기다리며 ‘5분 대기조’처럼 살았다. 하지만 <칠수와 만수>는 물론 <바이오맨>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도통 영화가 안됐다. 그가 진짜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건 ‘<우묵배미의 사랑> 끝나고’였으니 그 영화만 흥행이 잘됐으면 더 일찍 떠났을 거다. 그런데 흥행은 배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영화 출연과 CF 촬영, 라디오 생방송 진행 등 그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토플 학원도 다니고 보캐블러리 학원도 다녔다. 그에게 유학은 정말 구체적인 꿈이었다. 그렇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끝내고 오르게 된 유학길,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다. 한때 연예인들의 학력위조 파문이 있기도 했지만 그는 정말 떳떳하다. 그렇게 그는 뉴욕에서 ‘노바디’로 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내가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다들 놀라긴 했지만 나에게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다닌 용산고는 동부이촌동 아이들이 많았는데 당시는 서울에서 대표적인 부자동네 중 하나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 유학 떠난 친구들이 많아서 ‘유학’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됐던 거 같다. 그래서 “아니, 네가 유학을?” 하고 놀라는 친구들이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한 생각이기도 한데, 007 시리즈 몇편을 찍기도 했던 테렌스 영 감독이 <오, 인천>(1981)이라는 한국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기도 했는데 고 이낙훈 선생이 출연해서 영어 연기를 꽤 잘하셨다. 그걸 보고는 내가 언젠가 할리우드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한국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영화가 만들어지면 다시 영어 잘하는 로컬 배우를 찾겠지, 하는 생각에 영어를 잘해야 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다음 상황뿐만 아니라 다음다음 생각까지 하고 가능성을 열어뒀던 거다. (웃음)

어딘가에서 ‘노바디’로 살고 싶다

유학은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여전히 극장에 걸려 있을 때 떠났다. 그러지 않으면 못 갈 거라는 생각이었다. 집안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반골기질도 있고 하고 싶은 거 못하면 또 미치는 성격이다. (웃음) 그렇게 떠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조용히 쓰윽 떠나는 거. 물론 더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중요했다. 지금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저 너머에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간혹 어떤 사람들은 뭘 좀더 안다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고 뻐기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도 너희들 수준에서 한번 비교해보자, 뭐 그런 생각도 있었다. 영화를 찍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잠도 잘 안 오고 멍한 기분이 되어 이러다 그냥 배우로서 조용히 ‘팽’당하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얘기도 있지 않나. 너무 내 시간이 없다는 생각도 했고, 사람들에게 너무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도 두려웠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청춘스타 박중훈이 됐지만 정말 어딘가에서 ‘노바디’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을 가려면 F1 학생비자가 필요한데 B1, B2 관광비자밖에 없었다. F1을 받자니 어드미션 받고 그러면서 몇달이 걸리게 되더라. 그러면 또 일 욕심, 돈 욕심 때문에 마음이 바뀔 거 같아서 무조건 떠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비자문제로 상당히 고생했다. 처음에는 USC에 가고 싶어서 1989년에 일종의 사전답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쪽은 공부에 어울리는 날씨가 아니더라. 그래서 갈등을 하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방학 때 한국 와서 ‘넌 뉴욕을 가야 한다’고 그러더라. 뉴욕은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일종의 환상 같은 게 있지 않나. 게다가 NYU가 배출한 수많은 감독과 그 계보의 영화들도 있고. 그래서 NYU로 급선회했다. 그렇게 유학을 떠나게 된 날, 당시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는 수백명의 팬들이 나왔다. 왜냐하면 라디오에서 <박중훈의 인기가요>를 진행하던 때라 내 근황 얘기를 하며 언제 무슨 비행기로 간다, 그런 얘기를 몇번이나 했다. 그게 공항에 나와 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지. 그래서 공항에 인형이랑 고추장을 들고 나온 팬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정말 난 내 20대가 부끄러워. (웃음)

영어 배우려 노숙자에게 말 걸기도

뉴욕에 도착하던 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비행기표를 싼 거 산다고 노스웨스트 항공으로 끊어서 디트로이트를 들렀다가 국내선으로 바꿔 뉴욕으로 가게 됐다. 그래도 비행기 바깥으로 보이는 맨해튼의 불빛이 보석처럼 빛나서 가슴이 설&#47132;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고생해서 추운 겨울 밤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중 나오기로 한 바로 그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닌다는 친구가 안 나온 거다. 1991년 1월27일이었는데 그날이 바로 미국 슈퍼볼 결승전이었다. 알다시피 그건 우리로 치자면 2002월드컵 8강전, 4강전 같은 의미다. 영어 실력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태에서 짐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한참을 기다렸다. 마중 나온 친구와 멋지게 포옹하고 들어가려다 망연자실 기다리게 된 거다. 알고 보니 친구가 바로 그 슈퍼볼 결승전을 보다가 늦은 거다. 게다가 친구 집에 가보니 오하이오대학에서 컬럼비아대학으로 온 지 얼마 안된 상태라 가구는 아예 없고 침대와 바닥의 전기담요 외에는 황량했다. 정말 추웠다. 나는 폐 끼치기가 싫어서 바닥에서 잔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냐, 네가 손님이니까 침대에서 자’ 그럴 줄 알았는데 친구는 정말 “응, 잘 자” 그러더라. (웃음) 그 친구는 가끔 그때 얘길하면 미안해하기도 하는데 뭐 다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나의 뉴욕 생활 첫날은 아주 춥게 시작됐다.

얼마 안 가 친구 집 근처 브로드웨이 72가에 아파트를 구했고, 일단 랭귀지 과정을 시작했다. 토플 시험이나 기타 영어 성적이 어쨌든 간에 NYU는 자체적으로 랭귀지 레벨 테스트를 한다. 레벨은 1에서 6까지인데 6이 제일 높은 거고 그걸 끝내야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영어교육 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은 잘 나오면 5이고 보통은 4 정도다. 나는 그전에 학원을 다니다 왔음에도 레벨 3이 나왔는데 이미 봄 학기는 시작됐고 3이 다 찬 상태라 4로 올라갔다. 학교쪽에서는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월반한 거나 마찬가지고 한 학기를 세이브하는 거라 마음속으로 너무 고마웠다. (웃음)

그리고 봄 학기 때 레벨 4를 풀타임으로 들으면서 어플라이를 했다. 당시 추천서를 써주신 분 중 한명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에 계신 김동호 위원장님이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영화배우로 프로페셔널하게 이미 많은 경력을 가진 내가 학생으로 공부를 하러 온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여름 학기에 레벨 5를 듣고 가을에 레벨 6을 들으면 바로 내년부터 본과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그래도 과정이 끝나면 패스할 수 있는지 시험을 쳤기 때문에 죽도록 영어공부를 해야 했다. 잘 때는 영어로 꿈을 꾸려고 <CNN>을 켜놓고 잤고 주머니에 쿼터 동전을 넣고 다니면서 친구들이 좋은 표현을 하나씩 가르쳐주면 그 동전을 보답으로 주곤 했다. 한번은 어떤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길거리의 노숙자에게 물어본 적도 있다. 그렇게 미친 듯이 하다보니 처음에는 미필적 고의로 월반을 한 거였지만(웃음) 시험을 치고 보니 여름에 레벨 6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됐다.

이수해야 하는 학점이 36학점이었는데, 학과 사무실을 찾아가서 가을부터 들을 수 있긴 하지만 여름에 본과수업 쉬운 것 좀 듣게 해달라고 해서 아메리칸 뮤지컬과 무언극 두 과목을 여름에 들으면서 또 랭귀지를 함께했다. 그리고 가을 학기 때 풀타임으로 수업을 들었다. 풀타임은 보통 4과목을 듣는데 그러면 12학점이다. 그렇게 여름에 두 과목 6학점, 가을에 12학점, 그러면 18학점이 되고 그리고 또 봄에 12학점 이수를 해서 30학점이 됐고, 또 여름에 6학점 더 들었으니 총 36학점이 됐다. 그러니까 1991년 봄부터 1992년 여름까지 1년 반 동안 랭귀지 2학기, 레귤러 6학기를 들은 거라 1년 반 만에 졸업하게 됐다. NYU는 외국인 학생의 경우 6학점을 덜 이수한 상태까지는 졸업식 참석을 시켜주는데, 졸업식이 5월이니까 나는 1992년 5월에 졸업식에 참석해서 여름에 6학점을 더 듣고 정식 졸업장을 받게 된 셈이다. 그게 총 2년이 안되는 시간이었으니 내 인생에 그렇게 선량하게 공부만 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 (웃음) 그때 월간 <스크린> 출신의 문혜주 기자도 유학 중이었는데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찍었던 사진들로 <스크린>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영어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 즉흥연기?

수업시간에 내 이름은 중훈의 ‘J’를 따서 그냥 ‘제이’로 불렸다. 수업 내용을 그대로 녹음해서 나중에 다시 듣고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어떤 비평 수업은 일주일에 두꺼운 책 2권 정도는 읽어야 수업이 가능했다. 4과목이면 총 8권이다. 한국책도 일주일에 그렇게 읽기 힘들다. 그러니 나중에는 편법으로 꾀를 써서 모든 책에 7~8페이지로 정리 요약을 해놓은 책이 있다. 그런 걸로 일단 수업을 준비하곤 했다. 내 전공은 우리말로 하자면 ‘연기교육학’ 정도 되는데 ‘어떻게 연기를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테마다. 거기서 종종 즉흥연기를 했다. 이곳이 바로 마을이고 각자 역할을 맡는 거다. 나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 그런 걸 자청해서 했다. 어떤 때는 비자카드 직원에게 전화를 잘못 건 상태로 5분을 통화하는 과제 같은 것도 있다. 교수가 비자카드 직원을 연기하고 나는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든 5분을 통화하는 거다. 정말 영어로 수업하며 좌충우돌하던 시기였다.

그래서였는지 한국에서는 정말 말 많고 쾌활한 놈이었지만 유학 당시는 참 과묵한 학생이었다. 다들 동양에서 온 조용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게다가 언어 습관도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다. 가령 누가 나보고 재킷이 멋지다고 “Oh, J. You look great today. Nice Jacket” 그러면 그냥 ‘땡큐’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몇 마디 더 하려고 “No, I don’t think so. This is cheap one” 이라고 했다. 우리 식으로 ‘아냐, 이거 싸구려야’ 그렇게 말하는 건데 영어로 하면 좀 이상했다. 동급생들이 동양의 겸손한 학생으로 본 게 아니라 ‘쟤 뭐야’ 그랬을 거다. (웃음) 생각해보면 그런 실수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뿌듯한 순간들도 많았다. 용산고 연극부에 있으면서 봉산탈춤을 췄던 기억이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학생들에게 인삼캔디를 좍 돌린 뒤에 ‘봉산 마스크 댄스’라고 하며 춤을 추면서 인기 좀 끌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91년 겨울 대만에서 36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가 열렸는데 내가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남우주연상을 탔다. 그때 같은 학과 대만 유학생이 대만 신문에 난 그 기사를 동료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길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좀 많이 으스댔던 기억이 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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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월간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