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영화제의 슬로건 중 하나인 대안적 기운이 살아 숨쉰다. 무엇을 두려워할까. 당신이 새로운 영화를 찾는다면 꼭 들러야 할 곳.
<음지> Umbracle
감독 페레 포르타베야 | 스페인 | 1972년 | 85분 | 35mm | 흑백
박제된 동물들이 진열된 박물관. 배경음이라곤 무슨 음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부다. 높아졌다 낮아지는 그 소리는 완고하리만큼 메마른 화면에 공포감를 더한다.
분절된 에피소드들로 이뤄진 <음지>는 간혹 접점을 찾기 힘든 영상과 사운드를 이어붙이는데,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건 기묘한 긴장감이다. 전화벨 소리와 같은 의미불명의 사운드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담배를 피우거나 난데없이 일군의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남자, 기차 안에서 은근히 서로를 의식하던 남녀의 영상이 펼쳐지고, 곧 영상과 사운드가 일치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 1970년대 스페인영화계를 지배한 검열 코드를 설명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까마귀>에 대한 감상을 열성적으로 쏟아내는 인물을 지나 박물관의 내부가 다시 카메라에 잡힐 때쯤 이 영화가 실은 세심하게 의도된 정치영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친다.
거칠게 말해, 이 모든 이야기들이 국가적으로 치밀하게 예술의 자유를 억압하던 프랑코 정권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는지 뒤늦게 고심하게 만든다. 페레 포르타베야 특별전의 또 다른 상영작 <뱀파이어>와 함께 1970년에 완성된 영화. 아시아 프리미어작이다.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Short Film About The Indio Nacional
감독 라야 마틴 | 필리핀 | 2006년 | 96분 | 35mm | 흑백
한 여자가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지만 한참 지나도록 잠들지 못한다. 계속 뒤척이다 그녀는 옆에서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그는 ‘어두운 길을 홀로 걷는 소년과 불을 밝히며 그의 앞으로 다가오는 한 늙은이’의 우화를 통해 필리핀의 어두운 역사를 꺼낸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무성영화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은 1890년대 스페인 제국주의에 맞선 필리핀 혁명에 관한 비극이다. 한 소년을 둘러싼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의 초반부와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인디오들이 혁명을 도모하는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라틴 마야 감독은 설명적이거나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절제한다. 마치 역설의 묘미야말로 더 직접적이라는 듯 말이다. 가령 영화의 후반부, 부르주아 복장을 한 학생들이 ‘돈, 탐욕, 교회’를 외치는 연극과 뒤로 도망가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주는 장면은 감독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다.
<범죄 현장으로의 귀환> Return to the Scene of the Crime
감독 켄 제이콥스 | 미국 | 2008년 | 93분 | DV | 컬러+흑백
실험영화 <범죄 현장으로의 귀환>을 만나기 전에 알면 좋은 몇 가지. <범죄 현장으로의 귀환>은, 감독 켄 제이콥스가 1969년에 만든 <Tom, Tom, the Piper’s Son>의 일부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새롭게 구성한 영상이다. 본래 <Tom, Tom, the Piper’s Son>은 미국 어린이들이 듣고 자라는 전래동요로, 영화는 피리 연주자의 아들 톰이 돼지를 훔쳐 달아났다는 가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나지만, 그 순간을 포함한 몇초간은 13개 챕터로 나누어져 상영시간 93분 동안 해체되고 분석당한다. 거친 입자의 흑백 영상은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고, 스트로보 효과로 깜빡이는 화면이 빨강, 노랑, 초록, 파랑으로 채색되더니 모스 부호처럼 점멸한다.
평론가 대니얼 캐스먼은 이 영화의 태도를 두고 “노출과 탐험을 통해 가능한 많은 디테일을 발견하고 폭로한다. 스토리와 캐릭터를 넘어 영화 전체를 받아들이는 모든 방법에 대해 그렇다”고 호평했다. 광대로 분한 “신의 실수”를 틈타 벌어진 범죄를 포착한 노장의 유머러스한 시선이 진중하게 다가온다.
<짙은 어둠 속의 마닐라> Manila in the Fangs of Darkness
감독 카븐 드 라 크루즈 | 필리핀 | 2008 | 72분 | DV | 컬러
필리핀영화의 정신적 지주 리노 브로카의 대표작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에서 따온 제목이 분명하다. 그 영화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1975년의 마닐라를 떠돌던 젊은이 줄리오 마디아가 역을 맡았던 배우 밤볼 로코가 세월을 건너 <짙은 어둠 속의 마닐라>에 다시 출연한다. 한편 리노 브로카가 연출하고 밤볼 로코가 군사령관 콘트라로 출연했던 또 한편의 영화 <우리를 위한 싸움>도 여기 겹친다. 밤볼 로코가 맡았던 이 두 역할의 이름을 엮어 만든 ‘콘트라 마디아가’라는 인물이 지금의 마닐라를 떠돈다.
두 영화의 클립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감독 카븐 드 라 크루즈는 리노 브로카의 영화와 그 주인공을 오늘날로 귀환시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치적 이미지 모험을 감행한다. 여기에는 질문이 있다. 필리핀은 변했는가? 한눈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실험적인 형식과 정치적인 예리함으로 지난해 적지 않은 관심을 끌어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