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안병기 감독의 애창곡은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다. “가사의 첫 부분을 잘 들어봐. 총 맞은 것처럼~ 웃음만 나와~. 그래서 웃었어~. 내 기분이 딱 그거라니까.” 사실 솜씨 좋은 코미디영화 <과속스캔들>의 성공을 예견한 사람들은 꽤 있다. 문제는 그들 중 누구도 600만명이 넘어서는 압도적인 스코어를 예상하지는 못했다는 거다. 심지어 경쟁작이 치고 올라오는 구정 시즌에도 <과속스캔들>은 속도를 떨어뜨릴 생각이 없다(이 영화의 신드롬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약간 사담이긴 하지만 <과속스캔들>은 내 부모님이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두분이서 극장에 나란히 앉아 관람한 영화가 됐다. 이거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도 조심스럽다. 우리가 기대했던 건 250만명 정도였다. 600만명이라는 관객은 순수한 우리의 복이 아니다. 토일렛 픽쳐스 내부에서는 이게 독이 든 성배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지금 그걸 걱정할 땐가. 다시 물었다. 기분 좋으시죠?
=물론 좋지. (웃음) 신년호 <씨네21>에 유명 감독들 새해 운세가 나왔던데.
-사실 그거 검열판이다. 더 노골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자진삭제한 부분도 꽤 있다. =(웃음) 나도 지난해 말에 점을 보러 갔었다. 11월에서 1월까지 대박이 나온다더라. <과속스캔들> 편집을 다 끝내보니 본전 이상 하겠다는 예감이 딱 오더라. 150만명이 손익분기점이니까 그거는 넘기겠네. 이 불황에 100만명 넘기면 어디야. 근데 점쟁이 말대로 대박이 나서 1월까지 가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
-이렇게까지 잘되는 이유를 분석 좀 해봤나. =알다시피 토일렛 픽쳐스가 이제 10년차 영화사가 됐다. 공포/스릴러 장르만 전문으로 하자고 만든 제작사인데 그러다보니 동료가 없었다. 한국에 사실 공포영화를 좋아서 만드는 감독은 없지 않나. 혼자서 영화사 이끌면서 감독하는 게 힘이 들었다. 이젠 마흔이 넘었고 영화한 지는 23년이 됐다. 1985년부터 95년까지 평균제작비가 4억원에서 14억원으로 올라가던 시절 조감독을 시작했고,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영화 산업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 이후 올해까지가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고 한류 붐이 터졌다 가라앉은 이른바 제3기 아닌가. 옛날 조감독 시절 모셨던 감독님들은 은퇴 아닌 은퇴 상태고, 임권택 감독님의 <천년학> 투자가 엎어지는 과정도 보고. 이런 상황에서 내 미래는 뭘까 고민하게 되더라.
-그래서 전혀 다른 장르의 <과속스캔들>을 제작하게 된 건가. =일흔까지 공포영화를 하고 싶지만 영화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또 다른 전환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반대 지점에서 한번 생각을 해본 거다. 워킹 타이틀식 코미디영화는 제작비가 적게 드는 장르영화다. 토일렛이 제작한 공포영화들도 모두 제작비가 25억원 이하의 장르영화였다. 10년간 공포영화 제작으로 쌓은 노하우를 워킹 타이틀식 코미디 제작에 도입하면 좋겠다 싶었다. 또… 알잖아. 공포영화만 하면 사람이 오히려 착해진다는 거. (웃음) 밝고 착한 영화를 해보고 싶더라.
-<과속스캔들> 시나리오를 처음 보자마자 감이 오던가. =원래 강형철 감독이 토일렛에서 <인생리콜>이라는 영화를 한 2년 만지다가 <언니가 간다>와 컨셉이 비슷해서 연기시켰다. 근데 PD가 강형철 감독이 옛날 아마추어 시절에 쓴 <과속삼대>라는 시나리오를 보여주더라. <과속스캔들>의 모태가 된 시나리오인데 조금 다르다. 남자가 세명이다. 홈리스 같은 남자애가 아들을 데리고 할아버지한테 온다는 컨셉.
-구리다. =그렇지. (웃음) 근데 아들 대신 딸이 찾아오는 걸로 하면 재미있을 것 같더라.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있던 감독보고 올라와서 당장 각색하라고 했다. 문제는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단계에서 갑자기 이 영화가 토일렛의 사활이 걸린 작품이 된 거다. 준비하던 다른 영화들이 캐스팅을 하고도 투자가 안돼서 엎어져버렸거든.
-그런데도 큰 스타 없는 <과속스캔들>은 어떻게 투자를 끌어왔나. =토일렛에서 준비하던 감독 3명에게 100분짜리 비디오 클립을 만들게 했다. 새로 찍은 비디오 클립이 아니라, 기존 할리우드나 워킹 타이틀 영화의 신들을 재편집하고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깔아서 100분짜리 클립으로 만들게 한 거다. 이런 식의 영화를 만들겠다. 뭐 그런 거다. 원래 한국에서 투자를 받으려면 제작자가 시나리오와 스타 배우 캐스팅 여부를 투자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독이 직접 만든 비디오 클립으로 투자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했다. 배우는 약하지만 감독은 믿을 만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근데 강형철 감독이 시킨 대로 준비한 유일한 감독이었다. 다른 감독들은 그걸 만드는 시간에 시나리오를 더 쓰겠다며 손을 놨다. 사실… 귀찮았겠지. 그게 사실 한국 감독들의 일반적인 성향이기도 하고.
-총제작기간과 제작비는 잘 맞아떨어졌나. =8주 만에 정확하게 끝냈다. 개봉 스케줄도 정확하게 맞췄다. 토일렛이 제작한 모든 작품이 제작비를 오히려 남기고 끝냈다. 이번에도 한 1천만원 정도 남았다. 토일렛이 이런 영화 제작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게 뿌듯하다.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고 싶고.
-이런 불황에 든든하게 돈을 번 몇 안되는 제작사 중 하나가 됐다. 연초부터 든든하지 않나. =<아파트> 끝나고 2008년까지 3년 동안 <어느날 갑자기> 시리즈를 찍기 위해 회사의 덩치를 키웠다. 근데 3년 예상했던 시리즈를 1년 만에 끝내고 말았다. 하지만 회사가 커졌으니 나가는 경상비도 엄청나게 불어났다. <과속스캔들>은 지금까지의 적자를 메우는 정도가 될 것 같다. 하지만 토일렛 픽쳐스에 전환점이 됐다는 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이득이다. 게다가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직접 기자들 만나러 다니고 투자받으러 다니고 마케팅하러 다니고. 아하. 이렇게 발로 뛰면 되는구나 싶더라. 그동안 내가 정말 편하게 영화 만들었구나 싶더라.
-날씬한 장르영화가 불황에도 잘 먹힌다는 모범 케이스로 언론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제작의 공식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거다. 공포든 조폭코미디든 모두 정해진 공식에 맞춰 공장 돌아가듯 만들어진다. 게다가 스타 없이 성공한 영화들이 나오고 있는데도 다들 여전히 겁이 나나보더라. 스타가 돈을 버는 건 아닌데도 일단 캐스팅 단계에서는 용기가 사라지나봐.
-휴. 그건 정말 아무리 지적해도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흥행감독들은 꼭 특정 배우와 일하겠다고 조건을 단다. 그런 배우들은 다 스타다. 투자자도 스타를 원한다. 그러니 스타가 나오는 영화는 잘되든 못 되든 계속 만들어지겠지. 박보영 캐스팅 놓고 고민이 많았다. 그 나이대 아이돌 가수 출신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와 기획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박보영으로 밀어붙였다. 실패하더라도 모험심을 가지고 연기자 하나를 만들어내는 게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강형철 감독도 신인 아닌가. =과거에는 연출부 경험없는 신인감독이 영화 잘 만들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 스탭들의 실력은 엄청나다. 이런 스탭들이 모든 분야에서 뒤를 받쳐주기 때문에 조감독 생활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이젠 신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다른 감독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감독들 짐을 좀 덜어줘야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스탭과 시스템이 과거와 달리 훌륭하니까 이제 감독은 연출만 하면 된다. 아직도 한국 감독들은 캐스팅 간섭하고- 그래서 미스 캐스팅이 나오는 거다- 시나리오는 자기가 꼭 다 써야 하고, 현장에서 촬영과 조명과 미술까지 세세하게 참견을 한다.
-게다가 편집실에서 가위는 꼭 자기가 들어야 하지. (웃음) =작가주의 영화라면 다르다. 감독 위주의 영화니까. 하지만 대중영화에서는 감독의 짐을 덜어줄수록 영화가 잘된다.
-독특하게도 한국 작가영화들은 동시에 대중영화이기도 하다. 박찬욱 영화든 허진호 영화든 제작비 적게 드는 영화들이 아니다. 그런데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감독들이 마지막 편집권까지 꼭 쥐고 있어야 하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팀 버튼도 자기가 편집하지는 않는다. =나도 모든 것에 다 참견하는 그런 감독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공포영화를 좋아하고 잘 편집하는 전문가가 없으니까…. 사실 나는 편집하기 싫다. 시나리오 쓰는 것도 싫다. 짐 좀 덜어주면 좋겠다. (웃음)
-연출을 3년 쉬면서 <과속스캔들> 제작한 게 감독으로서도 도리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끝내고 엄청 고민했다. 더이상 자신감도 없고 아이디어도 고갈되고. 미치겠더라. 멜로 시나리오 들어오면 내가 아예 감독을 하고 싶었다니까. 근데 호러만 하다가 다른 장르 하려니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자존심도 상하고. (웃음) 그래서 정반대의 착한 영화를 한번 제작해보고 싶었다. <과속스캔들> 하면서 느낀 게 있다. 리얼리티, 사실주의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금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는 거다. 예전에는 특정 인물이나 소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걸 사실주의라고 했다. 지금은 허구적인 이야기라도 자연스럽게 만드는 걸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 <못>도 ‘리얼리티 호러’라고 말하고 싶다. 복수와 반전에 대한 집착은 없을 거다. 대신 특정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겪는 공포가 서서히 누적되면서 패닉 상태로 빠져드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영화가 될 거다.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 알려달라. =어느 다큐멘터리팀이 다큐멘터리 하나를 재연으로 촬영했다가 걸려버린다. 그래서 명예회복을 위해 귀신이 나온다는 저수지로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저수지가 있는 마을에 당도한 다큐팀이 동네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저수지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저수지가 안 나오는 거다. 그래서 PD가 이전부터 잘 알던 무당의 딸이 길잡이 겸으로 다큐팀에 합류해서 함께 저수지를 찾아나선다. 마침내 숲 한가운데서 저수지가 발견되고, 다큐팀은 24시간 동안 저수지를 촬영하기로 하는데…. (이하 자체 검열)
-현재 어느 정도 진행 중인가. =1월 말 시나리오 나오면 3월 초에 크랭크인해 한달 만에 촬영할 거다. 물론 신인 연기자들이고. 2월에는 전국 방방곡곡 로케이션을 갈 거다. 무대의 대부분이 숲이다. 숲이란 데가 낮에도 혼자 가면 서늘한 장소 아닌가. 부천 여대생 실종사건처럼 국내 모든 실종사건이 결국 야산에서 마무리되고.
-전통적으로 숲은 공포영화 무대로 멋진 장소다. =얼마 전에야 뒤늦게 <블레어 윗치>를 봤는데 끝내주게 무섭더라고. 하지만 그런 P.O.V(point-of-view shot, 시점 쇼트는 ‘카메라에 기록되는 화면’ = ‘등장인물이 눈으로 보는 것’인 쇼트. 이 경우 관객들의 눈은 등장인물의 눈과 완전히 동일시된다.) 스타일은 아닐 거다. 최근에는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호러영화들이 숲을 아주 잘 이용하는 것 같다.
-숲은, 뭐가 보여서 무섭다기보다는 안 보여서 무섭잖나. =나무 꼭대기에 뭔가 그림자가 있는 것 같을 때, 그럴 때 정말 무섭잖아. 그간 내 영화에서는 공포의 존재를 너무 확실하게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다.
-본가가 하와이다. 일년에 얼마나 머무르나. =매년 3개월 정도는 하와이에 가는데… 올해는 거의 못 갔다. 원래 시나리오는 하와이 집에 가서 써야 하는데. 사실 내가 겁이 많잖아. (웃음) ‘숲을 맴도는 누구. 그때 갑자기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이런 부분을 쓰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치면 깜짝 놀란다.
-그러게 말이다. 공포영화 좋아하면 성격이 이상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겁이 더 많다니까. 이젠 서울에도 가족이 필요한 거 아닌가. (웃음) =<과속스캔들>을 보고 있으니 주인공 남연수와 내 삶이 참 비슷하더라. 독신으로 오래 살다보니 외롭지만 또 외로운 걸 즐길 수도 있게 된 상태 말이다. 근데 이번에 기동이 역할을 한 왕석현을 계속 안고다녔는데 얘가 워낙 뽀뽀도 잘하고 잘 안기는 스타일이라 확 결혼 생각이…. (웃음) 얼마 전 <인간시대> 봤나? 아내가 마흔세살이고 애가 열두명이나 있는 가족 이야긴데 어찌나 재미있는지. <과속스캔들>보다 더 재미있다. 애들이 어찌나 예쁜지. 그걸 궁상스럽지 않게 아이들의 성장영화로 만들면 아주 좋은 가족영화가 되지 않을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