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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 기존의 나를 기억상실하리라
김용언 사진 이혜정 2008-12-26

<달콤한 거짓말>의 드라마틱한 여주인공 지호 연기한 박진희

첫인상이란 무서운 것이다. 더군다나 배우에게 있어 대표작이라는 건 행운인 동시에 몹시 두려운 존재일 것이다. 박진희의 경우, 한국의 유일한 공포영화 시리즈 <여고괴담>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서 냉소적인 모범생의 이미지로 오랫동안 기억됐다. 혹은 드라마 <쩐의 전쟁>의 따뜻하고 올곧은 여주인공으로, 혹은 <궁녀>에서 의사/탐정/근대인으로 활약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캐릭터로 기억되는 쪽이 강했다. 그랬기 때문에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아줌마의 영혼이 빙의된 스튜어디스를 연기하는 그녀의 능청맞음이 더 놀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개봉을 앞둔 영화 <달콤한 거짓말>에서의 박진희를 본다면, 당신은 박진희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전부 ‘기억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롤러코스터 타듯 캐릭터 즐겨

<달콤한 거짓말>에서 박진희가 연기하는 한지호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캐릭터다. 서른을 코앞에 두고서도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봤고, 술만 마시면 여전히 지갑에 품고 있는 고등학교 첫사랑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주정을 부리고, 방송국에선 대본을 쓰는 프로그램마다 조기종영을 당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다가 꿈에 그리던 첫사랑과 접촉사고로 재회하고,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억상실증 환자인 척하고, 그러면서 오랜 세월 그녀의 곁을 지켰던 이성친구의 마음이 사랑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서로의 등을 바라보는 관계가 겹겹이 쌓여가고, 거짓말의 다층적 구조도 복잡해진다. 이 안에서 감정의 병목현상을 빚어내는 단 하나의 원인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인물은 오로지 지호뿐이다.

지호는 기존 한국 로맨틱코미디에서 거의 볼 수 없던 인물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브리짓 존스라든가 <비밀의 화원> 등의 일본 코미디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던 독특한 여주인공이다. 기본적으로 무척 사랑스러운 캐릭터지만, 막상 이를 연기하기 위해선 엄청나게 빠르고 많은 대사와 몸개그, 안면근육과 목소리 톤까지 자유자재로 변화시켜야 했다. 그리고 박진희는 “하나의 캐릭터 속에서 롤러코스터를 마구 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지호에게 매력을 느꼈던 바로 그 부분이라고 했다. “선과 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부담을 느낀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더 롤러코스터를 재밌게 탈 수 있을까 하고 늘 생각했다.” 그녀는 지호를, <달콤한 거짓말>을 무척 즐겼기 때문에,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나에게 무척 중요하다. <달콤한 거짓말>은 그만큼 잘하고 싶다는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그녀는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단계부터 회의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미술 회의와 의상 회의에도 전부 참석했다. “물론 내가 미술에 대해서 뭘 알겠나. (웃음) 하지만 세트 구성이라든가 지호네 집의 전체적 톤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우리 영화 톤이 결정된다. 또 지호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런 성격을 갖지 않았을까, 이런 소품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디테일도 살아날 수 있다. 12월부터 4월까지 고스란히, 나는 <달콤한 거짓말>에 출근했다.”

사실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건 아니다. 할리우드 흑백영화 시절부터 캐스트의 가장 맨앞에 나오는 두 남녀가 이뤄진다는 건 예정된 결론이다. 정형화된 이야기와 결말, 비슷비슷한 선남선녀의 배우들. 어쩌면 로맨틱코미디는 다른 장르들에 비해 너무 특징이 없고, 매끈하고 달콤하기만 하다. 하지만 <달콤한 거짓말>은 그 장르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라가는 듯하다가, 그 안에서 아기자기하게 온갖 클리셰들을 패러디하고 비틀며 새로운 웃음의 코드를 창출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간다. 박진희가 연기하는 지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사실 <달콤한 거짓말>을 보면서 대체 이 배우가 어떤 식으로 연기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녀는 잠결에 칭얼거리며 온몸을 뒤틀거나, 러닝머신 위에서 콰당 엎어진 다음 (만화에 곧잘 나오듯)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채 정신줄을 놓고 앉아 있거나, 주변 인물들과 탁구공처럼 빠르게 오가는 대사를 치고받으며 이야기의 전개를 끌고 간다.

<사선에서>를 보며 사회복지사 꿈 굳혀

박진희는 지호를 연기하기 위해선 캐릭터 분석보다 오히려 톤을 잡는 쪽에 집중했다고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지호가 이끄는 영화이기 때문에 지호가 조금만 오버하면 영화도 완전히 오버스러워지다. 관객이 보기에도 지치는 영화가 되고. 반대로 지호가 너무 진지해지면 코미디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그 중간 톤을 잡는 일 자체가 지호를 만드는 과정이었다.”다시 말해 그녀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거짓말하는 지호가 거짓말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관객 입장에선 ‘에이 저렇게 연기하면 민우나 동식이가 다 알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인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반대로 너무 영화 속 거짓말 연기가 어설퍼지면 동식과 민우가 ‘지호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관객에게도, 우리 배우들에게도 연기해야 했다. 다시 말해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신, 배우들과 감정을 나누는 신을 나누고 그 중간 톤을 잡는 게 참 힘들었다.”

박진희는 자기가 연기하는 캐릭터 안에 너무 빠져서, 모든 것의 이유를 그 캐릭터의 입장에서 설명해버리는 이들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이미 객관성을 잃은 거다.” 그래서 그녀는 연기할 때 이외에는 슥 빠져나와 영화 전체를 보려고 노력했다. 지호라는 정신없는 캐릭터의 진심이 전해지고, 그녀의 거짓말이 이해가 되며, 그녀가 택하는 사랑을 응원해주고 싶어지는 것, 그리하여 영화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느껴지는 건 전적으로 박진희의 공이다.

대부분의 인터뷰는 박진희가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밟는다는 사실까지만 밝힌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학부 과정에서 방송연예학과를 다녔고, 10년이나 안정적으로 연기 생활을 지속했던 배우가 2006년에 이르러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택했다는 건 무슨 뜻이었을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이라는 한탄이 아니라 ‘그때 몰랐던 걸 지금은 알고 있다’라는 의지의 표명 같은 건 아니었을까. 배우로서가 아니라 개인 박진희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때 그것을 택했는지가 궁금했다.

박진희는 10대 시절부터 줄곧 연기만 10년을 해왔더니 어느 순간 “‘배우 박진희’와 ‘배우가 아닌 박진희’만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배우가 아닌 박진희’와 ‘그냥 박진희’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난 ‘배우가 아닌 박진희’가 아니라 ‘그냥 박진희’로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숫자에 약하니까 장사를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고, 그걸 구체화한 건 그녀가 2006년 서울환경영화제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박진희는 그해 환경영화제 상영작들을 이것저것 챙겨보면서 어느 순간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작품은 그해 대상을 수상한 사샤 스노 감독의 다큐멘터리 <사선에서>였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호랑이와 밀렵 사냥꾼 양쪽을 좇는 이 작품은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나라에서 워낙 기본적 권리를 지원해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총을 들고 사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가든지, 아니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 작품을 보면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국가적으로, 정책적으로, 정치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을 고치지 않는 한 가난은 계속된다.”

한마디로 그녀는 환경영화제 이후 “생각이 넓어졌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을 택했고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한 이후, 박진희는 드디어 배우 박진희와 개인 박진희를 분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드라마 <쩐의 전쟁>과 영화 <궁녀>의 촬영이 한달 정도 겹쳤을 당시에도, 평균 두 시간 수면의 강행군을 견디면서까지 수업은 빼먹지 않았다. “그땐 정말 배우 박진희밖에 없었다. 여기선 내의녀 천령, 저기선 돈 때문에 고생하는 주희. 양쪽을 오가면서 두 캐릭터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유일한 시간이 수업 시간이었다. 그래서 절대로 빠지고 싶지 않았다.”

삶이 조금 더 스펙터클해졌으면…

2009년의 계획을 묻는 상투적인 마지막 질문에, 박진희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는 표정이 너무 확연하게 얼굴에 드러났기 때문일까, 그녀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계획을 한다고 해서 마음처럼 안되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다.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삶을 계획하고 살지 않는다. 안달복달 연연해하지도 않고.” 대신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삶이 좀 심심해지는 건 아닐까? “안 그래도 옛날 남자친구는 나더러 ‘어이구, 우리 주지 스님 오셨어요’라고 놀리기도 했다. (웃음)” 일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지만, 개인적인 사생활쪽에서 너무 욕심 부리는 게 없으니 삶이 ‘많이 잔잔하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새해 소망을 이야기한다면 “삶이 조금 더 스펙터클해졌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내년 논문 학기를 남겨두고 있는 박진희에게,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 삶이 많이 스펙터클해질 것이라고 진지하게 얘기했고, 그녀는 바로 학생 자세로 돌입하면서 답했다. “각오하고 있다.” 음, 얼굴에 잠시 그늘이? “하하, 건투를 빌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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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리스트 한송경·헤어&메이크업 제니하우스·의상협찬 쇼퍼홀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