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냥이가 아닙니다.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36~37쪽 참조)의 이름을 듣고 늑대를 떠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그런가 봅니다. 이리는 그 이리(wolf)가 아니지요.
독자 여러분이 이번호 <씨네21>을 받아들 때면 11월11일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1이라는 숫자가 연속 네개나 붙은 행운의 날. 빼빼로데이나 가래떡데이라는 말도 생기기 전인 31년 전의 그날 밤 9시, 전라북도 이리시(지금은 익산시)에서는 행운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사건이 터집니다. 열차에 있던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30톤이 폭발한 겁니다. 59명이 죽고 18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천여명 넘게 다쳤습니다. 바로 영화 <이리>의 모티브입니다. 주인공은 그날 엄마 뱃속에서의 진동으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지적장애인이 된 진서입니다.
저에게 이리는 ‘작은 서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전라북도 익산군의 한 농촌마을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리는 인근에서 가장 크고 가까운, 리도 아니고 면도 아니고 읍도 아닌 시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책가방과 필통 따위의 학용품을 사기 위해 이리로 간 일은 고급스런 추억으로 저의 뇌리를 지배합니다. 그곳을 떠난 것은 열차폭발사고 1년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이리>를 보는 마음이 참 각별했다, 고 쓰려는 건 아닙니다. 너무나 황량하고 처연한 영화 속 이리의 풍경이, 어린 마음으로 동경하던 옛 도시의 이미지와 충돌하여 잠시 혼란을 느꼈을 뿐입니다. 영화 속의 이리는 발음상의 오해를 연상시키는 ‘이리떼’들의 도시처럼 그려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리떼들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녀를 끝없이 물어뜯으며 유린합니다.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베트남 참전전우회’간판이 붙은 컨테이너 막사 앞에서의 장면입니다. 진서는 우악스런 전우회원들에게 윤간을 당한 듯 그 앞에서 망연자실 쓰러집니다. 특정 단체의 이름이 여과없이 나온 터라 조금 의아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베트남 참전전우회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이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봤습니다만, 그렇진 않겠지요. 아무튼 참으로 용감하게 노골적인 장면이었다고 봅니다.
‘베트남 참전전우회’가 이리떼처럼 묘사되는 걸 보며, 머릿속에는 다음주에 개봉될 이스라엘영화 <바시르와 왈츠를>(82~92쪽 참고)이 오버랩됐습니다. 아리 폴만 감독도 한국으로 치면 베트남전 참전군인입니다. 1982년에 레바논 전쟁에 사병으로 참전해 못 볼 것들을 많이 보았고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망각된 참전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 애니메이션은 한편으로 판타스틱하지만, 대단히 사실적인 이리떼들의 광란입니다. 그 절정은 레바논 기독교도 팔랑헤 민병대의 ‘사브라-샤틸라’ 대학살극입니다. 이스라엘군의 방관과 묵인 아래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민간인 3천명이 무차별로 희생됩니다. 애니메이션을 보며 전율을 느낀 건 처음입니다. 이리 열차폭발사고가 단순사고에 가까웠다면, 이 학살은 수대에 걸쳐 증오를 재생산할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재생산을 막는 길 중 하나는 가해자 또는 방관자들의 자성입니다. 이 영화는 그 작은 몸짓이었다고 볼 만합니다.
한국에서도 <바시르와 왈츠를>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온다면 좋겠습니다. 베트남 참전군인 출신이 감독으로 나선다면 어떨까요. 미래의 이리떼 예방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 이리든 저 이리든, 다시는 없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