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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크레이그] 아니, 007이 저런 천한 일까지?
문석 2008-10-31

제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 매력탐구

아직까지도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지노 로얄>에서 완벽하게 리모델링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보여줬던 크레이그는 오히려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꼽힌다. 그는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영국의 아카데미상인 BAFTA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브닝 스탠더드>의 영화상에서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건 2005년 그가 제 6대 제임스 본드로 ‘임명’될 당시의 까칠한 분위기를 생각할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제임스 본드와 007 시리즈의 팬임을 자처하는 블로거들이 미친 듯이 쏟아내던 인신공격성 글과 “내 이름은 블랜드(순한, 매력없는), 제임스 블랜드”(Bland, James Bland) 따위의 헤드라인을 뽑아대던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공세는 잠잠해졌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 ‘취임’ 반대를 위해 만들어졌던 인터넷 사이트(craignotbond.com)도 사라진 지 오래다. 회고해보자면, 카지노를 배경으로 하는 <카지노 로얄>에 출연하는 그가 카드를 칠 줄 모른다든가, 툭하면 총을 갈겨야 하는 첩보원인 그가 총기 소유를 반대한다거나, 심지어 수동변속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본드의 트레이드 마크인 애스턴 마틴 자동차를 몰지 못한다는 지적까지(그는 자신이 스틱을 다룰 줄 안다고 해명한 바 있다) 비판논리는 다양했지만 그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가장 목소리 높여 주장한 바는 그의 외양이 본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머릿카락이 가장 큰 시빗거리

숀 코너리가 기틀을 잡고 로저 무어가 발전시켰으며 피어스 브로스넌이 이어받았던 제임스 본드의 외모와 기질에 관한 전통은 한마디로 느끼한 남성의 매력이다. 훤하게 잘생긴 얼굴과 가슴을 꽉 채우는 털, 쭉 뻗은 키, 느물느물한 태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아랫도리의 공격적 기질 등은 본드라는 왕위를 계승할 배우의 유전자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져왔다. 하지만 대니얼 크레이그를 볼라치면 어떤 항목 하나 부합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의 단단하고 강직한 얼굴은 본드 특유의 기름진 미소를 짓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역대 제임스 본드 중 가장 작은 키(178cm)와 항상 성실하고 진지하며 여자 앞에서 외려 자세가 반듯해지는 그의 습성은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첩보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특히 머리카락은 가장 큰 시빗거리였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부터 5명의 전임자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본드의 중요한 특징은 숱 많은 검정 또는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크레이그의 찬란한 금발과 넓은 이마가 반대파들의 먹잇감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금발의 본드’라는 말은 ‘크레이그 ≠ 본드’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 타임스>의 주장대로 선배 본드 또한 머리칼에서만큼은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숀 코너리는 007 후반부에 이르러 ‘속알머리’를 메우기 위해 부분가발을 써야 했고, 피어스 브로스넌 또한 머리를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 헤어피스를 붙였으며, 로저 무어는 머리를 심기까지 했다.

사실 머리를 제외하면 대니얼 크레이그는 “183cm, 76kg, 푸른 눈, 검은 머리, 술은 마시지만 지나치지 않고…”라는 이언 플레밍 버전의 오리지널 제임스 본드에 가장 가까운 배우다. 외양뿐 아니라 크레이그는 차갑고 냉혹하며 인간적 면모 또한 가진 소설 속의 본드를 영화에서 구현한 첫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살인을 통해 먹고산다”는 크레이그의 말처럼, <카지노 로얄> 속 본드는 멋진 슈트를 입은 채 우아한 포즈로 권총을 딸깍거리던 기존 007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 육체적 고난과 심리적 갈등을 느끼게 하는 초반부 첫 ‘살인의 추억’ 장면부터 마다가스카르의 대추격신, 공항에서의 격전, 그리고 베니스에서의 혈투에 이르기까지 이 최신 버전의 제임스 본드는 시종 몸으로 부딪히고 돌파하고, 끝내 부서진다. 대부분의 위기를 외교적인 언사와 잔머리, 그리고 Q요원이 개발한 첨단 신무기에 의존해 타개하던 구식 007이 봤다면 ‘아니 007이 저런 천한 일까지 해야 하나’라고 한탄할 법하게도 크레이그의 본드는 자신의 육체만으로 험한 난관을 뚫고 나간다. 기존의 본드가 원작 소설에서처럼 영국 사립학교 이튼 출신의 상류계급이었다면 그는 생존을 위해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하는 ‘노동계급 출신 본드’로서의 인상마저 풍긴다. 카지노 앞에 차를 세운 어떤 부자가 본드를 주차요원으로 착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동차 키를 툭 던지는 <카지노 로얄> 속 장면은 그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근육을 키우되 “그저 도어맨처럼 보이면 됐다”는 크레이그의 농담처럼, 그는 귀족형 첩보원이라기보다 생계형 첩보원에 가깝다.

안젤리나 졸리에 맞서는 악당으로도 출연

본드의 이러한 육체성 또는 범상한 면모는 대니얼 크레이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바가 크다. 1968년 영국 체스터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부터 학교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11살 때 사립학교 대신 공립학교를 선택해야 했던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을 키우기 시작했고, 16살에는 런던에 있는 영국 국립청소년극단(NYT)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엿한 배우로 성장하는 꿈만을 오롯이 꾸기에 대도시 런던에서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 그는 당시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레스토랑의 주방과 홀을 오가며 일했다. 밤에는 친구 집 거실 바닥에서 지치고 여린 몸을 달래야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길드홀 스쿨 오브 뮤직 앤드 드라마에 진학했다. 그리고 1991년 졸업한 뒤로는 가난한 프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다양한 무대 공연으로 명성을 쌓은 그는 <파워 오브 원>(1992)에서 단역을 맡으면서 영화에 데뷔했고, <북쪽의 우리 친구>라는 <BBC2TV>의 시리즈물을 통해 서서히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사랑은 악마> 등 여러 편의 TV물에 출연했던 그가 영국 바깥에 자신을 드러낸 것은 <툼레이더>(2001)에서 안젤리나 졸리에 맞서는 섹시한 악당을 연기하면서부터다. 이후 <로드 투 퍼디션>(2002), <마더>(2003) 등으로 주목할 만한 배우로 떠올랐다. 물론 007 시리즈가 출세의 도약대 역할을 한 건 맞지만, <레이어 케이크>(2004)에서 발휘한 어둡고 창백한 매력, <실비아>(2003), <엔듀어링 러브>(2004)의 풍부한 표현력, <뮌헨>(2006)에서 자아낸 싸늘한 분위기 등은 크레이그가 007이라는 최고급 슈트 없이도 세계적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 “눈에 멍이 들었고, 칼에 베였으며, 타박상을 입었다. 근육통도 있다. 본드를 연기하면서 멍이 들지 않는다면 제대로 연기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헝그리 정신과 연기에 대한 진지함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따져보면, 본드 역할을 맡은 뒤 크레이그가 얻은 것보다는 크레이그를 기용함으로써 제작자들이 취한 이득이 훨씬 많아 보인다. 이 영화가 전세계에서 6억달러를 벌어들인 데는 시나리오작가 폴 해기스와 감독 마틴 캠벨도 한몫했지만, 뭐니뭐니해도 크레이그가 기여한 바가 가장 크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니 휴 잭맨, 콜린 파렐, 에릭 바나, 이완 맥그리거 등을 제치고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의 6번째 왕관을 쓰게 된 건 제작자인 바버라 브로콜리와 마이클 윌슨에게 영광스런 일일 수밖에 없다. 두 프로듀서들의 제안을 “시나리오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출연을 결정할 수 없다”며 한번 거절했던 그가 해기스의 시나리오를 보고 결국 마음을 돌리지 않았던들 007 시리즈는 “탈냉전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쓸쓸하게 퇴장할 수도 있었다.

<퀀텀 오브 솔러스>에 대한 기대감도 대부분 크레이그의 존재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전편보다 강도가 높고 분량도 2배 많은 스턴트를 직접 소화했다”는 그의 말만큼 확실한 홍보문구도 없으며, “전편보다는 좀더 젠틀하고 고전적인 느낌의 본드가 될 것”이라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이야기만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낚싯바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 때문에 크레이그가 또 다른 기대작인 <워치맨>의 로어샤크 역을 맡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안타깝게 하지만, “만약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제임스 본드를 계속 보여줘야 한다면 이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배우의 007 연기는 그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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