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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Sylvia Sylvia

2003 영국 15세이상관람가

드라마, 멜로·로맨스 상영시간 : 114분

개봉일 : 2005-04-15 누적관객 : 4,372명

감독 : 크리스틴 제프스

출연 : 기네스 팰트로(실비아 플라스) 다니엘 크레이그(테드 휴즈) more

  • 씨네215.00
  • 네티즌5.63

사랑, 그 하나만 간직했던 찬란한 생애

사악한 내 마음의 약탈자
언젠간 그이로 인해 죽음을 맞을지라도 당신만을 내 운명으로 기억하리라


1956년 이른 봄 영국. 한 파티장에서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온 미국 학생 실비아는 장래가 촉망되는 문인이자 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테드 휴즈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테드 역시 실비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끌림을 느끼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행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비아의 병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에 대한 집착과 테드의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점점 어긋난다.

결국 둘은 자꾸만 빗나가는 사랑으로 갈등을 반복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관계를 유지해 간다. 실비아는 대학 강의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역량 있는 여류 시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고, 테드 또한 시인으로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만큼 불안하기만 했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테드의 외도로 결국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혼 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과 이별의 아픔으로 힘겨워 하던 실비아는 마치 광기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 더욱 창작 활동에 매진하여 다작의 시와 소설을 완성하지만 결국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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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별점 (2명참여)

  • 6
    박평식여류작가를 여성작가로 바꿔 불러 마땅한 이유
  • 4
    황진미여성시인 영화인가 했더니, 의부증 걸린 멜로드라마네
제작 노트
Production Story

The Genesis of the film: 영화의 시작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에 대한 영화 만들기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이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아직도 이 커플이 서로의 모순된 점을 지니며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무려 4년 동안 이 영화를 추진해왔던 프로듀서 앨리슨 오웬은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들을 겪어야만 했다. “항상 실비아 플라스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광적인 팬이었죠. 마치 십대소녀의 치열하고도 복잡한 감성을 그대로 담아낸 듯 보였거든요. 그리고 테드와 실비아 사이의 엄청난 러브 스토리를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죠. 하지만 막상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려고 하니, 테드 휴즈가 죽기 직전에 발간한 책 [생일 편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책에는 그가 발표한 위대한 시들과 작품은 물론, 실비아와의 관계들이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에게 불명예가 될만한 몇 가지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결국 그가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은, 무언의 인정(책을 낸지 얼마 후에 사망함)이 마치 이 작품을 만들도록 허락하신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후 오웬은 곧바로 작가와 감독을 물색하기 시작, 그 1순위로 자신과 다른 작품을 준비 중이던 작가 존 브라운로우에게 영화의 시나리오를 맡기게 된다. 다른 유명 작가들도 모두 탐내던 이 프로젝트가 그녀에게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 자신의 옥스포드 대학시절 전공을 수학에서 문학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가 실비아의 시를 접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 이후로 실비아에게 가진 열정과 애정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시나리오 작업의 적임자를 구한 앨리슨 오웬은 감독을 찾는다. “우리가 감독을 찾고 있을 때, 그 무엇보다 관객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누군가를 절실히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에는 영화가 성공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이죠. 크리스틴 제프스의 [Rain]을 보았을 때, 나는 5분간이나 말을 할 수 없었고 감정이 다 빠져나가는 듯 동요됐습니다. 실로 놀라운 영화였죠.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순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틴 제프스 또한 오래전부터 실비아 플라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열혈팬이었다. “나는 실비아 플라스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 외에도, 그녀의 엄청나게 치열하고 창조적인 열망이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담아내고 싶었고, 또한 그것이 남편과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그녀는 [실비아]의 완성 후 자신의 견해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력하였다. “뉴질랜드 농장에 있을 때 나는 에이전트로부터 한 권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작품이 바로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룬 영화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내 오랜 꿈이 실현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다음에는 바로 그녀를 꼭 닮은 기네스 팰트로와 투자자를 만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Behind Story Of Casting: 캐스팅 비화

“감독과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우리는 5분 만에 기네스 팰트로를 캐스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네스 팰트로가 실비아를 맡았을 때, 그녀의 캐릭터와 실비아의 캐릭터는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닮아 보였습니다. 크랭크인 첫날의 촬영 마무리 단계에서 이내 자연스럽게 기네스 팰트로와 닮은 실비아 플라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제작자 오웬은 캐스팅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는 수년 동안 기네스 팰트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에 기네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21살이었을 때, [파커부인의 악순환]이라는 영화를 하고 있었는데 함께 작업하던 분들이 너는 언젠가 실비아 플라스를 연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했었죠. 촬영 마지막 날 그들이 [The Bell Jar]라는 실비아의 책을 주었고 다 읽은 후에는 그녀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웬과 휴즈가 나에게 영화 출연 제안을 해왔을 때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지요” 기네스 팰트로는 이 작품의 주제에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과감하게 접근했다. "사람들이나 실비아의 친구들은 그녀를 생기가 넘치는 인물로 묘사를 했지만 사실 그녀는 매우 복잡한 사람이었어요. 아마도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매우 힘든 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였어요."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또한, 안타깝게도 기네스 팰트로의 아버지가 영화제작 2주전에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작품에 모두 쏟아 부었다. 이처럼 외적으로 실비아와 플라스와 꼭 닮은 모습과 기네스 펠트로의 내적인 슬픔을 [실비아]에 온전히 담아낸 그녀의 연기는 근작 중 최고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실비아 역할에 이어, 기네스 팰트로와 잘 어울리는 상대 배우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는 제작자 오웬에게 대니얼 크레이그는 매우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는 어릴 적부터 테드 휴즈의 시 낭독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그의 집으로 몰래 들어갔던 적도 있었죠. 테드 휴즈를 만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항상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캐릭터는 결국 배우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감독은 그런 그에 대해 "대니얼은 매우 열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거칠고 날카로운 푸른 눈을 가지고 있죠. 나는 기네스와 대니얼 둘이 자신의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면서 그들의 연기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신이 났었어요!”
조연을 뽑는 것 또한 영화를 완성하는데 매우 중요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캐스팅은 바로 기네스 팰트로의 실제 어머니인 블라이스 대너가 실비아의 엄마인 오렐리아 플라스의 역할을 맡게 된 것. 두 모녀가 함께 출연한 영화는 [실비아]가 처음은 아니다. 블라이스 대너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이전의 다른 세 프로젝트에서 기네스의 엄마 역할을 즐겁게 했어요. 놀라운 것은, 내가 종종 그 애의 진짜 엄마라는 것을 잊는다는 것이죠. 기네스는 그녀 자신을 지울 만큼 다른 역할로 몰입하는 완벽한 능력을 가지고 있죠. [실비아]의 시나리오는 아주 훌륭했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기네스와 대니얼의 섬세한 연기를 촬영 내내 즐기게 되었습니다.”

About Movie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열정적이고 고독했던 삶의 여정

로댕을 사랑했지만 비극적 인생을 살다 간 여류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이나 남편과의 이별 후 절대적인 고독으로 몸부림 친 화가 프리다 칼로에서 알 수 있듯, 천재적인 예술가의 평범치 않은 인생에서 그들을 이끈 원동력인 동시에 파멸로 이르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움직임이었다.
이 영화 역시 실비아와 테드가 첫 만남을 가진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 시절부터 1956년 결혼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거친 삶의 소용돌이와,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낸 재능 넘치는 작품 창작의 열정과 그녀에게 명성을 얻게 해준 작업들. 그녀가 겪은 삶의 폭력성. 두 아이를 출산한 후 테드와 헤어지고 결국 서른을 갓 넘긴 나이(1963년)에 자살에 이르는 극단적인 삶의 마감을 택한, 절대적이자 운명적인 사랑의 비극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행운보다 불행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고, 사랑을 하면서도 늘 고독했던 그녀의 인생이지만 다른 누구의 그것보다 관객을 움직이게 만드는 건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했던 실비아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자전거 산책을 하면서도 시를 쓸 수 있겠지만 나는 시를 쓰려 해도 빵만 구워져요.” 라는 실비아의 읊조림처럼, 너무나 사랑했지만 감정이나 생각까지 테드와 함께 나누지 못한 실비아의 절대적인 사랑이 모든 관객의 감성을 깊고 조용히 자극하며, 작지만 넓은 파장이 존재하는 감동의 물결로 다가가게 된 것이다.

영화로 느끼는 실비아. 그녀의 위대한 시(詩)의 단편들

여성으로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이며, 사회적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세상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당신의 내면을 채워주는 누군가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실비아의 시는 영화 속 그녀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
실제로 기네스 팰트로는 인터뷰에서 “그녀의 시를 읽음으로 해서 내 마음속에 감정의 공간이 하나의 틀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에게는 그곳을 채워가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영화를 찍는 동안 나에게 직접적으로 예술적인 영감을 넣어주고 연기에 도움을 주고 채워준 것은 무엇보다 그녀의 뛰어난 시였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실비아의 시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했으며 그 결과 그녀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이후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얻게 되었다.
총명한 두뇌를 지녔으며, 엄마라는 역할이 있고, 한 가정의 안주인이었으며, 여성이라는 성별을 지녔으며 예술가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그 누구보다 깊게 체험한 존재였고,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용솟음 칠 때 그것을 자신으로 체화하여 창작해내는 뛰어난 시인이었던 실비아.
하지만 자신의 가슴속에 꿈틀대는 그것들은 그녀를 결국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그것은 그녀의 또 다른 페르소나였던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감정과 혼이 살아있는 시를 발표한 위대한 시인을 만들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영화를 본 누구라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한 여성의 진실된 감정과 삶 속의 다양한 초상화를 음미하는 소중한 시간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Sylvia & Ted

예술혼과 사랑의 엇갈림 속에 공존했던 실비아 플라스

1932년 메사추세츠 주 자메이카 플레인 태생의 실비아 플라스. 땅벌 전문가인 아버지 오토 플라스는 독일인으로 공부를 위해 미국에 유학. 졸업 후 보스턴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가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역시 고등학교 영어와 독어 선생님이었다. 교육자 집안으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8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인생의 불안과 강박증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삶에 드리워지기 시작. 9살에 자살을 시도한다.
불안한 성장을 거쳐 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학교 신문의 편집과 잡지 발행인으로서 일하게 된다. 그녀의 첫 번째 출판물은 여덟 살 때 쓴 짧은 2행시로, Boston Sunday Herald에 실린 작품이다. 이후에도 창작활동은 계속되었고, 무려 45번의 거절을 받은 후에, 잡지 세븐틴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발탁. 이것을 인연으로 세븐틴, 마드모아젤, 하퍼스 바자 같은 잡지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갖게 된다. 그 후 그녀는 하버드 여름학교의 프랭크 오코너 창작수업을 신청했으나 입교를 거절당하고, 학위 논문에서의 부진은 물론 학업에서의 연이은 실패가 계속된다. 거듭되는 실패는 그녀를 극단적인 초조함과 불안으로 몰고가 결국 1953년 8월 자살시도로 이어지나 실패한다. 이후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음해 평점 3.9 이상의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 후 1955년 Newnham College에 진학,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을 가게 된다. 다음해 시 전문잡지 성 보톨프의 파티에서 테드 휴즈를 만나 그 해 6월 결혼. 스미스 대학으로부터 영문학 강사 자리를 제안받고 테드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다. 약1년간 강의 후에 보스턴에 있는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정신상담 치료 클리닉의 접수원으로 일을 하는 등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한다.
1959년 12월에 부부가 영국으로 돌아간 이듬해4월, 첫 딸 프리에다 레베카를 출산. 임신 기간동안 실비아는 William Heinemann 출판사와 출판계약을 체결하고 1960년 10월, 자신의 첫 번째 시집 [거상(The Colossus)]을 발간한다. 1962년 1월 17일 아들 니콜라스가 출생하지만, 그 해 7월 실비아는 테드 휴즈가 애시어 웨빌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10월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의 아픔을 창작활동으로 매진한 그녀는 다음달에 그의 유고시인 [에어리얼(Ariel)]에 수록될만한 시들을 단숨에 26편이나 써내려 간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의 후유증과 사랑의 실패에 대한 좌절로 끊임없는 괴로움에 1963년 2월 11일 자살을 결심하고, 가스 오븐에 얼굴을 박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해 사망. 짧은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 그녀의 주요 작품들은 사후에 유작모음의 형태로 출판. 특히 [The Bell Jar]는 그녀가 1963년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자살 하기 전 이미 출판계약을 한 상태였으므로 자살하기 전 발표한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함)이며, 그녀가 죽기 몇 주 전까지 치열하게 써내려 갔던 주옥 같은 작품들은 유고시집 [에어리얼(Ariel)]로 묶여져 1965년 출판되었고 세계적인 명성을 주었다. 1982년에는 [시선집 모음]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그녀가 사망한 후 20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위대했지만 사랑에는 실패했던 계관 시인 테드 휴즈

1930년 8월17일 영국 요크셔의 페니스에서 1차 대전 참전용사인 퇴역군인 아버지의 세 번째 아이로 출생한 테드 휴즈는 1948년 팸브로크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고, 1954년 졸업 후에 런던으로 이주한다. 케임브리지에서 주말마다 지인들-마이클 보디, 루카스 메이어-과 문학모임을 갖고 시 전문잡지 성 보톨프에 관한 리뷰를 쓰고 회지를 만들게 된 기념으로 1956년 2월 26일 자축파티를 연다. 파티의 2층 연회장에는 케임브리지의 여학생회 멤버들이 초대 받아 와있었고 마이클 보디가 트럼본을 담당하는 재즈 밴드의 연주가 흐르는 가운데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결혼 후 두 명의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Devon에서의 쓸쓸한 시골생활은 둘 사이를 점점 더 소원하게 만들었고, 1962년에 결국 이혼을 선택한다. 그것은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즈와 애시어 웨빌의 관계를 알게 된 직후였다. 휴즈는 1965년 애시어 웨빌과의 사이에 슈라라는 딸을 얻게 되지만 1969년 애시어는 그녀의 딸과 함께 자살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자신이 자살하기 위해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으면서도 두 아이가 잠든 사이 빵과 우유를 준비해놓고 죽은 반면, 애시어는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한 똑같은 방법 그대로 가스를 마시고 죽는 것은 물론, 어린 딸과 함께 자살하였으므로 비난을 받았다.)
1984년 영국 문단에서 계관시인으로 인정,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 테드 휴즈는, 창작 초기부터 명성이 시작된 그는 첫번째 시집인 [빗속의 매(The Hawk In The Rain)]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하퍼스 시인상은 물론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고, [오비드 이야기(Tales From Ovid)]로 화이트 브레드상을 수상했다. 1984년 이래 계관시인이자 고향인 서부 요크셔 방언으로, 황량한 영국 풍경과 역사 너머의 신화들을 그려낸 뛰어난 시인이었다는 점이 작가로서의 테드 휴즈에 대한 평이다.
실비아의 자살 이후에 그에게는 숙명처럼 그녀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실비아는 사후 테드 휴즈 보다 더 큰 유명세를 타게 된 시인이 된다. 그녀의 유고 시집과 일기는 모두 저작권 상속자인 테드 휴즈의 편집을 거쳐 나왔는데, 테드는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자의적으로 잘라냈다는 비판에 계속 시달려왔다. 실제로 그는 자식들이 읽을까 두려워 실비아의 일기 마지막 부분을 없애버렸다고 인정해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비난 속에서도 평생 실비아에 대한 코멘트를 아껴오던 테드는 1998년 1월 출간한 시집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에서 그녀를 회상했다. 시집 속의 실비아는 아주 예민하고 현명한 여자이기도 했지만 감정적으로 극히 불안해 늘 자살충동에 휩싸이는 여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죽은 아내에게 35년간 억압 받고 살았던 이 계관시인의 마지막 작품 [생일 편지]도 역시 <오비드 이야기>때 수상했던 화이트 브레드(Whitbread Poetry)상을 수상했다. 1998년 10월 28일 암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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