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5일부터 11월7일까지 아트선재 아트홀에서 ‘사랑의 기억 저편-에릭 로메르&누벨바그 작가전’이 열린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클레르의 무릎>(1970), <아름다운 결혼>(1982), <해변의 폴린느>(1983),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1987)를 비롯해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1959), 프랑수아 트뤼포의 <훔친 키스>(1968),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1999)까지 총 8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우디 앨런에 버금가는 ‘수다의 영화’를 만들었던 에릭 로메르는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연배는 높았지만 감독으로의 데뷔는 가장 늦었다. 그는 ‘도덕 이야기’, ‘희극과 격언’, ‘4계절 이야기’ 등의 연작영화를 즐겨 연출했다. ‘도덕 이야기’를 대표하는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이혼한 여의사 모드 앞에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미혼남 루이에 관한 영화이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루이와 모드가 함께 보내는 하룻밤이다. 유혹, 망설임, 거절의 과정을 무척 섬세한 손길로 그려내는 이 장면에서 로메르의 관심은 상황 자체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간과하기 일쑤이지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도덕적, 감정적 공백과 그 앞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는 루이의 모습이다. 잘 것인가, 말 것인가! 루이는 모드의 집요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키스만 주고받는다. 그렇게 루이는 하룻밤을 버틴다. 루이는 모드와 몸을 섞는 대신 말을 섞는다. 그 밤 이후 루이는 평소에 짝사랑하고 있던 여자에게 청혼하고 이내 결혼에 성공한다. 로메르의 영화에 등장하는 수다는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와 망설임의 감정 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로메르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사람들의 행동보다 그 행동을 할 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루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던 것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아내의 감춰진 진실을 알게 된 반전 이후, 이에 대처하는 루이의 행동 속에 내재한 그의 도덕적 판단의 내용이다. 도덕 이야기 연작의 또 다른 작품인 <클레르의 무릎>에서는 결혼을 앞두고 친구의 딸을 만나 그녀의 무릎에 집착하게 된 한 남자를 보여준다. 남자는 발목과 성기의 중간인 무릎에 머문 시선처럼 욕망과 도덕 사이 중간에서 망설인다.
<아름다운 결혼> <해변의 폴린느>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희극과 격언’ 연작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로메르의 영화는 수다스러우면서도 어떤 여유로움이 감도는 특징이 있다. 이는 영화 속 사건이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도시 근교의 여유롭고 넉넉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이후 연작인 ‘4계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희극과 격언 연작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격언과 실제 삶간의 간극을 드러낸다. 실제로 희극과 격언 연작은 ‘스페인에 성을 짓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아름다운 결혼>), ‘말이 많으면 화를 자초한다’(<해변의 폴린느>), ‘내 친구의 친구는 또한 나의 친구이다’(<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등의 격언을 차용하고 있다. 로메르의 관심은 격언과 실제 삶간의 간극과 이에 봉착한 인물들(주로 여성 인물들이 주인공이다)이 자기 나름대로 삶의 도덕적 기준을 찾아가는 여정을 위트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중 한편을 택해야 한다면, 난 단연 <아름다운 결혼>이다.
도덕주의자 에릭 로메르에게 베아트리스 로망이 있다면, 영화주의자 프랑수아 트뤼포에게는 장 피에르 레오가 있었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의 앙투완 드와넬(장 피에르 레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지속적으로 발표했고, <훔친 키스>는 그 세 번째 작품이다. 어느덧 청년이 되어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앙투완 드와넬의 사랑담 속에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아니 되어야만 하는 ‘앙투완 드와넬-장 피에르 레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앙투완이 사랑했던 영화 속 유부녀의 말을 빌려 <훔친 키스>의 코믹스러움을 말한다면 ‘재치있는 예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상영되는 두 작품 역시 간과할 수 없음에 분명하다. ‘알랭 레네는 유성영화 이후 최초의 현대적인 감독’이라는 에릭 로메르의 말마따나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영화적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한 작품이고,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는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는 한 감독의 여정 속에 기억, 망각, 영화(사), 이미지를 탐구한다.
‘사랑의 기억 저편-에릭 로메르&누벨바그 작가전’, 사랑에 대한 수다를 통한 도덕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사랑을 매개로 한 영화 매체의 실험까지. 작지만 그 스펙트럼은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