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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배우스케치] 정유미

대부분 사람들은 정유미를 한국 인디영화의 사랑스러운 마스코트 정도로 생각하죠. 하긴 데뷔 뒤 몇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인터뷰 울렁증, 비전형적인 연기 스타일, 여전히 일반인의 풋풋함을 잃지 않은 외모, 인디영화계와 꾸준히 맺고 있는 유대를 고려해보면 다른 이미지로 생각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이런 걸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지금까지 정유미가 과연 단 한번이라도 보편적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한 적 있나요? 제 답은 아무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씩 따져보죠. <사랑니>의 17살 인영은 아무리 봐도 살짝 맛이 갔습니다. 집착과 망상에 빠진 위험한 스토커예요. <가족의 탄생>의 채현은 주변 사람들에겐 자애의 여신이지만 정작 남자친구 경석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죠. <좋지 아니한가>의 하은은 원조교제를 하는 불량소녀고요. <케세라세라>의 한은수는 얼핏 보면 평범한 한국 미니시리즈 캔디처럼 보이죠?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을걸요. 일단 사랑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은근히 섬뜩하고 위험한 사람이에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주인공은 어떠냐고요? 무척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그 사람은 짝사랑의 물화이지 구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여기서 포인트는 ‘보편적’입니다. 위에서 험악한 말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이들은 모두 여전히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첫사랑과 사악한 우주가 만들어내는 혼란 속에 사로잡힌 17살 인영은 사랑스럽지 않나요? 길가의 꽃 하나에도 애정어린 시선을 주는 채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전 채현이 무심하게 경석을 학대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을 느끼지만 그거야 제 변태성향 때문이니 무시하셔도 되고) 원조교제로 돈을 버는 동안에도 발레리나의 꿈을 간직한 엉뚱 소녀 하은은 어떤가요? 아무리 중반 이후의 집착과 일탈이 무서워도 <케세라세라>의 은수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귀여운 TV 미니시리즈 캔디입니다. 단지 이들은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애정을 호소하지 않고, 그런 표면적 사랑스러움과 공존하는 어두움을 무시하지도 않을 뿐이에요.

이렇게 보면 정유미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배우입니다. 대부분 관객은 정유미를 아주 쉽게 봐요. 하는 행동이나 표정이 늘 불안하고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예쁘거나 야무져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보호본능이 느껴지지요. 옆에서 얼러대며 까꿍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쉬운 이미지를 믿고 이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받아들이면 큰코다치게 되는 거죠. 배우가 그냥 귀엽기만 하다면 이 효과는 충분히 살아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정유미는 캐릭터의 어두움을 거부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뉘앙스를 굉장히 잘 살려냅니다. 이 배우에게 사랑스러움과 어두움은 분명한 경계선을 그리며 구분되지 않아요. 늘 경계선 부근에서 아슬아슬하게 진동하면서 양쪽을 오가지요. 이게 얼마나 의도적인 연기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배우로서 정유미의 이런 이미지와 위치는 늘 효과적으로 활용돼왔습니다.

곧 이 배우의 차기작들이 연달아 개봉됩니다. <그녀들의 방>의 언주는 각본만 보면 애교가 전혀 없는 우울한 캐릭터인데, 배우와 어떻게 연결될지는 영화를 봐야 알겠네요. <차우>의 경우는 잘려나간 사람 손을 태평스럽게 집어든 정유미를 찍은 스틸이 너무나 정유미다워서 키득거렸던 경우고요. 오히려 전 이미지 면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오이시맨>이 조금 불안해요. 배우 정유미의 이미지가 가장 위험한 건 사람들이 정유미라는 배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그대로 재생산하기 시작하는 때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걱정이 틀리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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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