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서크는 독일 출신인데, 자신은 미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제자이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 동료라는 점을 종종 자랑하곤 했다. 50년대 중반 할리우드의 유니버설에서 이른바 ‘여성 최루영화’들로 큰 흥행성공을 거뒀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예는 거의 누리지 못할 때였다. ‘아줌마들’ 호주머니를 노리는 싸구려 애정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돼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에 대한 이런 낮은 평가를 뒤집는 데는 서크 자신의 설명이 효과를 봤다. 파노프스키와 브레히트를 거론하며, 멜로드라마의 특성과 매력에 대해 말하는 감독이라면, 함부로 낮잡아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사회가 억압적이면 멜로드라마는 번성한다”
서크(1900~87)는 독일에서 20대에 이미 유명 연극연출자가 됐다. 29살 때 그는 예술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시립극단의 연출가였다. 그의 영화에서 연극적인 세트가 돋보이는 데는 이런 무대 경험이 작용했다. 그는 나치 시절 영화를 만들며 단숨에 유명감독이 됐는데, 권력과의 불화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했을 때 그가 받은 푸대접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고, 그런 역경을 뛰어넘은 점 때문에 지금은 더욱 존경받는 감독이 됐다.
서크의 설명에 따르면 나치 정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미국사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압적이기는 비슷했다. 전후의 냉전시대도 이런 분위기는 여전했다. 무슨 말을 직설법으로 하기가 껄끄러웠다. 정치적인 망명을 한 감독으로서 사회적인 문제에 민감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멜로드라마가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권력은 이런 감상적인 이야기를 문제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권유한다는 이유에서다. “사회가 억압적이면 멜로드라마는 번성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랑을 전면에, 그리고 사회비판을 배면에 배치하는 서크 특유의 멜로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서크는 록 허드슨이라는 미남 배우를 내세워 무려 8편의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최고작으로 꼽히는 게 바로 <바람에 쓴 편지>(1956)이다. 굳이 파노프스키의 이름을 꺼내지 않아도, 한눈에 그의 컬러와 상징에 대한 대단한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푸른 초저녁을 배경으로, 바벨탑 같은 석유 굴착기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길을 노란색 스포츠카가 미친 듯 질주하는 게 영화의 첫 장면이다. 일몰, 곧 파멸의 시간과 광기, 그리고 자본주의 혹은 정욕의 상징들이 한꺼번에 제시되는 것이다.
멜로드라마 속에 사회비판적인 주제를 담았지만, 서크는 이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브레히트와의 관계를 자랑하는 것 같은데, 서크는 그런 주제들을 화면 아래 숨긴다. 대신 표면은 전형적인 통속극이다. 그런 과잉의 표면을 직설법으로 읽든 비유법으로 읽든 이는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파멸의 씨앗을 암시하는 서크 드라마
<바람에 쓴 편지>를 본 관객이라면 대개가 이 영화는 록 허드슨과 로렌 바콜이 주연이라기보다 조연으로 나온 로버트 스택과 도로시 멀론이 주연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특히 석유재벌의 망나니 딸인 메릴리 역의 도로시 멀론은 원래 갈색머리인데, 악녀로 변신하기 위해 유혹적인 금발로 염색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이며, 마조히스트적인 자기 파괴자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미치(록 허드슨)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해하듯 도시의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맺으려 든다. 그녀가 주유소 직원과 하룻밤 즐기려다 회사의 청원경찰에 붙들려 집에 온 날 밤, 붉은색 란제리를 입고 미친 듯 맘보춤을 추는 장면은 흔히 할리우드 최고의 부친살해 장면으로 거론된다. 이층에선 아버지의 권력에 반항하는 딸이, 혹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못난 딸이 ‘자해의 춤’을 추고 있고, 이를 중지시키려던 아버지는 그만 계단에서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이다.
오빠 카일 역의 로버트 스택 또한 ‘아름다운 패배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자식처럼 키운 미치만 사랑하고, 친아들은 포기한 듯 키웠다. 아버지에 대한 인정욕망이 크면 클수록 그는 미치에게서 치유할 수 없는 패배감만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술로 자신을 고문하고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겨우 드러내는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때, 관객은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동일시를 느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마셔대는 위스키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그의 삶의 조건은 보통 남자들의 그것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주연들의 이성보다는 조연들의 광기가 더욱 강조돼 있다. 서크의 독일 귀환 시절 그의 제자였던 파스빈더는 “광기는 희망의 신호다”라며 바로 이런 점을 찬양했다. 다시 말해 ‘정상’으로 내모는 획일적인 이성이 문제이고, 이에 반항하는 ‘광기’가 내일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못난 자식들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그 모든 이유는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돼 있지만, 바로 그것에서 파멸의 씨앗을 암시하는 게 서크 드라마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다음엔 서크의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을 각색한 파스빈더의 멜로드라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1974)를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