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2007년/85분/아리 폴만/개막작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20년째 전쟁의 악몽을 앓고 있는 친구를 만난 아리는 그와 함께 참전했던 레바논전에 대한 기억이 송두리째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체 무엇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은 감독이 1982년 당시 같은 부대에 있었던 이들의 증언을 수집하며 증발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좇는다. 그가 추적하는 사건의 핵심은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의 친이스라엘 민병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민간인 수천명을 도살한 ‘사브라-샤틸라 학살’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알려진 참사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인간의 내면 깊숙이 렌즈를 들이댄다. 다큐멘터리적인 질료를 애니메이션의 그릇에 담은 폴만은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굴절된 기억과 무의식, 환상을 숨막힐 정도로 아찔하게 펼쳐놓는다. 전장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토악질에 시달리던 병사는 어느새 커다란 여인의 나체에 매달려 바다를 유영하고, 공포에 질려 총을 난사하던 젊은 병사는 죽음의 스텝을 밟아가며 미친 왈츠를 춘다. 책장에서 뜯어낸 역사가 아닌 요동하는 인간의 기억으로 쌓아올린 역사. 두려움과 광기, 분노와 절망이 거대한 장송곡처럼 울려퍼지는 <바시르와 왈츠를>은 전쟁이 파괴한 인간성에 대한 대담하고도 강력한 증언이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이자 최대의 화제작 중 하나로 황금종려상의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작품이다.
<아메리칸 좀비> American Zombie 그레이스 리 | 2007년 | 90분 | 미국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LA에는 좀비가 실재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좀비, 아티스트, 미혼녀 좀비 등 그 수만 해도 무려 5천~7천명. 좀비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사회의 일원이다. ‘좀비도 사람이다’라는 주장하에 활동하는 좀비권익단체는 공동체 일원으로서 좀비의 생존권과 비주류를 위한 법률문제까지 담당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그레이스는 동료 아이반의 제안으로 좀비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착수한다. 자,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가짜다. 다큐 형식을 빌려온 가짜 다큐, <아메리칸 좀비>는 좀비가 실재한다는 재밌는 가정에서 출발한 모큐멘터리다. <그레이스 프로젝트>로 소수인종에 대한 유머러스한 풍자를 시도한 그레이스 리 감독은 좀비라는 대상을 통해 다시 한번 미국 내 소수자들의 입장을 표출한다. 영화 속 좀비는 그래서 보통의 좀비영화에서 보이는 폭력적이고 혐오스러운 모습과 달리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처럼 그려진다. 영화 속, 좀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으려는 그레이스와 달리, 그들의 위협적인 모습에 혈안이 된 아이반의 대립된 견해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은 물론 미디어의 잘못된 시각까지 비판하는 이 영화의 핵심이자 쓴소리다. 독창적인 시각과 신선한 발상으로 <아메리칸 좀비>는 슬램댄스영화제, 시체스영화제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엽기좀비 오토> Otto; or, Up With Dead People 브루스 라부르스/ 2008년/ 94분/ 캐나다, 독일/ Q리어스
기억을 잃어버린 오토라는 이름의 좀비가 로드킬당한 동물들을 뜯어먹으며 베를린에 당도한다. 섬광처럼 번득이는 생전의 이미지 때문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던 오토는 언더그라운드 영화 제작자인 메데아 얀을 만난다. 메데아의 목적은 평생의 숙원으로 만들어온 정치-좀비-게이 포르노영화 <죽은 자와 함께>(Up with Dead People)의 주인공으로 오토를 기용하는 것이다. 대체 왜 <엽기좀비 오토>라는 재치도 재미도 없는 제목을 가져다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제목에 넘어가서 이 영화를 선택할 관객이라면 좀 곤란할 거다. 이건 호러영화인 동시에 코미디영화이며 동시에 게이포르노영화이며 전체적으로는 실험적인 뉴퀴어시네마의 일족이다. 게이 펑크 잡지와 게이 포르노 제작 경력이 있는 논쟁꾼 브루스 라부르스 감독은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테크닉을 마구 버무리고 하드코어 게이섹스 장면을 탐욕스럽게 화면에 펼치는 등 유쾌하게 이미지 장난을 펼친다. 동성애 문화의 무의식과 단면들을 사유한다는 표현은 너무 낯간지럽고, 어쨌든 좀비 바이러스가 게이 섹스를 통해 퍼진다는 설정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낄낄거리면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머신 걸> The Machine Girl 이구치 노보루/ 2008년/ 96분/ 일본/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반경 100미터 밖으로 물러나시라. 외팔이 여고생의 피칠갑 액션활극 <머신 걸>은 유감없이 몸서리를 치게 만드는 영화다. 야쿠자 조직의 후계자에게 동생을 잃은 아미는 복수를 위해 혈혈단신 조직에 맞서지만, 가혹한 고문 끝에 팔 하나를 잃는다. 하지만 동생과 함께 살해당했던 친구의 부모님이 죽기 직전의 그녀를 거두어 치료해주고 잃어버린 팔을 대체할 머신 건을 선물해주면서 아미는 최후의 결전에 나선다. <머신 걸>은 거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신체를 난자한다. 목이 뎅겅 떨어지고 얼굴이 모자이크처럼 조각나며 사지가 찢기고 살점이 튀긴다. 하지만 영화의 진저리나는 잔혹함은 정색한 고어라기보다는 후안무치하게 막장으로 치닫는 장난기와 유머에 가깝다. 분홍빛 핏방울은 스프링클러의 물줄기처럼 세차게 뿜어나가고, 야쿠자 대모의 비기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갈아버리는 ‘드릴 브라’다. 되바라진 중학생들이 전대물 복장을 한 채 표창을 뿌려대고, 다소곳하게 튀김을 요리하던 주부가 미친 웃음을 흘리며 소녀의 손을 조리하니 눈을 찡그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내숭없이 파렴치하고 경쾌하게 극단을 향하는 B급 스플래터의 난장이다.
<리시클로> Resiklo 마크 레이스/ 2007년/ 120분/ 필리핀/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외계인의 침공으로 완전히 황폐해진 지구. 소수의 생존자들은 파라이소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겨우 삶을 영위해간다. 우주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외계인들에게 맞서기 위한 생존자들의 최종병기는 고철 더미를 이용해서 만든 로봇(<매트릭스3 레볼루션>과 <자붕글>의 형제쯤 된다)이다. <리시클로>는 지난해 마닐라영화제에서 7개 부문을 휩쓸며 필리핀 자국영화의 자랑거리가 됐다. 그러나 자국의 자랑거리가 언제나 국제적인 자랑거리인 것은 아니다. <리시클로>에서 오리지널리티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찾는 건 무리다. 로봇들이 공터에서 전쟁을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특수효과는 게임 화면에서 오려붙인 것 같고 <에이리언2>를 비롯한 80년대 할리우드 SF 활극에서 도용한 장면들도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리시클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일정 정도 평준화된 특수효과 기술의 덕을 입은) 제3세계 블록버스터가 어떻게 할리우드의 과거를 카피하며 장르영화의 토대를 배워가는지 유심히 살펴보는 것, 그리고 전대물과 80년대 B급 SF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마구 섞어놓은 이 혼성모방짬뽕영화의 의도하지 않은 키치함과 캠피함을 낄낄대며 즐기는 것.
<52구역> Tale 52 알렉시스 알렉시우/ 2008/ 97분/그리스/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 현실은 공포가 된다. <52구역>은 일상의 작은 균열이 한 남자의 삶을 뒤흔드는 과정을 정교하게 묘사한 심리스릴러다. 이아소나는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페넬로페와 사랑에 빠지고, 페넬로페는 곧 이아소나의 집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깬 이아소나는 연인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는데 그녀가 떠나기까지의 기억이 이아소나에겐 없다. 페넬로페를 그에게 소개한 친구들은 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냐는 말을 반복하고, 다시 만난 페넬로페는 이아소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이아소나의 행동은 그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며 점진적으로 남자의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이아소나의 방을 관음하듯 훑는 카메라는 외부와 차단된 그의 복잡한 정신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알렉시스 알렉시우 감독은 향후 그리스 뉴웨이브가 생겨난다면, 단연 선두주자로 손꼽힐 인물이다. 첫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와 캐릭터를 완전히 장악하는 그의 연출력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타임 크라임> Timecrimes 나초 비가론도/ 2007년/ 89분/ 스페인/ 부천 초이스
중년 남자 헥터는 사랑스런 아내와 함께 조용한 스페인 시골에 새 집을 짓고 있다. 모든 것이 안온해 보이는 어느 날 망원경으로 숲을 관찰하던 헥터는 나체의 여인이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헥터는 여인을 구하러 갔다가 얼굴에 붕대를 감은 괴한에게 습격당해 달아나고, 몸을 숨기기 위해 숲속 연구실에 설치된 타임머신 속으로 뛰어든다. 제목이 <타임 크라임>이니 시간여행과 관련된 SF영화인 것은 자명하고 타임 패러독스를 이용하는 영화일 것은 더욱 명백하다. 시간을 역행한 헥터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또다시 타임머신에 오르고, 그렇게 생겨난 헥터2와 헥터3와 헥터4 등등이 서로를 제거하기 위해 머리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타임 크라임>은 머리를 잘 굴리면서 봐야 재미있는 영화지만 관객과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지적 싸움을 벌이던 2004년작 <프라이머>(Primer)처럼 대뇌피질이 꼬일 만큼 복잡하지는 않다. 대신 영화는 <나비효과> <재킷> <데자뷰> 같은 할리우드산 시간여행 스릴러영화들처럼 타임 패러독스에 빠진 평범한 인간의 공포와 노곤함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욕심없이 익숙한 아이디어 하나로도 꽤 즐길 만한 SF 장르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
<클론바이러스> Others 오스카 캠포 | 2008년 | 84분 | 콜롬비아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시스템 엔지니어 호세의 몸에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공포스러운 피부병. 동료는 이 질병이 아마존 정글로부터 전파되었으며 뛰어난 번식력으로 사람의 온몸을 잠식,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며 그를 위협한다. 섹스를 즐기며, 도시의 삶에 익숙했던 36살의 남자는 끔찍한 박테리아의 출현 이후, 자신이 삶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음을 느낀다. 게다가 자신이 계속 복제되는 초현실적인 현실까지 맞닥뜨린다. 결국 동일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잔인한 싸움에 휘말리고 평온했던 현실은 악몽이 된다. <클론바이러스>는 한 남자의 혼란을 통해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파괴되는 인류의 재앙을 환기시킨다.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이름을 알려온 오스카 캠포 감독은 <클론바이러스>를 통해 이 끔찍한 바이러스의 원인이 포스트 9·11이 남긴 공포, 피해자와 가해자의 책임 전가에서 비롯된 살육과 전쟁에서 기인함을 역설한다. 결국 무수한 정체성으로 증식되는 분신들 사이에서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세, 그가 겪는 혼란과 분열은 바로 국제정세 속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들을 대변한다. 공포에 질린 호세의 눈에 비친 도시의 풍경과 영화에 삽입된 실제 전쟁장면들은 극단에 내몰린 현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옴 샨티 옴> Om Shanti Om 파라 칸/ 2007년/ 169분/ 인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옴 샨티 옴>은 “2007년 발리우드 최고 흥행작”이라는 수식이 부끄럽지 않은, 즐거운 상업영화다. 영화는 30년 전에서 출발한다. 언젠가 스타가 되어 흠모하는 여배우 샨티프리야와 사랑을 이루겠다는 조연배우 옴은,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영화 제작자의 음모로 샨티와 함께 살해당한다. 옴이 죽던 날 영화인 가문인 카푸르가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는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옴은 그 아이가 되어 환생한다. 30년 뒤, 최고 인기 배우로 성장한 옴은 환각처럼 보이는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전생의 장면들을 보게 되고 자신이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권선징악과 윤회설 같은 고전적인 주제에 반전도 시시하지만 <옴 샨티 옴>의 매력은 발리우드영화에 기대하는 모든 것이 총집합된 169분에 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영화를 선택한 관객이 기대했을 수준의 정점을 채워준다. 비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와 이리저리 비틀린 가락, 과장된 몸짓,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영상과 무대와 영화를 오가는 프로덕션디자인 모두 경쾌하고 기발해서 촌스러움조차 유희로 승화시킨다. 메가폰을 잡은 파라칸은 주연배우 샤루칸과 절친한 여성감독으로, 70편이 넘는 발리우드영화의 안무가로 활동했다. <옴 샨티 옴>에는 오랫동안 발리우드영화계를 지켜본 감독의 풍자적이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시선이 있다. 안현진
<유령친구 부트나스> Bhoothnath 비벡 샤르마 | 2008년 | 136분 | 인도 | 패밀리 판타
춤과 노래로 떠들썩한 발리우드표 호러라면 공포는 잠시 접어두자. 인도의 한 지방, 고아로 이사 온 7살 방쿠 가족. 멋진 저택임에도 불구, 이곳은 유령의 집으로 불린다. 일 때문에 집을 떠난 아빠를 대신, 엄마는 두려움에 빠진 방쿠에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유령이 아니라 천사라며 안심시킨다. 그러던 어느 날 방쿠는 유령 부트나스를 만난다. 사람들을 쫓아내려는 부트나스의 목적과는 아랑곳없이 새 친구가 필요한 방쿠는 ‘천사’ 부트나스가 반갑기만 하다. 둘은 곧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우정을 쌓아간다. <유령친구 부트나스>는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에서 통용되는 호러영화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부트나스의 행동 뒤에는 가족간의 불화라는 숨겨진 사연이 존재한다. 순수한 소년 방쿠는 사리사욕에 찌든 어른들과 달리, 부트나스의 아픔을 치유하고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플롯은 단순하고 특수효과는 소박하지만, 유령 부트나스와 방쿠의 우정은 이 모든 걸 용납해줄 정도로 따뜻하고 정겹다. 주로 스릴러와 범죄물을 만들어온 비벡 샤르마 감독의 작품. 발리우드영화임을 잊지 않도록 흥겨운 뮤지컬이 첨가된다. 인도의 국민배우 아미타브 바흐찬이 부트나스로, ‘샤룩폐인’을 형성한 발리우드 대표배우 샤루칸이 방쿠의 아빠로 출연한다.
<그해 여름의 비행접시> Summer of the Flying Saucer 마틴 더피 | 2007년 | 86분 | 아일랜드, 스웨덴 | 패밀리판타
히피는 공산주의자로 통하던 아일랜드의 조용한 마을 마요주. 15살, 히피 차림의 댄은 마을 어른들에게 문제아로 통한다. 아내를 잃고 외골수가 된 아버지 역시 농장 일에 무관심한 아들이 못마땅하다. 그러던 중 댄은 농장 뒷마당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돕기로 한다.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에 맞서 외계인을 보호하는 동안 외계 소녀와 댄은 사랑에 빠진다. <그해 여름의 비행접시>는 어른이 된 댄이 돌아보는 자신의 소년기다. 회고조의 SFX는 그래서 다분히 감상적이고 소박하다. 외계인은 검은 두건 하나로 복장을 완성하고, 그들의 초능력은 길거리에서 주운 듯한 평범한 돌멩이 하나로 발현된다.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비행접시 역시 어린이 특촬물에서 보던 조악한 수준이다. 그러나 기네스를 맘껏 마실 수 있는 낡은 바, 작은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경찰들, 탭댄스가 최고의 즐길 거리인 아일랜드의 별스럽지 않은 풍광과 어우러지는 순간, 이 특촬물은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추억 속의 현실이 된다. 결국 영화는 외계인의 등장이라는 소동 속에, 첫사랑을 경험하고 잃었던 아버지와의 유대를 이어가는 댄의 성장기다. 촬영 내내, ‘햇빛이 비치는 맑은 기억 속의 여름날을 담기 위해 분투했다’는 영화는, 가족영화 전문 마틴 더피 감독의 명성 그대로 따뜻한 외계물로 완성됐다.
<세비지 그레이스> Savage Grace 톰 칼린/ 2007년/ 95분/ 스페인, 프랑스, 미국/ 스트레인지 오마주
부유한 중년 부인 바바라 달리 베이클런드는 1972년 12월17일 런던의 저택에서 칼에 찔린 채 사망했다. 범인은 아들이었다. 대체 왜 무시무시한 거부의 아들은 어머니를 칼로 난자했던 것일까. 리처드 롭과 레오폴드 사건을 다룬 <졸도>(Swoon, 1992)를 내놓으며 토드 헤인즈와 함께 뉴 퀴어 시네마의 기수로 칭송받았던 톰 칼린은 15년 만의 신작을 통해 여전히 두 가지 소재에 탐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실제 살인사건. 또 다른 하나는 섹슈얼리티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사건 중 하나인 베이클랜드 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바바라는 남편 부룩스, 아들 토니와 함께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다. 그러나 남편이 떠나자 그녀의 집착은 동성애자인 아들에게로 향하고, 결국 모든 것을 가졌던 가족은 근친상간과 존속살해의 나락으로 떨어져내린다. 진지한 영화학자인 동시에 유미주의자인 톰 칼린은 극단적으로 재단된 미장센을 통해 관객의 목을 서서히 짓누른다. 그 졸도의 순간들을 즐길 줄만 안다면 <세비지 그레이스>는 견딜 만한 고문이 될 거다. 줄리언 무어는 굉장하다. 예민하고 선병질적인 중년 여자를 지구에서 가장 잘 연기하는 이 여자는 자신의 모든 스테레오타입들을 극단으로 밀어붙여서 괴물을 창조해냈다. 위대한, 위험한 연기다.
<포르노 오테르> The Auteur 제임스 웨스트비 | 2008년 | 80분 | 미국 | 오프 더 판타스틱
퇴물 감독으로 치부되던 포르노 감독 도밍고. 그는 오리건주에서 열리는 필름페스티벌에 공로상 수상자로 참가하면서 그곳에서 여전히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과, 예전 함께 작업했던 동료를 만난다. 덕분에 그는 자신을 아트 포르노 영화계의 ‘스탠리 큐브릭’이라 여길 정도로 자부심에 차 있던 왕년의 자신감을 회복한다. 특히 우연히 히피들의 자유로운 섹스에 참가한 이후 그는 재기의 가능성을 꿈꾼다. <포르노 오테르>는 독립영화의 히트작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얻은 코믹영화 <Geek>를 연출한 웨스트비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동명의 제목으로, 포르노그래피 감독의 DVD 음성해설을 코믹하게 그린 단편의 확장판에 가깝다. 개봉이 불투명할 정도로 적나라한 성기노출이 판을 치지만, 영화는 웨스 앤더슨이 소프트 포르노를 찍기라도 한 듯, B급 정서와 유머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풀 메탈 자켓>의 포르노 변주인 <Full Metal Jackoff> 등 온갖 패러디가 판을 치는 영화 속 페이크다큐는 배꼽을 움켜쥘 지경. 단편부터 이탈리아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하며 자아도취에 빠진 도밍고를 완벽하게 연기한 멜릭 말칸시안의 연기는 이 핫한 웃음에 기름을 부어준다.
<시암의 사랑> The Love of Siam 추키아트 사크위라쿨/ 2007년/ 158분/ 타이/ Q리어스
뮤와 통은 단짝 친구다. 시골로 놀러간 통의 누나가 실종되자 고통받던 통의 가족은 방콕으로 이사를 결심하고 결국 뮤와 통은 작별을 고한다. 그로부터 몇년이 흐른 뒤 뮤와 통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다. 뮤는 인기있는 고교생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음악가, 통은 소녀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듬직하고 예쁜 청년이 되어 있다. 누나의 실종 이후 신뢰가 무너진 부모님 아래서 힘겨워하던 통은 어느덧 뮤와 아련한 풋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시암의 사랑>은 낯간지럽고 코간지러운 퀴어 청춘 성장기다. 추키아트 사크위라쿨 감독은 방콕의 여름 빛을 모조리 이용해 소년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끊임없이 비추고, 뮤의 밴드를 통해 들려오는 타이팝은 화사하고 달콤하다. 성장영화와 퀴어 시네마의 클리셰를 쑥스러움 없이 잘 비벼내는 이 영화의 주요 관객은 금지된 첫사랑을 되새기고픈 게이 관객, 그리고 아름다운 고교생 청춘들의 풋풋한 키스를 보고 싶은 여성 관객일 게다. 사실 <시암의 사랑>은 발빠른 국내 퀴어영화 팬들 사이에서 <락행시암>이라는 제목으로 꽤 인기있었던 영화다. 미리 본 사람들은 다들 “유치하긴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볼 때마다 운다”고도 했다. 사실이었다.
<망량의 상자> Shadow Sprit 하라다 마사토/ 2007년/ 133분/ 일본/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호러소설가 교고쿠 나쓰히코는 일본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불린다. <망량의 상자>는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교고쿠도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 나쓰히코의 팬이라면 원작과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 원작의 중심인물인 퇴마사 추젠지 아키히코, 그의 친구인 소설가 세키구치와 다른 이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장미십자탐정사무소의 에노키즈가 그대로 등장한다. 이들의 주변에서 몇 가지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영화는 시작한다. 한 소녀가 기차역에서 사지가 잘리는 열차사고를 당하는데, 사건을 맡은 형사는 그녀가 막대한 유산 때문에 협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시내에서는 토막난 소녀의 사체가 상자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별개로 진행되던 사건들은 명탐정 아키히코에 의해 퍼즐처럼 맞춰지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교고쿠도 시리즈 특유의 잔혹한 사건과 충격적인 결말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표현됐고, 원작의 SF적 요소는 영상으로 보니 더욱 실감난다. 하지만 ‘러닝타임’이란 시간적 제약 때문에 각 인물의 개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1천쪽이 넘는 원작을 2시간에 압축했으니 친절한 부연설명은 기대하지 말 것. 차라리 조금은 괴롭더라도 원작을 예습하고 가는 것이 이 영화를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The Most Beautiful Night in the World 덴간 다이스케/ 2007년/ 160분/ 일본/ 스트레인지 오마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은 일본의 거장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의 아들 덴간 다이스케의 작품. 덴간은 사랑과 욕망이 도처에 표류하던 아버지의 세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성적으로 치유한다는 설정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을,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원시성 강한 성행위의 모습은 자연스레 <나라야마 부시코>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아들의 세계는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보드랍고 달콤하다. 아름다운 비밀 병기 여인과 미친 천재 소녀, 최음제 폭탄을 제조하는 테러리스트가 즐겁게 모여 사는 마을은 히피의 낙원 같다. 섹스 스캔들에 휘말려 한직으로 내쫓긴 어느 기자가 이 마을로 내려오면서 기괴하고 발칙하고 엉뚱한 사건들이 물흐르듯 이어지고,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그날 밤’을 향해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2시간40분이란 다소 긴 러닝타임(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다)을 참고 볼 만한 가치가 있는데,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집단 정사신에 버금가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곳곳에 삽입된 발랄한 일러스트는 로망포르노적인 설정을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감독의 히피적 감수성을 판타지와 적절하게 버무린, 귀여운 영화.
<진 여 입식사열전> Eat and Run-6 Beautiful Grifters 오시이 마모루 외/ 2007년/ 123분/ 일본/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모든 음식점 주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시무시한 인간들. ‘먹고 튀기’를 생업으로 삼는 ‘다치구이시’는 2006년 오시이 마모루가 자신의 장편 <입식사열전>을 통해 탄생시킨 가상의 존재다. 음식점 주인과 무전취식주의자들의 대결을 시침 뚝 떼고 민속학적 중대사처럼 그려놓았던 전작에 이어 속편인 <진 여 입식사열전>은 오시이 마모루와 4명의 감독들이 다치구이시를 모티브로 연출한 6편의 기상천외한 중·단편을 선보인다. 금붕어 모양의 사탕을 만들어달라 요구한 뒤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게의 모든 사탕을 싹쓸이해버리는 전설의 여인, 맛좋은 버본을 노리고 술집을 순례하는 서부시대의 총잡이, 옥수수밭에 기거하며 지나가는 장사꾼들을 홀려 음식을 얻어내는 미모의 소녀, 크레페에 걸신들린 아이돌 지망생 등 영화는 얼이 쏙 빠질 정도로 황망한 괴담을 다치구이시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펼쳐놓는다.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일본 총잡이들을 태연하게 던져놓는가 하면, 전쟁으로 황폐화된 미래의 지구에 거대한 ‘KFC 할아버지’ 동상을 세워놓는 등 이 제멋대로의 연작은 주저없이 뻔뻔한 만큼이나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네거티브 해피 체인소우> Negative Happy Chainsaw Edge 기키타무라 다쿠지/ 2007년/ 104분/ 일본/ 월드 판타스틱시네마
고등학생 유스케는 단짝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사로잡혀있다.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좀도둑질을 일삼던 그는 어느 날 밤 전기톱을 든 괴물과 싸움을 벌이는 예쁘장한 여고생 에리를 만난다. 유스케는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는 치기에 사로잡히고, 밤마다 벌어지는 괴물과의 결투에 동참한다. 다키모토 다쓰히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할리우드 호러에서 쏙 빼낸 듯한 살인마를 등장시키며 막을 열지만 그 골자는 청춘의 성장담이다. 무시무시하던 괴물과의 사투는 모험과 공포의 세계로 주인공들을 밀어넣는 대신, 한 차례 두 차례 반복되면서 마치 등교를 하는 것처럼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다. 유스케는 떠나버린 친구에 대한 일그러진 콤플렉스로 속을 앓고,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에리는 감당치 못할 슬픔과 외로움에 젖어 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던 전기톱 괴물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해명하려는 청춘의 자구적 판타지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평화롭게 소년, 소녀를 감싸안는다. 장르의 활력과 청춘드라마의 아릿한 감성이 무리없이 어우러져 따뜻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무지개 여신>의 이치하라 하야토가 설익은 청년 유스케로 등장해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트랜스 시베리아> Transsiberian 브래드 앤더슨 | 2007년 | 115분 | 스페인, 독일, 리투아니아, 영국 |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총길이 9288㎞, 지구 면적의 1/4에 버금가는 거리를 달리며, 운행 중 시간대가 7번이나 바뀌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트랜스 시베리아>는 중국을 출발,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잇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 체류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오른 커플 로이와 제시. 그들은 기차에서 여행 중인 커플 카를로스와 애비를 만난다.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이지만, 둘의 행동은 수상쩍다. 특히 제시를 향한 카를로스의 추파는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러시아 마약 수사관이라고 소개한 그린코가 등장하면서 평온했던 열차는 멈출 수 없는 폭력과 죽음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머니시스트>에서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스릴러라는 상업적인 형식으로 말끔히 완성했던 브래드 앤더슨 감독은 <트랜스 시베리아>에서 고전적 추리물을 현대적인 스릴러로 재포장한다. 특히 히치콕의 손길을 빌린 듯, 한정된 공간, 우연히 함께한 낯선 사람, 기차 차량 추격신 등은 히치콕의 <숙녀, 사라지다> <17번지> 등을 연상시킨다. 영화의 볼거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지나는 거대하고 황량한 풍광과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가감없는 무뚝뚝한 표정. 영화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훌륭한 촉매제다. 우디 해럴슨, 벤 킹슬리, 토머스 크레슈만 등 영화의 완성도를 뒷받침해주는 배우들의 연기도 기대할 만하다.
<미라지맨> Mirageman 어네스토 디아즈 에스피노자/ 2007년/ 90분/ 칠레/ 부천 초이스
마코는 괜찮은 무술 실력을 제외하면 별볼일없는 남자다. 직업은 나이트클럽 기도. 그런데 별볼일없는 남자가 자신이 별볼일있는 남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성폭행당하는 TV 리포터를 우연히 구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마코는 사회의 폭력에 맞서서 싸우는 슈퍼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름도 정했다. 미라지맨. 신기루의 남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장벽은 현실이다. 히어로 코스튬을 만들었지만 이걸 갈아입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고 언론은 스스로를 히어로라 부르는 미치광이를 놀리는 데 바쁘다. 그러나 비밀경찰이 소녀 납치 사건을 미라지맨에게 의뢰하면서부터 일은 점점 꼬여가기 시작한다. 2006년 첫 번째 장편 <킬트로>(Kiltro)를 통해 칠레 상업영화의 가능성을 해외에 알렸던 어네스토 디아즈 에스피노자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쿵후영화와 히어로영화의 컨벤션을 칠레의 현실과 버무려내는 솜씨가 아주 맛깔나다. 특히 스턴트맨 출신의 칠레 스타 마르코 자로가 CG와 와이어의 도움없이 몸뚱이 하나로 만들어내는 순수한 액션장면들은 제이슨 스타뎀에 이은 또 다른 B급 백인 무술배우의 탄생을 가늠케 한다.
<스워드맨> The Sword Bearer 필립 얀콥스키 | 2006년 | 110분 | 러시아 | 현대 러시아 장르영화 특별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영상은 잊어라. 할리우드 영웅물의 러시아식 변주인 <스워드맨>은 러시아영화의 변화하는 현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가위손’처럼 손에서 칼이 솟는 남자 사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능력 때문에 어릴 적부터 그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닥치는 대로 살해를 일삼는 그는 악몽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애를 써본다. 그러나 이런 그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폭력적인 사샤의 손’은 살해의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러던 중, 사샤는 자신의 폭력을 잠재워줄 운명의 여인 카이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러시아 국민배우 올렉 얀콥스키의 아들인 필립 얀콥스키 감독은 누아르풍의 화면과 심리 묘사 사이로 컴퓨터그래픽과 액션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결합함으로써 러시아식 몽환적 SF를 창조한다. 영화 속 사샤의 폭력에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몇 십년 만에 만난 친아버지의 살해장면조차 설명되지 않는 사샤의 행동은 이른바 ‘정의’를 위해 살인을 일삼는 할리우드 영웅과는 차별화된다. 얀콥스키 감독은 오로지 끔찍한 살인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샤의 내면만을 전달할 뿐이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사건들이야말로 부패와 불신, 위험이 판을 치는 러시아의 현재에서 지극히 가능한 현실임을 역설한다.
<리빙엔드: 리마스터> Living End: Remixed and Remastered 그렉 아라키 | 1992년 | 85분 | 미국 | 판타스틱 감독백서
동성커플 루크와 존. 어느 날 존이 HIV 양성반응을 나타내면서 둘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성적 소수자로 이미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들에게 AIDS는 또 하나의 낙인을 더한 셈. 모든 것을 버리고자 LA 도심을 출발,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내달리는 게이 연인에게 ‘미친 공화당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빌어먹을 엿 같은’ 곳일 뿐이다. 퀴어 시네마의 선봉장 그렉 아라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리빙 엔드>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빌려, 90년대 하위문화인 게이 컬처를 대변하고 있다. 마치 존 케루악의 소설을 화면에 옮긴 듯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는 매 장면, 세상을 향한 불만을 가득 담은 ‘Fuck’과 일탈을 꿈꾸는 동성간의 섹스로 일관된다. 충격적인 영상과 무책임한 전개라는 비판으로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영화는 절망에 휩싸인 성적 소수자들의 내면을 대변하며 90년대 퀴어영화의 새로운 틀을 창조해냈다. 도발적 신선함에 선댄스영화제는 그해 <리빙 엔드>에 그랑프리를 수여했고, 영화를 연출한 아라키 감독을 인디펜던스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선댄스 키드로 편입시켰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16mm로 촬영하여 35mm로 블로업한 오리지널 버전을 HD로 전환, 화면 보정, 사운드트랙 리믹싱 작업을 거친 리마스터 버전으로 상영한다.
<바람을 부르는 천사> Windman 쿠아트 아크메토프 | 2007년 | 98분 | 러시아 | 현대 러시아 장르영화 특별전
폭풍이 거센 어느 날, 카자흐스탄 농가의 낡은 헛간으로 날개가 부러진 늙은 노인이 떨어진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소년은 얼마 전, 베일을 쓴 낯선 자의 얼굴을 본 뒤 죽을병에 걸린 상태. 신기하게도 ‘천사’의 등장으로 소년의 병은 씻은 듯 완치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불길하다는 미신에 빠져 있으며, 관료들은 신비로운 힘을 가진 노인을 자신들의 탐욕스런 목적에 이용하려 눈독을 들인다. 노인을 믿고 돌봐주는 사람은 오직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 소년과 그의 부모뿐이다. <바람을 부르는 천사>는 초현실적인 사건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한바탕 소동을 그린 유쾌한 관찰기다. 날개를 단 노인의 등장은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이며, 그의 정체는 불명확하다. 쿠아트 아크메토프 감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순수함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노인의 정체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알려준다. 시나리오작가로 이름을 알려온 감독의 전적답게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비판이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카자흐스탄의 민속음악이 흐르는 황량한 풍광 속, 시대를 한참 벗어난 인물들의 복장과 만화 같은 캐릭터는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진 영화의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훌륭한 도구다.
<검은 띠> Black Belt 나가사키 슌이치/ 2007년/ 95분/ 일본/ 열혈남아: 아시아의 액션영화
와이어도, 스턴트도, 과장된 음향효과도 없다. <검은 띠>는 오직 맨몸과 기술로 승부하는 정직한 액션영화다. 이 영화에선 심지어 ‘싸움을 위한 싸움’도 경계하는데, 그건 일본의 예의바른 전통무술 가라테, 그중에서도 방어를 최선으로 여기는 가라테가 사건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가라테의 고수 히데타카는 죽으면서 세명의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남긴다. “공격을 위해 무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언과 가장 힘센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검은 띠. 스승의 뜻에 충실한 기류와 공격적인 무술로 절대 강자가 되고자 하는 타이칸은 히데타카의 죽음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영화는 또 다른 제자 초에이의 눈으로 이들의 행보를 쫓는다. 1시간35분 동안 두명의 고수가 선보이는 가라테의 기술은 다채롭다. 특히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기류의 절제된 가라테와 타이칸의 화려한 가라테가 충돌하는 마지막 20분은 영화의 백미다. 이 순간 흑백으로 전환되는 화면은 시공간을 초월한 전통무술에 경의를 표하는 감독의 의도적 설정으로 보인다. 기류와 타이칸 역을 맡은 야기 아키히토와 나카 다쓰야는 실제로 일본의 각종 대회에서 우승한 고위급 유단자.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연기는 꽤 자연스러운데, 그건 시답잖은 러브라인 같은 불필요한 설정을 제외하고 배우들이 온전히 액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 감독의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