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비판 지수 ★★★★★ 갓파의 요괴 지수 ★★ 가족 관객 관람 지수 ★★★★
숲, 물가, 하늘. 자연은 애니메이션이 빛깔 고운 상상력을 펼치기 더없이 알맞은 화폭이다. 복슬복슬 푸근한 요정 토토로가 소녀들을 이끌었던 곳은 울창한 숲속이었고, 눈동자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고양이 버스는 한가로운 농촌의 밤하늘을 가르며 비행했다. 애니메이션의 재량으로 목소리를 얻은 동물들은 문명의 그늘을 지적하기에 더없이 합당한 발언자이기도 하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너구리들은 신도시 개발로, <아이스 에이지2>의 동물들은 지구 온난화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아예 먹을거리 원정에 나선 <헷지>의 동물들은 인간 문명을 노골적으로 비꼬아댔다. 일본 아동문학가 고구레 마사오의 <갓파 깜짝여행>과 <갓파 대소동>을 원작으로 한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돼온 문명 비판과 생태주의라는 흐름을 따르면서도, 일본 민담 속 요괴인 갓파를 통해 에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일본사회의 모습을 일상적 판타지라는 틀 안에서 폭넓게 조망한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초등학생 소년 코이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기한 모양의 돌을 발견한다. 코이치는 화석의 일종이라고 생각해 돌을 갖고 오는데, 물에 씻는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갓파가 깨어난다. 코이치 가족은 갓파에게 ‘쿠’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그를 보살피며 한 식구로 받아들인다. 함께 밥을 먹고 스모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쿠는 그러나 점차 자연에서의 삶을 그리워한다. 또 다른 갓파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코이치와 쿠는 갓파의 서식지로 광고된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갓파는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듣는다. 쓸쓸히 집에 돌아온 쿠는 이번에는 소문을 듣고 나타난 기자들과 맞닥뜨린다. 금세 코이치의 집은 카메라들로 포위되고 쿠를 포함한 식구들은 감옥에 갇힌 듯한 생활을 하게 된다.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은 메시지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이웃집 토토로>풍의 정겹고 소박한 드라마처럼 전개되던 영화는 동족을 찾아 떠난 쿠가 허탕을 치고 언론과 힘겨운 다툼을 벌이면서 꽤 묵직한 그늘을 드리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와 호기심을 악용하는 미디어의 천박한 폭력, 작게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이지메 문제까지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이 던지는 비판의 화살은 일본사회 전체를 조준한다. 아이들에게는 다소 버거울 만큼 강하고 직설적인 메시지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지만, 영화가 일방적인 설교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메시지들을 하나둘 능숙하게 드라마에 꿰어 넣는 하라 게이치 감독의 재주 덕분이다. <도라에몽> <짱구는 못말려> 등을 통해 일상의 풍경을 주로 묘사해왔던 감독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 확실한 내공을 보여준다. 쿠와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유년기적인 설렘에 활력을 되찾는 아버지, 부모님의 관심을 빼앗겨 시종일관 입을 삐죽거리는 여동생, 좋아하는 아이가 말을 걸 때마다 빽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소년 등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은 장면 하나하나를 낭비하지 않고 섬세하고 생동감있는 드라마를 전개해간다. 문명 비판의 메시지와 거의 대등한 무게로 다루어지는 것은 한 소년의 성장이다. 쿠를 내세워 TV에 출연할 생각에 마냥 들뜨던 코이치는 상대와 동등하게 눈높이를 맞추고 우정을 쌓아가는 법, 누군가를 진정으로 배려한다는 것의 의미와 방법을 차근차근 온몸으로 익혀나간다. 상영시간이 2시간을 넘어서지만, 오히려 그 안에 이 모든 요소들을 균형있게 담아낸 재능이 놀랍게 느껴진다. 일본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작품상,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애니메이션영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 아닌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최초로 <키네마준보> 선정 베스트 무비 10에 올랐다.
TIP/영화의 주제곡 <여름의 물방울>은 일본 여가수 오야마 유리카의 목소리로, 오야마는 지난해 메가박스일본영화제 때 내한해 개막 공연을 갖기도 했다. 또 영화에서 쿠가 술에 잔뜩 취해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는 하라 게이치 감독이 직접 작사·작곡한 것이라고.
갓파는 일본의 도깨비
갓파는 강, 호수, 바다 등 물가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요괴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하지만 때때로 부를 가져다주는 양면적인 존재로 인식됐다는 면에서 한국의 도깨비와 닮았다. 갓파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 위가 접시처럼 움푹 패어 있다는 것인데, 이 안에 물이 담겨 있는 동안에는 괴력을 발휘하지만 물이 마르면 힘을 쓰지 못한다. 일본 속담 중에는 ‘갓파가 물에서 떠내려간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와 같은 뜻이다. 생명력의 원천이 물이라는 속성 때문에 갓파는 단순한 요괴가 아니라 물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갓파가 좋아하는 대표적인 기호품은 오이다. 일본의 음식점에 가면 갓파마키라는 음식이 있는데, 이는 오이를 넣은 김밥 규리마키의 ‘규리’(오이)를 아예 갓파로 대체한 것이다. 또 갓파는 스모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한국의 도깨비가 씨름을 즐겨 했다는 이야기와도 흥미로운 접점을 이룬다.
오늘날 갓파는 각종 캐릭터 상품이 넘쳐날 만큼 일본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다.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에 나오는 도노 지역처럼 갓파의 캐릭터를 지역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활용하고 있는 장소도 많지만, 좀더 흥미로운 것은 갓파를 환경운동의 차원에서 주목하는 움직임이다. 1988년 갓파 애호가들이 모여서 조직한 ‘갓파연방공화국’은 갓파가 서식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들자는 기치를 내걸었으며, 현재까지 매년 <갓파신문>을 발행하고 전국 각지에서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일본 규슈에서는 환경정화사업을 위해 자원봉사의 대가로 지급하는 일종의 지역통화를 만들었는데, 그 새로운 통화의 이름 또한 갓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