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9일부터 스폰지하우스 중앙, 광화문, 압구정 세 군데에서 시작되는 씨네휴 레인보우 영화제에서는 최근 유럽영화의 다양한 풍미를 한껏 즐길 수 있다. 거장 에릭 로메르의 신작 <로맨스>부터 신인감독 룰라 드와이옹의 <저스트 어바웃 러브>까지, 독특한 양식의 코미디 <유, 더 리빙>에서 섬뜩한 주제에 거침없이 다가서는 다큐멘터리 <리벨리온>까지, 유럽인들의 이주를 지독하게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낸 <수입 수출>에서 공간적 이동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연의 고리를 다룬 <천국의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의 황폐함을 인간의 얼굴 속에 고스란히 담아낸 <알렉산드라>에 이르는 다양한 영화의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17세기 고전주의 연애소설, 오노레 뒤르페의 <아스트레>를 각색한 에릭 로메르의 작품은 양치기인 셀라동과 시골 처녀 아스트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다소 건조한 유머를 섞어 평범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삶의 모럴을 다뤘던 로메르가 전설적인 공간에서 로맨틱한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은 다소 의외다. 하지만 비현실적 외모와 님프와 드루이드가 등장하는 신비한 공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여전히 ‘로메르’스럽다.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갈등하며, 그 실체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를 두고 언쟁을 벌인다. 진정한 사랑은 주체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것인가, 사랑에 있어 육체와 정신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등의 문제가 언어적인 논쟁과 실제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그려진다. <저스트 어바웃 러브>는 현재 프랑스 10대들의 고민, ‘누가 누구와 잘 것이냐’의 문제에 관한 상큼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엘로디는 케빈을 동경하지만 친한 친구 뱅상도 좋아하고, 뱅상은 엘로디를 사랑하지만 엉뚱하게 엘로디의 친구 줄리와 첫 경험을 치르고, 줄리는 첫 경험으로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오로지 섹스가 목적인 니코의 꾐에 눈이 멀고. 엘로디는 이상한 질투심에 니코와 잠자리를 하게 되고. 무엇보다 이 영화의 신선함은 십대의 섹스를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매우 담백하게 그려낸다는 데 있다. 마치 <라붐> 속의 십대들이 두 세대가 지난 뒤에 새롭게 이야기를 풀어낸 느낌이랄까.
로이 앤더슨의 <유, 더 리빙>은 에피소드식으로 구성된 코미디 프로그램를 연상시킨다. 터지는 폭소보다 진한 페이소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큰 차이기는 하지만. 주인공도 주요 서사도 따로 없는 이 영화 속의 에피소드들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부부, 친구, 애인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제목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뿐 아니라 보는 모든 당신들이 바로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삶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안드레이 네크라소프의 <리벨리온>에서 삶은 훨씬 잔혹하다. 구소련의 KGB 후신인 FSB 요원이었던 알렉산더 리트비넨코의 삶과 증언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폭로한다. 리트비넨코는 체첸침공의 빌미가 되었던 폭탄테러가 푸틴이 수장으로 있었던 FSB의 소행이었으며, 푸틴을 비롯한 FSB 요원들이 국가를 이익창출의 수단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양심적인 내부고발자의 삶을 택한 그는 2006년 11월 런던에서 방사능물질에 중독되어 독살당했다.
울리히 사이들의 <수입 수출>은 경제적인 이유로 비자발적인 유목민이 되어야 하는 현대 유럽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오스트리아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마치 상품처럼 수출되고 수입되는 노동력의 현재를 우크라이나의 올가와 오스트리아의 파울의 암울한 자리 바꾸기를 통해 보여준다. 피터 아킨의 <천국의 가장자리>에는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독일에서 터키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 흐르듯 유연한 전개와 논리적 개연성 때문에 매우 복잡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힘이 있는 이 작품은 2007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푸른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주인공 네자트의 뒷모습에서 천국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끄트머리에라도 닿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 읽힌다.
타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다고 평가받는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알렉산드라>는 이제는 러시아 군인들이 주둔하는 체첸의 땅을 조망한다. 카메라는 손자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온 할머니 알렉산드라의 피곤이 배어 있지만 고집스러운 발걸음을 쫓아가며 전쟁에 지친 군인들의 피로감, 적대적인 체첸인의 시선 그리고 폐허가 된 삶의 공간들을 담아낸다. ‘싸우는 것은 남자들의 일이고,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알렉산드라의 말에는 세월이 주는 현명함과 폭력을 초월하는 여성성의 위대함이 스며 있다. 특히 어떤 말보다도 더 깊은 감정과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렇게 다양한 빛깔을 가진 일곱편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지금 유럽이 처한 여러 가지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접하게 되는 근원적인 인생의 문제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