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풀한 패션 지수 ★ 수평 트래킹과 패닝 감동지수 ★★★★ ‘아티스트 3부작’ 마지막 작품 기대지수 ★★★★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아닌 모든 것은 ‘무용’(無用)하다(고 믿어진다). 이때 자본 밖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이상을 꿈꾸는 대신 자본 안에서 자본을 거스르려는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 무용한 것의 정치성을 끝끝내 붙잡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사는 예술가와 그 세상을 사는 노동자의 삶은 얼마나 혹은 어떻게 겹쳐지는가. 지아장커의 ‘아티스트 3부작’은 그걸 사유하는 작업이다. 화가 리샤우동을 주인공으로 싼샤의 노동자들을 찍었던 <동>이 그 첫 번째 작업이었다면, <무용>은 <동>에서 그 사유를 좀더 진척시킨 다큐멘터리다. 여기서 지아장커의 관심은 중국의 의류산업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 점점 더 물질적으로 변모해가는 중국의 현실에서 옷을 둘러싼 삶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세개의 지역에서 옷과 관련된 세개의 초상을 발견하는데, 첫 번째는 광둥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두 번째는 파리에서 패션쇼를 준비 중인 중국 디자이너 마커, 그리고 세 번째는 싼샤 지방 탄광촌 노동자들과 그들의 작업복을 수선해주는 양장점의 재봉사들이다.
표피적으로만 본다면 영화의 중심은 디자이너 마커다. 대량생산을 거부하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옷에서 역사와 기억, 관계,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의 브랜드 이름은 영화의 제목과 같은 ‘무용’이다. 그렇게 고집스러운 작업 끝에 파리 컬렉션에서 영혼이 환생한 듯한 전시를 선보일 때, 그걸 바라보는 지아장커의 카메라에는 숭고함에 대한 경외심이 묻어나는 것 같다. 지아장커 스스로도 마커의 컬렉션이 “중국의 사회적 리얼리티를 성찰하게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동>과 <스틸 라이프>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싼샤의 풍경이 끝까지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사라짐을 증언하고 그 사라짐에 저항하는 것처럼 마커의 옷들은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체제에 무용함으로 저항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용>은 세개의 무대를 모두 보고 각 이야기들 혹은 삶들간의 유기성과 단절지점을 한 호흡으로 다시 생각할 때 완성되는 작품이다. 그것이 지아장커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으나, 탄광촌을 무대로 하는 세 번째 일화를 보고 나면, 앞의 두 일화가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첫 번째 일화와 마지막 일화가 공명하며, 이 둘의 공명은 세개의 이야기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 직설적인 마커의 예술적 자의식을 희미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마커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작업실에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대량생산을 혐오한다고 말할 때, 그녀의 주장에는 광둥의 소음 가득한 의류공장 작업라인 앞에서 고된 몸짓을 반복하고 지친 몸과 멍한 눈빛으로 양호실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의 막막한 현실이 담겨 있지 않다. 혹은 탄광촌의 광부들이 검댕 묻은 알몸을 물로 씻어내리는 장면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그 곁에 그들 몸의 일부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은 작업복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 마커가 옷에 담긴 시간과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과 모델들에게 일부러 흙을 묻히던 장면이 떠오른다. 지아장커가 어느 한쪽에 더 마음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어떤 선명한 간극이 있다. 옷이 라이프스타일인 삶과 옷이 생존인 삶. 자본주의의 패션산업이 지향하는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동자의 ‘유용’한 옷. 결국 지아장커의 능력과 진심이 빛나는 부분은, 이미 ‘아름다운’ 마커의 고풍스러운 작업과 우아한 가치관을 찍을 때가 아니라, 삶과 밀착해서 숨쉬는 세상의 사사로운 물질성을 온기 가득한 시선과 호흡으로 오래도록 응시할 때다.
tip/ 첫번째 일화가 끝날 무렵, 카메라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천천히 비춰 나갈 때 그 위로 황가구(wong ka kui)가 부르는 '정인(lover)'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흐른다. "너와 나 사이에 또 누가 있었나, 인연인지 사랑인지 천진함인지 아님 의외였는지, 남은건 눈물과 죄값과 댓가와 인내하는 마음..." 어떤 은유로 받아들이든, 이 구슬픈 음성이 공장 노동자들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금을 울린다.
패션 디자이너 마커는 누구인가 <무용>의 두 번째 일화에 등장한 마커(Ma-Ke)는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다. 1971년 중국에서 출생한 그녀는 96년 ‘Exception de Mixmind’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이듬해 시드니박물관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중국 젊은 세대의 새로운 디자이너로 각광받는다. 중국 의류산업의 대량생산 홍수 속에서 수작업 소량생산을 고수하는 마커의 작업방식은 그 희소성과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며 중국 내 각종 패션 디자이너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7년 파리 패션 위크에 초청되어 자신의 새로운 브랜드인 ‘무용’(wu yong)을 선보인다. <무용>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아들이 자신의 아들에게 옷을 물려주던 시절’을 회상하며 정신적인 가치의 영구함과 형식의 변화를 설파하면서 자연과의 어우러짐에서 그 기반을 찾는데, 그러한 가치관의 극적인 표출이 ‘무용’의 컬렉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는 중국 내 그녀의 작업실, 매장뿐만 아니라 2007 파리 컬렉션의 준비과정과 전시 당일의 현장이 공개된다. 진시황의 무덤이 열린 것처럼 어두운 무대 위 신비로운 조명 아래에는 마치 황제처럼 커다란 천을 쓴 여인이 한가운데 서 있고 그녀를 중심으로 얼굴과 몸에 흙칠을 하고 무채색의 옷을 뒤집어쓴 모델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있다. 이 웅장하고 새로운 형식의 전시와 그걸 경탄의 눈으로 올려다보는 서구 관객, 전시를 독점적으로, 기품을 담아 찍어낸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실, 흥미로우면서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