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홍콩필름마트에 모인 중화권 영화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바로 대만 총통선거였다. 결과적으로 홍콩필름마트가 끝난 다음날인 3월22일, 줄곧 대만 경제회생을 위해 양안(兩岸, 중국과 대만)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창해온 대만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당선됐다. 마잉주 당선자는 중국과의 직교역, 직항, 우편교류 등 ‘3통’ 제한을 과감히 풀겠다는 ‘단일 중국시장’ 공약으로 대만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비슷한 시기 홍콩과 중국 방송사에서 상대적으로 대만 독립을 추구해온 민진당 후보보다 국민당의 마잉주를 호의적인 시선과 함께 더 큰 비중으로 다룬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중국은 그동안 대만을 향해 지속적으로 3통 확대를 요구해온 상황이었고, 홍콩 역시 마잉주 당선자가 홍콩 출신이기에 내심 그의 당선을 기대했던 것이다. 더불어 양안간의 인적, 물적 교류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담보하기 위해 중국과의 59년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평화협정 체결도 적극 검토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당선과 더불어 올해 베이징올림픽이 열린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교차다. 이제 직항로가 확대되면 특정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홍콩, 마카오, 제주도를 경유해 중국으로 가야 했던 대만 사람들은 이전보다 3배나 단축된 시간과 비용으로 베이징올림픽을 보러 중국에 갈 수 있다. ‘중화’라는 거대한 단일권역이 서서히 그 실체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올해 홍콩필름마트에서 이미 완성되었거나 곧 제작에 들어갈 많은 중화권 무협블록버스터들의 쇼케이스를 보는 기분은 묘했다. 그 어느 해보다 이들 영화의 위세가 남달랐던 올해 홍콩필름마트는 마치 무협블록버스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중국, 홍콩, 대만의 구분이 없다는 듯 물량공세를 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잉주 후보의 당선은 올 여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와호장룡>(2000)의 갑작스런 등장만큼이나 아주 의미심장한 이정표가 됐다.
<와호장룡> 이전에도 트렌드는 있었다
최근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무협블록버스터의 세계를 얘기하면서 언제나 그 전환점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와호장룡>이다. 이처럼 <와호장룡>은 홍콩 무협영화라는 도저한 흐름 속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지만 그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흐름은 물론 있었다. 실내 스튜디오를 벗어나 산수의 풍경화 속에 놓인 호금전의 영화들이 그 오랜 원조라면, 서극과 호금전의 다소 불완전한 결합으로 완성된 <소오강호>(1990) 이후 <동방불패>(1991)를 그 정점으로 무수한 무협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신용문객잔>(1992), <절대쌍교>(1992), <신유성호접검>(1993), <동사서독>(1994) 등에 이르기까지 정장을 차려입고 총을 든 홍콩 누아르의 세계와 단절한 일련의 무협영화들이 홍콩영화계를 지배하던 때였다. 그래서 이인항 감독은 “나도 <동방불패> 이후 홍콩영화계에서 한창 무협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독벽신도>(1994)라는 무협영화로 데뷔했다. 그때는 그런 영화들이 하도 붐을 이뤄서 신인감독들이 쉽게 데뷔할 수 있었다”며 “내가 볼 때 최근의 이런 무협블록버스터 붐은 <와호장룡> 이후의 특별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유행이 늘 돌고 돈다는 점에서 홍콩영화계의 1990년대 분위기나 트렌드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고 말한다. 당시 빌 콩이 <와호장룡>을 두고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던 것과 궤를 함께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와호장룡>의 영향은 적지 않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의 개방화 물결과 맞물린 원활한 중국 로케이션, 무협영화라는 로컬시네마에 외국자본을 유치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협’과는 전혀 동떨어진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던 대만계 리안 감독의 도전이라는 점에서 <와호장룡>은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 점은 <와호장룡>이 일궈낸 어떤 ‘혁신’적 지점보다, 이전부터 변함없이 이어져오던 홍콩 무협영화의 노하우가 성공적으로 접목됐다는 기존의 흐름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와호장룡>의 리안이 아시아 관객층을 넘어서기 위해 무협 장르의 컨벤션을 따르지 않고 무협을 보여주는 전략, 그리고 중국이라는 지엽적 국가성을 지우고 ‘강호’라는 상상적 개념을 택한 것은 무척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실제로 <와호장룡>은 중화권 국가들에서 신통치 못한 흥행성적을 거뒀다. 아무튼 <와호장룡>이 이전 무협블록버스터들과 달리 할리우드를 등에 업은 초국가적 프로젝트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007 네버 다이>(1997)로 대역없는 액션연기가 가능함을 알렸던 여자배우 양자경의 존재, 이미 <매트릭스>(1999) 시리즈로 할리우드 진출을 성공적으로 일궈낸 원화평 무술감독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홍콩 출신 제작자 빌 콩이 할리우드 메이저 컬럼비아의 자본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리안의 신작’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원화평이 참여하는 다음 영화’가 바로 <와호장룡>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와호장룡>은 무협영화라는 홍콩영화계 고유 장르를 홍콩이라는 특정 지역의 경계를 넘어 확장시킨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장이모 감독이 <영웅>(2002)으로 홍콩영화계의 인력들과 조우한 뒤 나온 일련의 영화들은 딱히 홍콩영화나 중국영화로 지칭하기 힘들 만큼, 거의 ‘홍중 합작’ 혹은 ‘아시아 합작’ 영화에 가깝다. 그것은 분명 <와호장룡>이 성공적으로 보여준 중국과 홍콩의 경계 지우기와 자본의 다변화를 따르는 것이며, 여타 국가의 자본을 끌어왔음에도 100% 중국 본토에서 촬영된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안에는 중국, 홍콩, 한국 사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의 위치가 다르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가령 홍콩의 서극 감독이 만들고 한국의 보람영화사가 투자한 <칠검>(2005)은 홍콩의 필름워크숍이, 중국의 펑샤오강 감독이 만든 <야연>(2006)은 한국의 MK픽처스와 <집결호>(2007)를 만들기도 했던 중국의 화이브러더스가, 홍콩의 이인항 감독이 만든 <삼국지: 용의 부활>은 한국의 태원엔터테인먼트와 중국 최대 영화 제작·배급사인 차이나필름그룹이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떠오르는 영화는 바로 정소동 감독의 <진용>(1990)과 <모험왕>(1995)이다. 정소동은 당시 홍콩 반환 이전 줄기차게 중국 로케이션을 수반한 대작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특히 <진용>은 당시 홍콩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상하이의 청명상하도 세트장에서 중국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해 촬영됐으며 주인공이 바로 ‘배우 장이모’였다. 어쩌면 모처럼 메가폰을 잡아 <연의 황후>로 돌아온 정소동 감독은 현재 <영웅> <연인> <황후花> 등으로 최근 무협블록버스터 경향을 주도하고 있는 장이모 감독의 스승이자, 이러한 경향의 오랜 산파나 다름없다. 장이모가 연출한 위 세편의 무술감독 역시 정소동이 맡았으며, <진용>의 피터 파우 촬영감독은 이후 <와호장룡>을 촬영하게 된다. <진용>에 출연한 또 다른 무술배우 우영광은 이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고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는 물론 <삼국지: 용의 부활>에 아들을 모두 잃은 위나라 장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진용>과 달리 근현대물이었던 <모험왕> 역시 이연걸 주연으로 중국 올 로케이션을 시도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이연걸과 대결을 펼친 예성은 이후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 세라프로 출연했으며, 곧 개봉할 <포비든 킹덤: 전설의 마스터를 찾아서>에서는 성룡과 이연걸 모두를 노리는 악의 화신으로 출연한다. 기존의 홍콩 무협영화에서 보기 힘들던 스펙터클을 보여준 <진용>과 <모험왕>은 아쉽게도 흥행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와호장룡> 이전 지금의 길을 열어준 중요한 ‘합작’영화들임은 틀림없다.
“견자단의 새로운 액션을 기대하라”
<화피>를 제작 중인 세기가영 영화사 부사장 캐서린 란
올해 초 크랭크인한 <화피>는 1억2천만위안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작이라는 것 외에도 조미, 주신, 진곤, 견자단, 손려 등 톱스타들이 출연하는 것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조미, 주신, 진곤의 삼각관계에 견자단이 걸쳐 있는 설정으로 조미는 극중 남편 진곤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견자단은 제수이기도 한 조미를 위로하며 멀리서 지켜본다. 여기서 주신은 그림 속의 귀신이다. <화피>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과 더불어 중국 팔대기서 중 하나로, 온갖 중국산 토박이 귀신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고전이다. <천녀유혼>의 원작인 <섭소천>도 여기 실려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견자단이 어떤 액션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 많은 팬들의 현재 관심사다.
-<화피>는 중국쪽 인력과 자본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진가상 감독과 배우 견자단을 빼면 거의 중국쪽 자본으로 완성된다고 보면 된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 본토에서 장쯔이를 포함해 ‘여배우 4대천왕’이라 불리는 나머지 세명인 주신, 조미, 손려가 출연해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진가상은 <데이지>(2006)에서 각색은 물론 제작에도 참여했던 감독이라 그를 믿고 캐스팅했다.
-기존의 무협블록버스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반지의 제왕>처럼 두편을 동시에 찍었다. 아마 무협 대작을 만들면서 이런 시도를 한 건 우리가 처음이지 싶다. 똑같은 세트와 로케이션에서 제작비도 절감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그런 시도는 중요하다고 본다. 아직 제작 초기 단계라 특별히 편집한 동영상은 없는데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본격적으로 프로모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제작방식은 다른 무협 대작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연의 황후> 이후 견자단의 새로운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견자단은 <화피>에서 폭력적인 배드 가이로 등장할 예정이다. 물론 가슴에 사랑을 안고 있지만 그것이 표출되는 방식은 악한의 모습이다. 견자단 스스로도 이 영화에 애착을 보인 건 한몸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동위 무술감독과의 호흡도 좋다. 그가 용으로 변해 나오는 장면도 있고, 하여간 그의 팬들은 기대해도 좋다.
-최근 무협블록버스터들의 홍·중 합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특별히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중국과 홍콩을 구별하는 일은 드물다. 아무래도 홍콩 영화인들로서는 중국 쪽과 합작을 해서 중국영화로 인정받게 되면 개봉 등 이점이 많으니까, 더더욱 그런 경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나도 이런 영화들을 아시아영화 시장이라는 큰 틀에서 본다. 실제로 진곤 역할을 한국의 권상우나 원빈에게 맡기려고 접촉한 적도 있다. 또 음악감독이나 음악작업 역시 일본에서 이뤄지고 있고. 일단 9월28일 중국 전역에서 1천개 정도의 스크린에서 개봉하게 되고, 한국쪽 수입사도 정해지면 개봉에 맞춰 모든 배우들을 데리고 한국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