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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과거의 흔적

과거를 사실과 실체로 나누어 상기시키는 다큐멘터리 <과거는 낯선 나라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악한 사건들이 출몰하는 이즈음이고 보니 뉴스만 보아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한다. 특히 어린 소녀 이혜진과 우예슬 사건에 대한 상심은 사실 글쓰기조차 힘들게 한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나는 이 소녀들의 죽음에 뒤얽혀 있는 성폭력의 면모에 몸서리친다.

초봄의 대기층이 황사와 애탄과 비애로 덮여가는 중 다큐멘터리의 힘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영화가 20세기의 경이적 마술 장난감으로 축포를 터트리던 시기, 크라카우어는 물리적 현실을 구원하는 장치로 영화를 생각한다. 영화와 현실의 재현, 구원의 문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후 앙드레 바쟁 등을 거쳐 영화 사유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잡는다. 신에서 깨어난 ‘구원없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탈색한 영화적 구원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정언적 마지막을 선언하도록 놓아두는 대신 크라카우어는 역사가 마지막 사물들을 들여다보고 돌보도록 한다. 역사적 맥락을 지운 채 기억의 자리를 대신한 카메라가 역사에 대한 그의 화두를 열었다. 진보나 변증법과 같은 철학적 롱숏 대신 미시분석인 클로즈업에 초점을 둔 그의 역사에 대한 통찰은 파시즘과 대중문화의 시대를 통과한 학자답게 예리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죽은 자의 과거를 향한 감독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질문

김응수 감독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라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와 뜻을 같이해 만들어진 다큐다. 다큐가 만들어지기 전 김응수 감독으로부터 이 다큐 제작과정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1986년 두 사람의 분신 사건을 다룬 기록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작품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제목은 사실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 그리고 그 사유를 자신의 방식으로 번역한 벨라 발라즈를 떠올리게 한다. “오래 망각된 것이 안개 속에서 피어오른다.… 뒤돌아보니 내 과거의 사건들이 공간적으로 보인다. 시간에 대한 공간적 견해가 오늘날까지도 내게 남아 있다. 아니다. 존재한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 자신은 사라지고, 나아가지만 사건들은 누군가 떠났던 도시들처럼 존속한다.”(1948) 이미 1916년에 발라즈는 기억과 시간을 공간으로, 하나의 지속으로 사유했다. 그 지속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보존되고 서로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 영화의 이미지들이 그에 상응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그러나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과거의 특정한 흔적들은 궁극적으로 사라지겠지만 집합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기념되든 거부당하든 주목받든 무시당하든 과거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과거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불려나온다. 김세진, 이재호의 친구, 선후배들이 그 증인들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형식은 대담하고 간결하다. 당시의 기사나 이미지 등을 일체 쓰지 않고 증언만으로 구성한다. 이 증언과 증언을 잇는 화면에서 카메라는 푸른 새벽하늘을 거미줄처럼 가리는 나무들을 향해 길 위를 미끄러지듯 조금씩 트래킹해나간다.

자신의 몸을 태우는 분신이라는 것이 워낙 강력한 것인지라 이 영화의 초반부에 소개된 분신자살의 이미지는 사실 영화 상영시간 90분 동안 이 증언들과 푸른 새벽하늘에 그 그림자를 계속 드리우고 있다.

이 영화를 본 조원규 시인이 지적했듯이 이 증언을 끌어내는 감독의 목소리의 톤은 냉정하고 내용도 매몰차다. 살아남은 자들인 김세진과 이재호를 이 영화에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 앞에 꼼짝 못하고 자신의 회상을 전하고 눈물 흘린다. 너무나 그 질문이 매정하여 그는 잠시 화면을 중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다시 끝까지 보았을 때 왜 그러한 톤이 요구되었는지를 이해했다고 말한다.

상처입은 과거를 위한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치료

사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본 뒤 내가 관여하고 있는 ‘Art and Technology 클리닉 랩’과 KT&G 상상마당과 더불어 ‘힐링 히스토리: 다큐, 역사와 치유’라는 워크숍을 열었다.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가 주로 기록, 고발 그리고 회고적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면 이제 김동원 감독의 <송환>,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여성영상집단 움의 <이반검열1, 2>, 나루의 <돌 속에 갇힌 말> 등과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통해 다큐멘터리 텍스트가 놓인 역사와 문맥이 치유의 과정을 열어줄 수 있는가를 묻는 자리였다. 이중 여성영상집단 움이 실천하고 있는 10대 레즈비언들에 대한 다큐 작업과 그들에 대한 미디어 교육은 좀더 직접적인 치유의 과정을 보이고 있다. 장애 여성과 공동 제작한 <거북이 시스터즈>,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을 다룬 <우리들은 정의파다>, 그리고 <이반검열1, 2>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감독만 제작, 배급, 상영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출연진들 역시 이후 1년간을 영화제나 상영회 등에서 관객과 만나며 변모하고 치유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여성주의적 배려와 실천을 해왔다. 김동원 감독이 상계동이나 행당동 주민들이 영화 제작의 참여자이고 관객인 방식의 이른바 일본의 걸출한 다큐멘터리스트 오가와 신스케의 양식을 견지해왔고, 변영주 감독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일정한 표현 의욕을 고취시켰다면 여성영상집단 움은 배우들이 상영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소통의 채널을 열 수 있도록 노력해왔던 것이다.

김응수 감독은 이 ‘힐링 히스토리: 다큐, 역사와 치유’ 워크숍 자료집에 실린 글의 서두를 ‘사실’과 ‘실체’로 나누어 열고 있다. 사실은 1986년 4월28일 9시,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야 쇼핑 근처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던 김세진, 이재호 두 사람이 400여명의 2학년 학생들과 함께 전방 입소 거부 투쟁을 하다가 4층 건물에서 분신했다는 것이다.

‘실체’에서 감독은 ‘연기처럼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누군가는 들었는지, 아니면 우발적인 상황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옥상 위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을 허망한 과거의 분신 사건으로 놓아두는 대신 감독은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통해 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찾는다. 이중 김세진이 수배 중일 때 무엇인가를 전해주기 위해 그를 잠시 만났던 한 여자 후배의 증언은 가슴에 사무친다.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김세진은 회사원인 양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은 채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신은 운동화를 바라보고 있던 김세진은 자신도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그리고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새처럼 나는 대신 연기처럼 사라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연기처럼 날아가버린 이 두명의 열사를 친구, 선후배를 통해 차례로 불러오던 다큐는 끝부분에 가면 젊은 조감독의 말을 듣는다. 살아남은 세대의 죄책감과는 달리 이 20대의 조감독은 자신은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감독의 자기 고백이 등장한다. 감독은 회한에 휩싸인 듯 얼굴이 곧 눈물범벅이 된다. 위의 다큐 워크숍에서 감독은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고 심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성취하려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공간화하고 기억의 지속을 열망한다는 의미에서 이 다큐는 김응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보면 1996년 장편 데뷔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와 쌍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데뷔한 지도 10여년이 지났다. <욕망> <달려라 장미> 그리고 <천상고원>을 통해 그는 한국 영화계에 독특한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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