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아서
사라진 그녀의 흔적을 찾아서2005년 여름, K는 서울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찾아 인도 북부 티벳 접경지역인 라다크로 여행을 떠난다. 3년 전 여름 K와 그녀는 같이 그 곳을 여행했었고, 그녀는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갔다. K는 그녀를 만나 왜 자신을 떠났는지 묻고 싶다.
K는 히말라야를 넘기 전, 우연히 정체불명의 여행객 태훈을 만나 그와 함께 히말랴야를 넘는다. 눈이 녹는 여름 한철에만 길이 열리는 5000미터의 고원과 협곡을 넘으며 K는 고산병으로 죽을 만큼 힘든 구토와 두통에 시달린다. 천상의 고원에 이르러 K는 극심한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편안함이 공존하는 모순된 순간을 경험한다.
천상의 고원에서 길을 묻다
K는 3년 전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을 가지고 그 사진의 주인공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미 그 곳에 없다. K는 다시 여행을 떠나 더 작은 마을로 들어간다. 천국처럼 아름다운 길을 지나 시골의 초등학교와 오지의 사원을 찾아간다. 어린이들과 사원의 승려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진 속의 자신들을 알아본다. 사진을 다 돌려주고 난 후, K는 그들이 그녀를 기억하는지, 혹시 거기에 오지 않았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K는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고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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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 떠난 그들more
<천상고원>은 홀연히 사라진 한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들고 그녀를 찾아 히말라야 고원의 한 마을인 라다크로 여행을 떠나는 남자 ‘K'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사라진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같은 장소로 떠나는 또 한사람. 영화는 떠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보는 세상, 구름 위에 존재하는 히말라야 고원의 정경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K는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황폐함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만나게 된다. 죽을 만큼 심한 고산병에 시달리던 그는 육체의 소멸 앞에서 정신적인 소생을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청명한 하늘, 바람 부는 고원에서 거친 숨소리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K의 눈빛은 그 여정에 함께 했던 관객들에게도 알 수 없는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운명처럼 만들어진 영화, 감독이 배우가 되기까지
영화에서 주인공 K를 연기한 사람은 바로 감독이다. 원래 함께 하기로 했던 배우가 촬영을 앞두고 합류하지 못하게 되자 본의 아니게 김응수 감독 자신이 출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우로 변신한 감독, 하지만 그는 육체적 고통의 한계를 느끼며 오히려 자기 내면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김응수 감독은 이 영화가 운명적인 무엇인가의 개입으로 만들어 졌다고 믿고, 자신이 촬영하며 겪었던 그 고통의 과정에서 얻게 된 일종의 정서적 환기를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한다.
영화에게 길을 묻다
<천상고원>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물어내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장르를 떠나 보다 ‘진실’에 가깝게 가고자 하는 영화이며 그 가운데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혼합은 이 작품의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쓰일 뿐이다.
<천상고원>은 마음을 열고 어딘가로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영화 작업을 끝내고 문득 소진되어가고 있다고 느낀 김응수 감독은 3년 전 여행했던 라다크의 사람들이 보고 싶었고, 아름다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욕심보다는 라다크의 현지인들에게 사진을 보내준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나며 만든 영화가 바로 <천상고원>이다.
험난한 여정 끝에 자아를 응시하는 영화
바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결핍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감독은 <천상고원>을 통해 우리들이 잃어버렸거나 어느 순간 사라진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열정, 사랑, 젊음 같은 정서적인 것들이거나 돈이나 명예같이 물질 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인가’는 찾을 수도 있고, 못 찾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찾는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황폐함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주인공 'K'를 통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천상고원>은 극히 절제된 대사로 이루어져있으며, 몇 마디 말보다 더 풍부한 영상으로 채워져 있다. 해발 5000미터 고원을 묵묵히 올라가는 차. 간간히 구토를 위해 내리는 주인공들 뒤로 보이는 라다크의 천해 절경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자랑거리이다.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작아지고 속세의 고민과 문제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한 켜일 뿐임을 말없이 펼쳐지는 넓은 대지는 보여준다.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은 적이거나 친구일 것이다”
라다크의 좁은 골목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K'는 3년 전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의 주인공들을 찾아 약속대로 사진을 돌려주려한다. 험난한 5000미터 고원에서의 신비로운 하룻밤을 보낸 그는 그곳에서 육체의 소멸과 정신의 소생을 경험한 후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순수하고 평범한 라다크 주민들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친구로서 그들과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간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돌아왔지만 정작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지우고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발견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매우 험난한 위치에 있는 라다크에는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은 적이거나 친구일 것이다’라는 속담이 전해져 온다. 라다크 현지인들의 순수함과 자신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보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고생스러웠던 여행을 감수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천상의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 'K'와 함께 관객은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마을 라다크와 친구가 된다.
새로운 장르, 영화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영화
<천상고원>의 주인공 K는 김응수 감독 자신이다. 그리고 K가 떠나는 라다크 역시 감독이 3년 전 여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응수 감독은 영화 속 픽션의 여행에서 자신이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실제 찍었던 과거의 사진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스스로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문다.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보여주는 도전을 감행한 김응수 감독은 “지금 우리 마음은 사막처럼 황량하지만 이 여행이 끝날 때쯤 짙푸른 녹음의 우거진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천상고원>은 80분이라는 러닝타임에서 크게 1, 2부 형식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형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 주인공 K는 홀연히 사라진 여인을 찾아 끊임없이 이어진 비포장 도로,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고산병에 시달리며 해발 5000미터의 고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고통을 참던 어느 날 밤,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신음하던 K는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고원에서의 여정을 마친다. 그가 그녀를 만났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그의 눈빛을 통해 전해진다. 이어지는 라다크에서의 K의 모습. 낯선 이에 대한 조금의 경계도 없이 사진 속의 주인공을 찾아주기에 바쁜 라다크 현지인들과의 하루는 ‘천상고원’에서 겪었던 그 고통의 밤이 가져다준 환상인 듯 평화롭고 아늑하다.
형식과 주제면에서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천상고원>은 2006 전주국제영화제와 서울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2006년 압도적인 작품 중 하나’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 건 우연이라 설명하기가 어려울 만큼의 우연성이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난 2002년 여름, 영화 <욕망>을 끝낸 다음 인도 북부 티벳 접경 지역인 ‘라다크’로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히말라야를 넘어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 기록된 ‘라다크’라는 지역을 가기 위해 난 1박 2일 동안 내내 버스를 타고 그 곳으로 향했다. 해발 5000미터에 이르렀을 땐 고산병으로 인한 심한 구토와 두통으로 죽고 싶은 절박함마저 들었다. 그리고 5000미터 정상에서의 1박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내게 주었다. 부족한 산소로 인해 밤새 이어진 위액마저 뿜어낼 만큼의 고통스런 구토로 정신을 잃을 때쯤 바라본 밤하늘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별들은 호박만한 둥근 호롱불처럼 매달려 있었고, 그 아름다운 장엄함 속에서 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일주일간 병원에서 쉬었는데, 다시 그 산을 넘어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감독의 말
난 그 곳에 머물며 중고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라다크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의 주인공 중에는 주소를 적으며 꼭 보내달라는 모녀도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돌아가지 않으면 어떨까, 그대로 그 곳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될까... 영화 <달려라 장미>를 끝낸 후 다음 영화에 관한 고민을 하던 중 인도에 간 후 소식이 끊긴 애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고, 그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남자가 인도에서 소식을 끊은 이유는 죽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 남자는 내가 느꼈던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닐까?
-- 김응수 감독